제128화
황제는 구염락의 친위대가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황제의 눈에 그들은 사악하고 악랄한 건달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이제 황제인 자신까지 이용할 셈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황위에 앉은 지 어언 삼십 년, 그가 부유하고 강대한 나라를 만든 건 사실이었지만 동시에 녹봉만 축내는 부패한 관료를 길러낸 것도 사실이었다. 대주국은 벌서 여러 해 동안 전쟁 없이 사회를 안정시키며 경제력을 회복하는 데 힘썼다. 다음 대에는 예법과 윤리, 도덕에 치우치지 않는 제왕이 나올 법도 했다.
구염락은 생모의 출신만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황제를 만족시키는 황자였다. 심지어 장서열을 원하는 그 마음까지도.
탄식을 내뱉은 황제가 고요한 수면을 응시했다.
“권여아가 그리 마음에 차지 않는다면 억지로 맞이할 필요 없다. 허나 내 듣기로 세자는 장서열에게…….”
구염락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
“일의 성공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려 있습니다. 무엇이 두려우십니까?”
구염락이 차가운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황제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장서열과 사랑에 빠진 후 그녀가 나라를 도탄에 빠뜨릴까 두렵구나.”
“쓸데없는 걱정이십니다.”
황제의 낚싯대가 움직였다. 그러나 그 역시 물고기를 낚아챌 마음이 없었다.
“어찌 할 생각이냐?”
구염락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위지(尉遲) 씨 가문의 일은 막을 내렸으니 다른 것을 건드리겠습니다. 반란을 평정하려면 최소한 반년은 걸릴 것입니다.”
“반년 후에는? 싸움은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구염락이 비웃으며 입을 열었다.
“반년 후에 전 이미 태자가 되어 있을 테니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주변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깜짝 놀란 황제는 하마터면 손에 쥔 낚싯대를 놓칠 뻔했다.
“네가 감히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팔 셈이냐? 무릇 전쟁이란 함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것이거늘, 어찌 인명을 하찮게 여기는 게야!”
구염락은 냉랭한 표정으로 황제를 마주했다.
“폐하께서 향락에 젖어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고 해서 다른 이도 똑같이 굴 거라 생각지 마십시오. 국가의 이익은 그리 간단히 얻을 수 있는 게 아니고, 서풍엽 역시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어차피 승패는 변하지 않습니다. 전 그 나라가 그곳에 위치해 있는 게 싫습니다.”
그곳은 그의 생모가 군기였다는 걸 계속해 떠올리게 만들었다.
황제는 그를 질책하지 않았다. 무릇 국가의 현재란 내일을 위한 것이었다. 변경의 충돌과 국가 간 외교는 어느 제왕이든 무시할 수 없는 난제였다.
“만일 서풍엽이 계속해 반란을 평정한다면 어찌할 것이냐? 넌 충신의 아내를 빼앗은 폭군이 된다.”
“아니요. 그때까지 저는 황제가 아닙니다.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것은 폐하이십니다.”
화가 극에 달한 황제가 결국 헛웃음을 터뜨렸다.
“포기하거라. 아무리 짐이 황제이고 아둔한 군주라 해도 병권을 쥔 충왕부의 며느리를 빼앗을 순 없다.”
구염락이 돌연 말했다.
“적과 내통하여 나라를 판 왕부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뭐?”
순간 황제는 할 말을 잃었다.
“일의 성공은 사람의 노력 여하에 달려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백국(白國)에는 별 볼 일 없는 어린 황자가 하나 있지요. 올해로 다섯 살이고 변경에서 자랐습니다. 백국을 친 서풍엽은 필시 어린 아이와 부녀자는 죽이지 않는다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이 어린 황자를 살려줄 것입니다. 도망친 황자는 반드시 후환이 됩니다.”
“서풍엽이 그 계략을 눈치챈다면?”
“설령 그가 황자를 죽인대도 아무나 황자로 만들면 될 일입니다.”
“가짜 황자를 풀어준다고?”
그러나 황자가 가짜라는 걸 백국에서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눈치채기 전에 황자는 죽습니다.”
