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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27)화 (127/449)
  • 제127화

    얼굴이 온통 새파랗게 질린 헌원가는 화가 나서 잔뜩 충혈된 눈으로 울고 있었다.

    “우리가 상이를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장서영이 모르는 것도 아니잖아요. 설령 상이가 혼인을 하겠다고 했어도 족보에 올린 뒤 적녀를 맺어주기 위해 다른 혼처를 알아봤을 거예요!”

    “…….”

    “게다가 장서영이 저희 어머니가 마치 상이를 구박이라도 한 것처럼 꺼리며 혼담을 거절했다니……. 그러니까 전… 전 언니의 서출 여동생만 나쁘다고 말하는 게 아니에요. 아들을 이렇게까지 함부로 대하는 저희 어머니에게 실망한 거예요!”

    장서열은 헌원가가 헌원상을 얼마나 애지중지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화를 내는 게 지나치지 않다고 생각했다. 호부상서의 외아들이 서녀를 아내로 맞이하려 했다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헌원상을 용납하지 못한 헌원 부인이 농간을 부린 거라 생각할 게 뻔했다.

    눈물을 닦은 헌원가가 여전히 화가 나서 말했다.

    “어머니는 연세가 많으셔서 회임한 아이를 낳지 못할 거예요. 그런데 뻔뻔한 이가 소문을 퍼뜨렸어요. 어머니가 이번 기회를 틈타 상이를 제거하려 한다고요. 화가 난 아버지는 상이를 족보에 올리는 걸 보류하셨어요. 그의 생모에게 본때를 보여주려고요! 이럴 때면 제가 남자가 아닌 게 원망스러워요. 화가 나 죽겠어요!”

    분에 못 이긴 헌원가가 곁에 있던 의자를 발로 차 넘어뜨렸다. 장서열이 헌원가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했다.

    “헌원상의 생모와 똑같은 사람이 되지는 마. 그녀가 어떤 출신인지 너도 잘 알잖아.”

    “가끔은 아버지께서 상이의 생모를 제거해 후환을 없애자고 했던 말에 동의하고 싶어져요. 하지만 그건 훗날 상이에게… 씻을 수 없는 빚을 지는 일이 될 거예요.”

    사실 장서열의 입장에서는 헌원상의 생모가 살든 죽든 그의 존재 자체가 후환이었다. 하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어쨌든 그 여인이 살아있다면 앞으로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 벌어질 것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으로선 헌원상이 헌원 씨 가문의 가족을 멀리하지 않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창피하네요. 언니에게 이런 심란한 이야기를 하다니.”

    장서열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답했다.

    “어느 집이나 사정은 다 똑같아. 내가 왜 널 찾아 온 줄 아니? 네 동생과 혼인할 뻔한 상부의 그 골칫거리 때문이야. 내 아버지가 봉명지명을 타고 난 아이라고 소문냈던 그 아이 기억해? 그게 바로 장서영이란다.”

    헌원가가 놀라서 말했다.

    “앗! 그럼 장서양이 그녀의 오라버니고요?”

    “맞아. 장서양을 알아?”

    헌원가가 자랑스럽게 답했다.

    “당연하죠. 언니만 비밀인 줄 알지 사실 남의 집 걱정거리는 바깥에서 더 잘 아는 법이죠. 그렇지 않으면 사는 게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웃었다.

    “참, 네 혼사는 어떻게 됐어?”

    얼굴을 붉힌 헌원가가 돌연 용감하게 말했다.

    “저 당자에게 청혼했어요! 전 현천기나 현천손은 신경 안 써요. 글쎄, 제 신분도 무릅쓰고 만나러 간 건데 당자는 저를 기억하지도 못하더라고요.”

    헌원가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언니, 당자에게 저를 아내로 맞이할 생각이 있긴 한 걸까요? 그는 제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난대요. 최소한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 당자를 정말 제 남편으로 맞이해야 하는 걸까요? 그가 저를 존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어요!”

    장서열은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드디어 현천기에게도 계획이 틀어지는 날이 오다니.

    “난 당자가 괜찮은 것 같아. 나중에 내가 당자의 속내를 알아볼게.”

