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장서전의 일을 전해 들은 장서양은 홀가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장 씨 가문의 적자라고 으스대 봤자 결국 서자 출신인 자신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와 혼인할 여인만 불쌍할 따름이었다.
장서전의 혼사가 난항을 겪자 오히려 활개를 치게 된 건 장신성이었다. 그는 장서전과 장서열의 혼사에는 어떠한 발언권도 얻지 못했지만, 서출 자녀들의 혼사만큼은 달랐다.
저녁 식사를 마친 뒤 전원(前院)으로 돌아온 장신성은 장서양을 몰래 서재로 불러 마음에 둔 여인이 있는지 물었다.
장서양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혼사에 아무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아내가 될 여인은 그의 출세에 별 도움이 되지 않을 터였다. 그는 서자였고, 어머니 역시 벌을 받아 암자로 보내졌다. 만약 학자 집안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한다면 그녀 역시 서녀 출신일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내를 맞이한다한들 그의 벼슬길에 도움을 줄 리 만무했다. 결국 그는 혼인과 관계없이 스스로 분투해야 했다.
“저는 급하지 않습니다. 서목이도 이제 다 컸으니 참한 아가씨를 찾아 저 대신 서목이부터 정혼을 맺어 주십시오.”
장신성은 물론 장서목도 아꼈지만 이는 장서양을 아끼는 마음에 미치지 못했다.
“너도 이제 나이 열셋인데 어찌 급하지 않다 하겠느냐. 조옥언은 너희에게 신경 쓰지 않지만 이 아비는 다르다. 지금은 종3품 대원인 내 오랜 부하 하나가 실권을 쥔 좋은 자리에 앉아 있다. 그의 딸이 올해 열한 살인데, 아비가 보니 외모와 학식이 제법 훌륭하더구나.”
장서양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적녀입니까?”
장신성이 기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암. 넌 가장 좋은 걸 누릴 자격이 있다. 학식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네가 장서전보다 월등히 낫질 않느냐. 당연히 그 아이보다 좋은 걸 가져야지.”
장서양은 감동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믿기가 어려웠다. 상대 가문에서 어떻게 적녀의 짝으로 서출 사위를 마음에 들어 한단 말인가.
“아버지, 분명히 저의 혼사를 말씀하신 게 맞습니까?”
장서양은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정3품 대원의 적녀가 서자인 자신과 혼인을 한다는 건 아무리 봐도 불가능해 보였다.
장신성이 호언장담했다.
“당연히 네 혼담이지. 처음에는 다소 껄끄러운 기색이 있었으나 다음날이 되니 상의해 보자고 하더구나. 기왕 이리 된 거 서둘러 진행하자며 딸아이의 초상화까지 가져 왔다. 서 씨 가문의 딸은 너도 본 적이 있을 게야. 어떠냐, 너도 좋지 않으냐?”
장신성은 아들에게 큰일을 성사시킨 공을 인정받으려는 듯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장서양은 감사할 따름이었다. 정실부인의 소생인 서 씨 가문 아가씨는 자신과는 격이 다른 여인이었다. 게다가 어여쁜 용모에 활발한 성격을 갖고 있어 그에게는 언감생심 혼인 상대로 생각해볼 수 없던 여인이었다. 그런데 그러한 가문에서 딸을 자신과 혼인시키려 한다니.
장서양은 가슴이 설렜다. 정말로 이 혼사가 성사되기만 한다면 그에게는 막대한 아군이 생기는 셈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학문에 힘쓴 보람이 있었다. 드디어 혼담으로써 이에 대한 인정을 받게 된 것이다.
“아버지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장신성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좋구나. 아주 좋아!”
* * *
좌상부와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서 씨 가문에는 화목한 기운이 가득했다.
서 씨 가문의 저택은 크지 않았지만 고풍스러웠다. 지난 왕조 때 남편이 아내의 휴식을 위해 개조한 별장으로, 정원의 경치가 아름다운 것이 특징이었다. 오늘날 저택은 그때만큼 명성이 드높진 못했으나 여전히 사계절 내내 봄처럼 멋진 절경을 보여주었다.
