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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25)화 (125/449)
  • 제125화

    조 노부인의 팔짱을 낀 장서열이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말했다.

    “할머니, 저는 오라버니 혼사 문제는 매우 간단하다고 생각해요. 옛말에 자고로 아내는 현명한 이를 맞이해야 한다지요? 바깥에 떠도는 소문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요. 제 올케가 될 사람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공경할 줄 알면 그걸로 족하다고 생각해요. 학식과 외모를 떠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품이죠.”

    조 노부인이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듯 손녀를 끌어안았다.

    “서열이 말이 맞다. 할미는 방 씨 가문의 큰딸이 마음에 드는 구나. 서열이가 오라버니를 위해 한번 물어봐 줄 테냐?”

    장서열은 조 노부인이 자신을 어린아이 취급한다는 걸 깨닫고 즉시 발을 동동 굴렀다.

    “할머니, 저는 진지하다고요!”

    조 노부인이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래. 장난이다.”

    장서열은 퍼뜩 깨달았다. 어머니와 할머니는 장 씨 가문과 지위가 비슷한 가문에서 재색까지 겸비한 며느리를 고르려는 것이었다. 설령 며느리가 자신들에게 불효를 저지른다 해도 좋은 조건을 가진 여인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을 듯했다. 거기에 오라버니가 희망하는 미인이라면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장서열은 전생에서의 올케를 떠올렸다. 그녀는 어머니와 할머니의 기준과는 먼 사람이었으며 오라버니의 기준과는 더더욱 멀었다. 전생에서는 장서열이 황실에 들어간 후에 올케가 장 씨 가문으로 시집을 왔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자신이 구염락과 혼인하지 않으니, 어쩌면 올케는 장 씨 가문 사람이 될 운명이 아닌지도 몰랐다.

    조 노부인이 퍼뜩 말했다.

    “차라리 이 일을 풍엽에게 맡기는 것이 어떠하냐?”

    조옥언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매제가 손위 처남의 아내를 골라주는 법이 어디 있습니까. 안 됩니다.”

    “안 될 게 뭐가 있느냐! 지금 너희 장 씨 가문에서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은 세자뿐이다. 충왕부에서 서열이를 아끼는 것을 생각하면 다른 가문에서도 장 씨 가문에 정숙한 며느리를 내어줄지 모르잖느냐.”

    “전 제 아들이 그리 못났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상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아들이 최고의 여인과 맺어질 수 있다고 믿는 법이었다. 조 노부인은 고집을 부리는 딸의 모습에 다시 한번 지팡이를 들어 혼쭐을 내주려다 곁에 있는 손녀를 생각해 결국 손을 내렸다.

    “그래, 어디 네 마음대로 해 보거라. 하지만 내 경고하건대, 내 손자가 장가를 못 가 안달이 난 것처럼 사방팔방 시끄럽게 소문 내지 말거라!”

    조옥언은 말없이 자리에 앉아 울분을 토했다. 이런 상황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장서열은 어머니와 할머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전생의 올케가 매우 어질고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허나 장서열이 올케를 선뜻 추천하지 못한 것은, 과거 올케에 대한 오라버니의 태도가 그리 기껍지만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장서전이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낀 건 나중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건 그저 감격과 미안한 마음일 뿐 사랑과는 거리가 멀었다.

    장서열은 올케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런 희생을 치른 다음에도 남편에게 얻을 수 있는 게 그저 고마움뿐이라면 부부로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녀 역시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져본 적이 있었기에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몹시 힘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장서열은 일단 침묵을 지키기로 했다. 후에 만정에게 협판 대학사(協辦大學士, 청대(淸代)의 관명(官名)) 주 씨 가문의 여식이 정혼을 했는지 물어볼 작정이었다.

    * * *

    예상 외로 만정은 곧바로 대답했다.

    “누구를 물어보는 거예요? 주 씨 가문에는 나이가 엇비슷한 적녀가 셋이 있거든요.”

    마찬가지로 만정이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한 채 장서열이 즉시 답했다.

    “주사섬(周思纖).”