황제는 빈틈없이 차분한 구염락의 표정에 일순간 마음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장서열에 대한 마음이 그토록 깊은 것이냐?”
“따분한 질문을 하시는군요.”
아니, 그건 조금도 따분한 질문이 아니었다. 황제 또한 과거 조옥언을 깊이 사랑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뿐이었다. 지금 당장 구염락의 생모와 마주한대도 그는 다시 한번 그 미색에 빠져들 것이다. 제왕에게 사랑이란 때론 너무나 가치 없는 것이었다. 만약 그에게 처음 사랑을 알게 해 준 이가 조옥언이 아니고, 그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없었다면 황제는 지금과 같이 조옥언을 사랑하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궁에는 이미 수많은 비빈들이 있었다. 오래도록 여러 후궁을 보아온 황제에게 여인이란 별다를 것 없이 비슷한 존재였다. 어쩌면 조옥언이 입궁하지 못한 건 천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여전히 과거의 추억으로, 황제를 그리움에 사무치게 만드는 여자아이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여인을 위해서가 아닌, 아름다운 추억을 지키고 그 미안함을 보상하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가 한 가지 궁금한 것을 물었다.
“네 배후에 황후 말고 또 누가 있느냐? 너 혼자만의 힘으로 그렇게 많은 걸 알고 있을 수는 없을 터, 심지어 백국의 황자가 변경에서 자랐다는 건 짐조차도 몰랐던 사실이다. 헌데 궁 밖으로 나가본 적도 없는 네가 그 사실을 알고 있구나.”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일부 지루한 사람들이 일을 도모하고 있지요. 그러니 구염(九炎) 씨 가문의 가업을 엉뚱한 자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폐하께서는 제가 완벽해지기 전까지 반드시 굳건하셔야 합니다. 궁에 돌아가자마자 태자 책봉 성지를 내리신다면 폐하께서도 안심하실 수 있을 겁니다.”
황제가 큰 소리로 껄껄 웃었다.
“어느 멍청한 녀석들이 너를 택했는지 모르겠으나 장래에 호되게 뒤통수를 맞겠구나.”
황제는 도리어 마음이 홀가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조옥언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그가 장서열을 얻고자 필사적인 구염락을 비난할 수는 없었다.
“구염단신의 사고는 어찌된 것이냐.”
제왕의 살기를 띤 황제의 말투가 처음으로 차가워졌다. 여전히 개의치 않은 채 구염락이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가 서열 누님을 난처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그대로 갚아준 것뿐입니다.”
그 말에 그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황제가 분노에 타오르는 눈길로 구염락을 후려쳤다. 그는 그대로 물에 빠졌다.
“네가 감히! 이 천하에 괘씸한 것! 구염단신은 네 혈육이거늘!”
구염락은 움직임 없이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그 모습에 오히려 대경실색한 것은 황제였다. 그가 소리쳤다.
“여봐라! 열셋째가 물에 빠졌다!”
조용하던 수면이 순간 들썩이기 시작했다.
차 한 잔을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구염락은 마침내 침대 위에 눕혀졌다. 옷을 갈아입은 그는 형형한 눈빛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사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황제가 어둡고 오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짐은 널 익사시키지 않았다.”
구염락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폐하.”
모두의 예상을 깨고 곧바로 태자 책봉 성지가 내려졌다. 구염락이 물에 빠진 다음날, 황제는 십삼황자 구염락이 태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포했다.
태자 책봉 후 신하들은 탄식했다. 역시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과거 이름조차 거론할 수 없었던 비천한 황자가 눈 깜짝할 새 최고의 지위를 거머쥐었다. 책봉식을 위하여 흠천감에서는 길일을 점쳤으며, 모든 절차는 예부에서 직접 지휘했다. 황제는 성대한 책봉식을 명했다.
피서지에서 구염락을 모시던 소리자와 금용은 눈물을 쏟았다. 모진 세월을 견뎌낸 끝에 마침내 존귀한 몸이 된 주인의 앞에는 더 이상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도, 배를 곯을까 추위에 떨까 걱정할 나날도 없었다.