    헌원가가 얼른 장서열의 손을 잡아당겼다.

    “언니, 꼭 저에 대해 좋게 말해 줘야 해요. 제가 예쁘지 않고 어질지도 않다는 거 알고 있어요. 제가 청혼하니까 그렇게 낯이 두껍던 당자가 놀라서 도망가더라고요. 언니는 당자와 친하니 얘기 좀 잘해 주세요. 혼인이 뭐 별 건가요? 그저 함께 하루하루를 보내는 거잖아요. 전 그에게 최대한 자유를 줄 거예요. 그러니까 언니가 꼭 도와줘요.”

    “알았어. 내가 힘써 볼게.”

    헌원가가 웃으며 장서열을 와락 껴안았다.

    “역시 언니가 최고예요! 언니, 제게 춤을 가르쳐 주세요. 복잡한 것은 말고 그날 언니가 췄던 그 곡으로요.”

    헌원가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떨궜다.

    “물론 바쁜 언니에게 폐를 끼치는 거라면…….”

    “난 한가해.”

    장서열은 헌원가가 여성스럽게 보이지 않을까 봐 걱정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장서열은 어떻게든 원하는 남자를 쟁취하려는 의지를 지닌 헌원가에게 탄복했다. 모든 일에 가족의 안위를 생각하는 헌원가는 전생의 자신보다 훨씬 성숙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번 생에서 현천기와 멀리 떨어지기만 한다면 헌원가는 분명 편안한 생을 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심지가 굳은 여인을 대체 누가 요절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대신 춤 배울 때 힘들다고 투정부리거나 날 내쫓으면 안 돼.”

    헌원가의 눈에 순간 반짝이는 빛이 스쳐지나갔다.

    “정말 가르쳐 줄 거죠? 나중에 다른 말하면 안 돼요. 역시 언니가 최고예요. 보답하는 뜻으로 영원히 언니에게서 세자를 빼앗지 않을 게요!”

    “그만해, 실없기는. 난 이만 가 볼게. 내일 다시 올 테니 춤 연습할 방을 준비해 둬.”

    “알았어요. 제가 배웅할게요.”

    장서열이 막 저택의 대문을 나설 때였다. 저만치서 헌원상이 부랴부랴 뛰어왔다. 마차에서 뛰어내린 뒤 하인을 재촉해 제대로 땅을 디딜 새도 없이 달려온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누이와 마차에 오르던 장서열을 번갈아 바라보며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마치 온순한 양 같았다.

    헌원가가 헌원상을 꾸짖었다.

    “부끄러운 줄은 아는구나? 다 큰 녀석이 이렇게 지각없이 굴면 어떡해. 이리 와서 서열 누님께 인사드리렴.”

    “괜찮아.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어린 아이가 제멋대로 굴 수도 있지. 갈게, 너희도 어서 들어가.”

    장서열이 농교의 부축을 받으며 마차에 올랐다. 헌원상은 누이의 옆에서 마차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헌원상과 함께 들어오며 헌원가가 물었다.

    “뭘 그리 서두르고 그래. 또 노는 데 정신이 팔렸지? 다음에 또 오늘처럼 막무가내로 굴면 엉덩이를 때려줄 거야. 자, 얼른 가 봐.”

    하지만 헌원상은 누이를 쳐다보며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누님이랑 함께 있으면 안 돼요?”

    기분 좋게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는 헌원가의 눈에 씁쓸함이 어렸다. 이런 아우를 어찌 아끼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무튼 입만 살아서는. 자, 그럼 같이 어머니께 가자.”

    * * *

    피서지는 연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삼면이 물로 둘러싸인 이 지역은 가을처럼 바람이 시원하기로 유명했다. 피서지의 모든 정자와 누각, 옥탑은 황제가 머무는 장소였기 때문에 관리에 한 치의 소홀함도 없었다.

    평상복을 입은 황제는 시위를 모두 물린 뒤 구염락과 함께 마을 안에 있는 호수에 배를 띄우고 낚싯대를 드리웠다.