서 부인은 비록 출중한 용모는 아니었으나 매우 자상했다. 그녀는 최근 연경의 부인들이 즐겨 입는 비단 적삼을 걸친 채 의자에 앉아 꽃을 수놓고 있었다.
“그리 결정하신 겁니까?”
서 노야가 잠시 침묵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거듭 생각해 본 결과, 해볼 만한 것 같소. 만약 좌상부가 예전만 못하다 해도 장래에 충왕부가 도울 테니 장자인 장서전은 분명 나쁘지 않은 사윗감이오. 내 보기에 십삼황자는 옛정을 잊는 사람이 아니야. 과거 장 씨 가문의 아가씨가 그를 도왔으니 친오라비인 장서전에게도 딱히 과거의 일을 따지지는 않을 게요.”
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야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어차피 딸을 출가시킬 거라면 일찍 결정을 내리는 게 좋았다. 현재 장서전의 이름이 연경 전체를 휩쓸고 있었기 때문에 빨리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후에 신부 측 역시 괜한 소문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었다. 이들은 장신성이 건넨 혼담의 당사자가 서출 장서양이 아닌, 적출 장서전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
한편, 장신성이 장서양의 혼사를 위해 종3품 서 씨 가문에 혼담을 넣었다는 사실을 안 조옥언은 밤새도록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녀 역시 같은 며느리를 염두에 두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장신성에게 선수를 빼앗긴 것이다. 하지만 생각 끝에 그녀는 마음을 넓게 쓰기로 했다.
조옥언이 장서양을 돌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조옥언은 신분이나 학식 면에서 그에게 어울리는 규수들을 여럿 소개해 줬지만, 장서양은 이를 모두 거절했다.
‘그래, 서양이 마음에 품은 뜻이 커 신붓감으로 적녀를 고집하고 장신성이 능력껏 혼사를 성사시킨다면 무엇이 문제겠는가.’
조옥언은 서자가 좋은 연분을 맺지 못하게 막을 정도로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이 불쾌한 건 어쩔 수 없었기 때문에 기필코 장서전에게 그보다 나은 혼처를 구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조 노부인의 불호령이 있은 후 그녀는 공개적으로 며느릿감을 알아보는 대신 은밀히 참한 규수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가 오로지 아들의 혼사에만 목을 매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최근 서녀들의 혼처를 물색한 일도 조옥언의 바쁜 일과 중 하나였다. 특히 장서열보다 나이가 많은 서녀들을 혼인시켜야 했기에, 전날까지도 조옥언은 서녀들 중 맏이의 혼사를 알아보느라 분주하던 참이었다. 그 서녀는 예부상서의 방계 혈족 서자를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는 성실했으며 올해 치른 과거시험에서 생원에 합격한 자였다. 조옥언은 혼처에 만족하며 두 사람을 혼인시키기로 결정했다.
둘째 이랑(姨娘) 역시 사윗감을 몹시 마음에 들어 했다. 그녀는 직접 딸을 데리고 조옥언을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사실 장 씨 가문의 이랑들은 기 씨의 세 남매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은 좋은 혼처를 소개받고도 모두 거절하고 있었다. 장서양뿐만 아니라 장서영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장서영과 혼담이 오간 이는 호부상서의 자제 헌원상으로, 비록 외실 소생이지만 가문의 유일한 아들이기에 남편감으로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장서영은 이를 거절했다.
이랑들은 혀를 찼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혼처를 원한단 말인가. 헌원 씨 가문의 그 아이가 언젠가 헌원 부인의 이름 아래 들어가기만 한다면 그는 명실상부한 호부상서의 적자(嫡子, 정실부인이 나은 자식)가 된다. 장서영은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복을 걷어찬 셈이었다.
어쩌면 그녀는 정말로 자신이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났다고 여기는지도 몰랐다. 혼사 문제가 불거지며 장 씨 가문의 이랑들과 서출들은 점차 기 씨 소생들을 곱게 보지 않기 시작했다.