소리자와 금용의 지위 또한 눈에 띄게 올라갔다. 이전까지 그들에게 아첨하는 수준으로 잘해 주었던 하인들은 이제 필사적으로 그들의 환심을 사려 했다. 사람들은 소리자의 한 마디면 다리가 부러지도록 뛰어다녔다.
금용은 만약 곤장 스무 대를 맞아야 했던 벌을 지금 받는다면 분명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을 거라고 확신했다.
태자 책봉이 가져다 준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동안 거만하기 짝이 없던 고고(姑姑)와 대태감(大太監)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화하고 친절해졌다. 심지어 송 고고(宋姑姑)조차도 금용에게 마치 간이라도 빼줄 듯 살갑게 굴며, 어떻게 해야 주인의 일거수일투족을 장악하는 여인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었다.
하지만 권력은 결코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금용의 기세가 두드러졌지만 금수(錦綉)와 나머지 궁녀들 역시 그에 뒤지지 않았다. 이들은 황후가 손수 구염락에게 보낸 궁녀들로, 궁에서 나름의 입지를 다지고 있었기 때문에 금용과의 다툼은 불가피했다.
하지만 금용에게는 소리자의 도움이 있었고, 결정적으로 일찍이 태자와 쌓은 친분이 있었다. 수차례 싸움 끝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금용을 언니라고 부르게 되었다. 금용 역시 대범하게 그들을 동생이라 칭했다. 태자의 최측근인 제1시녀 싸움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 * *
정궁전 안, 황후는 멍하니 창가에 앉아 흔들리는 버드나무 가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음속에 기쁨과 근심이 교차했다. 본래 자신의 아들이 누렸어야 할 부귀영화의 주인이 바뀌었다.
안타깝게도 구염단신은 황위와 인연이 없는 슬픈 운명이었다. 지금 이 순간 구염단신을 기억하는 이는 모후인 황후 외에는 없을 터였다. 사람들은 새로 태자가 된 구염락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여념이 없었다. 늙은 노모와 그녀의 가여운 아이는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을 것이다.
“태자 전하 납시오!”
황금색 태자 망포를 걸친 구염락이 엄숙하고 공손한 태도로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칼로 완벽히 조각한 듯한 이목구비가 절로 위엄을 드러냈다.
“소자, 어마마마께 인사드립니다. 오늘 연밥이 꽉 찬 것을 보고 어마마마께 드릴 생각에 특별히 하인을 시켜 따왔습니다.”
황후가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더욱 성장한 모습이었다. 처음 보았던 날, 그는 여위고 허약한 새끼 곰 같았다. 그러나 현재 구염락은 수려한 용모를 자랑했고, 그때의 거칠고 교양 없는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황궁에서 나고 자란 존귀한 이처럼 모든 이를 압도하는 고고함이 돋보였다.
“태자가 마음을 썼군요.”
자리에서 일어난 황후가 조정의 관리를 대하듯 정식으로 구염락을 맞이하며 은연중에 그에게 잘 보이려는 인상을 주었다. 과거와 다른 현재가 도래했다. 책봉 성지 하나로 모든 것이 변한 것이다.
물론 이는 황후가 바란 결과였으며 구염락은 그녀가 선택한 황자였다. 하지만 태자가 된 이상 그녀는 더는 마음대로 구염락을 좌지우지할 수 없었다. 이미 황후의 은혜는 희미해졌다.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구염락과 맺은 모자의 정이 존중과 보호로 돌아오는 것뿐이었다.
미색이 뛰어나지 않았던 황후가 과거 수많은 여인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러한 통찰력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양자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시간 나면 자주 들르세요. 내 곁에만 있느라 여아도 많이 답답할 테니 가끔 데리고 나가 주면 더욱 좋고요.”
“소자, 어마마마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목한 광경이었다. 황후는 관대했고, 태자는 웃어른을 섬기며 공경했다.
그러나 그는 어머니의 무릎에 엎드려 어리광을 부리는 자식이 아닌, 눈에 야망을 가득 채운 무정한 자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