    구염락은 황제의 곁에서 끈기 있게 낚싯대를 잡고 있었다. 제왕을 대면하는 중압감도, 그를 존경하는 마음도 없는 얼굴이었다. 그는 마치 황제를 앞으로 두 번 다시 볼 일이 없는 낯선 이처럼 여겼다.

    황제도 침묵했다. 작은 배 위에는 사공을 제외하면 오직 둘뿐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수면을 쳐다볼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한참 뒤, 황제가 손바닥만 한 작은 금붕어를 낚아 올렸다. 그가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군.”

    그리고 아무렇게나 낚싯바늘을 던져버렸다.

    구염락은 이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저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황제의 기분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어차피 그는 황제가 굳이 사람들과 멀리 떨어진 곳으로 자신을 데려 온 이유를 알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이 자리에서 황제가 원하는 답을 내지 못한다면 태자 책봉은 끝이었다.

    하지만 구염락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만에 하나 황제의 마음에 차지 못한다면 그는 황제를 제위에서 물러나게 할 작정이었다. 비단 황제가 아니어도 내각(內閣, 황제를 도와 정무를 처리하던 기관)을 통해 황후나 황태후의 조령을 받아 곧바로 제위에 오르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내각과는 이미 이야기가 끝난 상태였다.

    남은 건 오히려 황제가 그에게 얼마나 만족할 만한 답을 주는가였다.

    잠시 뒤, 구염락의 낚싯줄이 움직였다. 그러나 그는 낚싯대를 거두지 않았다. 그저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사람처럼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을 뿐이었다. 보다 못한 황제가 미간을 찌푸렸다.

    “어째서 끌어올리지 않는 게냐?”

    구염락이 무미건조한 말투로 말했다.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의아한 눈길로 구염락을 쳐다보았다. 그는 도무지 구염락이 익숙해지지 않았다. 하루도 곁에 두고 길러본 적이 없는 아들이었다. 구염락의 출생은 그 자체로 자신의 오점이자 배신의 증거였다.

    구염락이 황제의 눈에 들어온 건 이 년 전부터가 아닌, 그의 곁에 장서열이 함께 하면서부터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구염락이 장서열의 눈에 들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황후가 구염락을 양자로 삼겠다고 했을 때 반대하지 않은 것 역시 그 때문이었다. 그는 대체 장서열이 구염락을 아낀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황제는 자신의 아들들 중 구염락이 가장 우수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총명했고 신중하게 행동했지만 또 어떤 순간에는 황제 앞에서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낼 줄 알았다.

    구염락과 처음 독대했던 날은 아직도 선명했다. 구염락은 황제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심지어 그가 보는 앞에서 제1대태감인 진 공공을 냉대했다.

    황제의 어떤 아들도 감히 할 수 없는 일을 구염락은 서슴지 않고 했다. 과거 황제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것을 이유로, 그는 황위에 대한 일체의 혐오감을 조금도 숨기지 않았다.

    황제의 눈에 구염락은 절대 무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가차 없이 남을 업신여길 줄 알았다. 이는 그가 뭇 신하들에게 보여주는 학구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황위를 원하느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어째서?”

    황제에게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친아들이 아니었다면 바로 죽였을지도 모를 만큼 버릇없는 녀석이었다.

    구염락은 낚싯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서열은 아직 스스로를 모르고, 서풍엽 또한 포기하려 들지 않을 텐데 제가 어찌 높은 곳에 설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제가 두 사람을 억지로 갈라놓았다고 손가락질하겠지요. 그럼 저는 마지막 기회를 놓치게 될 겁니다.”

    황제의 시선이 구염락을 향했다. 치밀한 성격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지독한 녀석인 듯했다.

    “황후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느냐? 넌 황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일어선 황자다. 권여아를 버린다면 배은망덕한 일이 될 것이다.”

    구염락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폐하께서 제가 황후를 저버리도록 고집을 부리고 계신 탓입니다.”

    황제는 일순간 구염락을 호수로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역시 천하디천한 여인이 낳은 자식다웠다. 나라에 대한 애정, 예의, 염치 같은 건 전혀 없었고 그가 활용하는 수단 역시 떳떳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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