과거 기 씨의 세 남매가 어리고 철이 없었을 때, 장서영은 주모인 조옥언을 존경했지만 조옥언은 자신의 친딸만 애지중지하여 장서영을 슬프게 했다. 이에 이랑들과 서녀들은 장서영을 동정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집안의 모두가 장서영을 이해하지 못했다. 다 큰 계집이 이리도 세상 물정을 모를 수가 있는가. 장서열은 조옥언의 친딸이자 적녀였다. 당연히 금이야 옥이야 귀한 대접을 받아 마땅했다. 이들은 만약 장서영이 장서열과 마찬가지로 세자 같은 거물과의 혼인을 원하는 것이라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금 수업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장서영은 집안의 분위기가 몹시 이상함을 느꼈다. 특히 최근 들어 유난히 뒤통수가 따가웠다.
그녀는 자신이 대체 뭘 잘못했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주모가 소개한 혼처를 거절했을 뿐이다. 게다가 이 역시 그녀의 뜻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서양 오라버니도 괜찮은 혼처라 여겼으며, 일이 잘 되면 그녀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헌원 부인이 쉰이 다 된 나이에 덜컥 회임을 할지 누가 알았겠는가. 만약 그녀가 아들이라도 낳는다면 그야말로 헌원상은 끝장이었다. 게다가 헌원상은 장서영보다 세 살이나 어렸다. 결국 장서양은 주모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장서영은 마땅한 결정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주모가 정말로 괜찮은 혼처를 소개해 줬을 리 없었다. 또한 헌원상은 외실이 낳은 자식이었다. 소문에 의하면 헌원상의 생모와 헌원 부인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런 자와 혼인을 한다면 시어머니가 그녀를 곱게 볼 리 없었다. 게다가 헌원상은 아직까지 족보에도 오르지 못했다. 이는 분명 헌원 대인의 뜻일 터였다.
어차피 자신은 혼인이 급한 나이도 아니었다. 얼마 전 장서영은 몰래 어머니 기 씨를 보러 다녀왔었다. 어머니는 반드시 좋은 배필을 만나야 한다고 당부했다. 헌원 씨 가문과의 혼사는 어차피 안 될 말이었다.
그러나 헌원상이 족보에 오르는 날, 장서영은 고사하고 수많은 아가씨들이 헌원 씨 가문의 계단에 줄을 설 것은 자명했다. 어찌 되었든 그는 대주국의 일품 고관 호부상서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조옥언은 장서영의 결정에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나중에 그들이 장서영의 혼사에 신경을 써주지 않았다며 불필요한 원망만 하지 않으면 되었다. 조옥언은 스스로 장 씨 가문 모두에게 공평한 대우를 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이에 조옥언은 서녀 중 셋째를 헌원상과 맺어주려 했다. 그러나 다음날, 헌원 씨 가문에서는 단번에 말을 바꿔 이를 거절했다. 조옥언은 놀란 채로 며칠을 보내야 했다.
‘어째서 거절했을까? 혹 헌원 씨 가문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것인가?’
하지만 애석하게도 조옥언에게는 적녀가 장서열 한 명뿐이었기에 일의 진상을 알아보기 위해 다른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밀려드는 호기심을 억눌러야 했다.
한편, 장서열은 편하게 헌원가를 찾아갔다. 그녀는 장서영과 헌원상의 혼담을 전해 듣고 매우 놀란 상태였다. 겉보기엔 평범하기 짝이 없었으나 확실히 운이 좋기로는 헌원상을 따라갈 자가 없었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헌원상은 얼마 전 입궁하여 구염락의 눈에 들었다고 했다. 역사는 분명 전생의 궤적과 근접하게 흐르고 있었다.
헌원상은 싸움을 할 줄 몰랐지만 구염락은 그의 앞에 여섯 명의 대장군을 세워놓고 헌원상에게 총사령관을 맡겼다, 그 정도로 그를 살갑게 대했다. 헌원상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구염락의 가장 가까운 신하였다! 그런데 그 혼처를 장서영이 거절한 것이다.
물론 전생에서 장서영이 결국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는 것을 떠올리면 딱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아니었다. 장서열은 전생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역사의 내막을 알고자 헌원가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