    비록 주 씨 가문의 장녀이었지만 그녀를 아는 이는 드물었다.

    “주사섬이요?”

    만정이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주사섬은 왜요? 설마 서전 오라버니의 아내로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아니죠? 절대 안 돼요. 어머니가 말씀하시길 그녀에게는 지병이 있대요. 나이가 열다섯이나 됐는데도 영 어수룩하고요. 그리고 주 대인께서 이미 그녀에게 맞는 사윗감을 알아보고 있다고 들었어요. 착실한 사람에게 시집보내려고 한대요. 부귀영화는 바라지 않고 딸이 평안한 일생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고요.”

    장서열은 잠시 멍해졌다.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분명 주사섬은 바보가 아니었고 좋은 성품을 지녔으며 부귀영화에 연연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그녀가 성실한 남자와 혼인한다면, 그녀의 부군은 아내의 신분과 고운 품성을 알아보고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 줄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주사섬에게는 장서전과 혼인하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장서열은 올케를 호의호식하게 해줄 수는 있었지만 그녀를 아끼고 사랑해 줄 남자는 줄 수 없었다. 하지만 여인에게는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중요하지 않은가.

    지금껏 고생을 모르고 살아 온 올케는 권세에 대해서도 아무런 생각이 없을 터였다. 그녀는 현재 자신처럼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올케를 다시 불구덩이에 끌어들인단 말인가.

    만정이 의아한 시선으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왜요? 어째서 주사섬에 대해 물어보는 거예요?”

    “아, 그냥 그녀에 대해 들은 게 있어서. 너는 어때? 요즘 어떻게 지냈니?”

    즉시 고개를 숙인 만정이 얼굴을 붉히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버지께서 피서를 마치고 돌아오면 뭐든 결정될 거라셔요.”

    장서열은 그제야 태자가 옹립될 시기가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전생에서 이맘때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구염락이 먼저 그녀의 삶에 뛰어들었는지, 아니면 그녀 스스로 함정에 뛰어들었던 건지조차 희미했다. 어쨌든 전생에서는 모든 일이 뒤죽박죽이 된 채 성급히 구염락과 혼인했었다.

    전생에서의 일은 차마 다시 돌이켜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식사하고 가. 네가 좋아하는 증병(蒸餠, 찐 떡)을 만들라고 할게.”

    장서열의 권유에 고개를 흔든 만정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다하지 못한 예절 수업이 하나 있어서 얼른 돌아가 계속 익혀야 해요.”

    만정은 사방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옥처럼 희고 고운 팔을 내밀며 비밀스럽게 말했다.

    “만져 봐요, 언니.”

    그 모습에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무슨 의도인지 알고 있었지만 만정을 위해 짐짓 모르는 척 만져본 뒤 말했다.

    “정말 부드럽다.”

    만정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말했다.

    “정말요?”

    그녀가 못 믿겠다는 듯 팔의 냄새를 맡다가 다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어머니가 궁에서 마마를 초청해 얻은 비방이에요. 피부를 곱게 만들고 향기가 나도록 해 준다는데, 언니도 한번 써 볼래요?”

    장서열이 고개를 저으며 놀리듯 말했다.

    “너 혼자 써. 혹여나 나중에 아름다워지지 못한 걸 내 탓으로 돌릴까 겁나니까.”

    만정에게 궁에서 얻은 물건의 양이 많을 리 없었다. 아마 그녀 혼자 사용해도 양이 충분치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만정이 저렇게 조심스럽게 말할 리 없었다.

    만정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말도 안 돼요.”

    장서열은 차를 음미하며 미소 지었다. 궁에는 진귀한 물건이 많았기 때문에 영리하게 자기 잇속을 챙긴다면 누구라도 윤기 나는 미인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가만히 만정을 지켜보던 장서열이 돌연 물었다.

    “넌 금용을 어떻게 생각해?”

    만정이 멍하니 고개를 들고 말했다.

    “그게 누구예요?”

    장서열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런 정보조차 없이 딸을 궁에 들여보내려 하다니. 대체 만 대인은 무슨 자신감인지 알 수 없었다.

    “구염락 곁에 있는 궁녀 말이야. 문회에서 구염락에게 벌을 받았던 아이.”

    만정은 권여아에 정신이 팔려 금용까지 거들떠볼 겨를이 없었다. 장서열의 언급에 만정은 희미한 기억 저편에서 예뻐 보였던 여자아이 하나를 떠올렸다. 다른 이들과 똑같은 궁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살짝 기억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만정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부친 역시 가끔씩 시녀를 눈여겨보았지만 결국에는 머슴과 이어줬을 뿐 첩으로도 삼지 않았다. 그 때문에 시녀라면 딱히 견제할 이유가 없었다.

    “일개 궁녀일 뿐이잖아요.”

    “궁녀니까 전하와 더 깊은 정을 나눌 수 있는 거야. 밤낮으로 함께 있으니 오히려 후에 선발될 수녀들보다 유리하지.”

    만정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그래 봐야 시녀니까 승은을 입는다 해도 기껏해야 미인(美人, 비빈의 품계 중 하나)으로 봉해지겠죠.”

    “과연 그럴까?”

    장서열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만정이 갑자기 진지한 눈으로 물었다.

    “서열 언니, 언니가 아무 이유 없이 제게 주의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는 거 알아요. 혹시 제게 뭔가 경고를 해 주려는 건가요?”

    “…….”

    “전 입궁한다고 해서 반드시 총애를 얻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아요. 제가 굳이 다른 여인들을 신경 써야 한다고도 생각하지 않고요. 하지만 언니가 이렇게까지 말한 이상 간단히 넘길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러니 제가 알아들을 수 있게 확실히 말해 줘요.”

    장서열이 웃었다. 바보 같이 순진한 줄만 알았던 만정이 그래도 완전히 바보는 아닌 모양이었다.

    “예전에 남소원에서 금용을 본 적 있어. 어렸을 때 구염락의 목숨을 구한 아이야. 어려운 시기에 도와준 정은 잊기 어렵지. 어때, 중요한 일인 것 같니?”

    만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중요한 건 구염락이 금용에게 매우 잘해 준다는 거야. 예전에 금용은 억울하게 내 하인의 미움을 산 적이 있었어. 그때 구염락은 금용을 직접 데려와 내게 사과했지. 그리고 금용에게 줄 선물을 한아름 받아갔어. 넌 보잘것없는 시녀 한 명이 구염락에게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니?”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의 말을 경청한 만정이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그럼 전 입궁한 뒤 금용에게 잘 보여야 하는 거죠?”

    장서열은 하마터면 마시고 있던 차를 뿜을 뻔했다. 그녀로서는 어떻게 그런 결론이 나온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만정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예 이해 못할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전생의 경험으로 볼 때, 만정이 금용을 좋게 본다면 그 자체로 구염락의 눈에 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금용을 적으로 여긴다면 분명 원한을 사게 될 터였다.

    장서열은 만정이 금용과 다투게 될 미래를 차마 생각하고 싶지 않아 이렇게 답했다.

    “그럴 필요는 없어. 금용에게 미움을 사지만 않으면 돼.”

    “언니의 가르침을 명심할게요. 알려 줘서 정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난 만정이 갑자기 장서열에게 공손하게 절을 올렸다. 제법 그럴 듯한 모양새였다. 이를 본 장서열이 만정을 놀리려고 하였으나 만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니, 사실 전 수녀 선발(選秀, 귀족가의 딸 중에서 우수한 이를 뽑아 궁에 들여 비빈 혹은 궁녀로 삼는 제도)에 전혀 자신이 없어요. 만약 언니가 세자와 혼인하지 않고 저와 함께 수녀 선발에 나선다면 저도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아요.”

    장서열이 웃으며 말했다.

    “난 전하보다 두 살이나 많잖아. 전하가 항상 나보다 청춘일까 봐 싫어.”

    만정이 입술을 내밀었다.

    “정말 말도 안 돼요. 언니는 태생부터 미인이라 절대 그럴 일이 없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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