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교방 소녀는 청산지주의 시선에 당황하여 더듬거리며 말했다.
“저… 저는 그게 아니라, 잠… 잠시 여기에 숨어 있었을 뿐입니다. 저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어느새 내려온 구염락이 냉랭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보아하니 그 아이도 고의로 그런 것 같지는 않군.”
구염락의 시선이 소녀의 의복에 머물렀다. 그가 차갑게 말했다.
“이미 옷도 다 갖춰 입었으면서 굳이 인생을 고달프게 만들다니. 딱하구나.”
말을 마친 구염락은 찾는 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즉시 자리를 떠났다. 청산지주가 종종 걸음으로 그 뒤를 쫓았다.
청산지주는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곧 이어질 다섯 번째 문제에는 그가 초청한 내각대학사의 딸이 금을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직전에 갑자기 선녀처럼 아름다운 여인이 춤을 추었으니 내각대학사 입장에서는 체면이 말이 아닐 터였다. 덩달아 청산지주는 내각대학사에게 밉보인 꼴이 되고 말았다.
‘병풍이라도 선물로 보내야겠군.’
소녀는 눈물을 머금고 멀어져 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말 한 마디로 처벌을 면하게 해 준 남자였다. 여태껏 교방에서 갖은 노력 끝에 춤을 익힌 이유도 다 저런 비호를 받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소녀는 곧 울음을 터뜨렸다. 자신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탓할 따름이었다.
문회는 즐겁기 그지없었다. 다만 석양처럼 아련한 미인의 자태는 수많은 이들의 가슴에 여운으로 남았다.
한편, 장서영은 인파 속에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붉은 입술을 살짝 깨문 그녀의 마음은 엉망진창이었다. 그녀는 그간 자신이 힘들게 익혀온 재주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장서영은 장서열의 콧대를 꺾고 싶었다. 높은 신분을 지닌 주모의 딸보다 자신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 주고자 무엇이든 열심히 배워 왔다. 하지만…….
무언가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다. 이제껏 발버둥 치던 자신의 모습이 장서열의 눈에는 얼마나 우습게 보였겠는가.
“오라버니, 집에 돌아갈래요.”
장서양도 무척 한스러웠다. 어렵사리 네 번째 관문까지 도착했다. 그러나 장서열의 등장은 그가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렸다.
서출. 그는 정실부인의 눈에 들지 못한 서출이었다. 허나 그가 오십 명 안에 들어갔다면 여러 문인들은 앞다투어 그를 제자로 데려가려 했을 것이다.
장서양의 눈 속에 복잡한 감정과 원망이 스쳤다. 이내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가 데려다 주마.”
장서목은 말없이 형님과 누이동생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장서열을 데리고 자리를 옮긴 서풍엽은 누구도 찾지 못할 장소로 이동해 문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자리가 무르익었을 무렵, 결국 그는 청산지주의 눈에 띄어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셔야 했다. 부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그는 술 한 잔을 들이켠 후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정혼자와 함께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정중앙에 앉아있던 구염락 역시 도중에 술이 약하다는 이유로 권서함과 권여아를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 * *
시간이 흘러 충왕부와 장 씨 가문의 혼삿날이 다가왔다. 혼례가 예정된 12월은 차가운 바람처럼 뭇 남성들의 마음을 흩뜨려 놓았다.
그날의 아름다운 춤은 세간에 널리 알려졌다. 재색을 겸비한 장 씨 가문의 적녀가 충왕부의 며느리가 된다는 사실은 연경 전체를 들썩이게 했다.
어느 유명한 화가는 청산의 일을 전해 듣고 후대에 길이 남을 그림을 그렸다고도 했다. 값을 매기지 못할 정도로 귀한 그 그림은 소문만 자자할 뿐 누구도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백방으로 노력한 서풍엽조차 손에 넣을 수 없었다.
* * *
거처에 자리한 권서함이 천천히 그림을 펼쳤다. 그림 속 미인은 무천(舞天,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추는 춤)을 추고 있었다. 감상하는 이의 눈에 여인은 마치 날아오를 듯 생동감이 넘쳤고 아름다웠다.
밖에서 하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둥글게 말린 그림은 금세 높은 선반 위에 놓였다.
“도련님, 부인께서 찾으십니다.”
권서함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그가 차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분명 혼사 이야기일 것이다. 지난 번 입궁하고 돌아온 후, 모친은 황후와 무슨 논의가 있었는지 계속해 혼사를 종용하고 있었다. 그는 마치 가문의 큰 숙제가 된 기분이었다.
* * *
우뚝 솟은 붉은 기와와 높은 담장 안, 아무리 절실한 마음도 황자의 마음을 현혹시키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권모술수와 야심이 뒤섞인 황궁에서 미인의 가치는 언제나 빛을 잃었다.
뒷짐을 진 구염락은 제자전 창가에 서서 흩뿌려지는 달빛을 보고 있었다. 은황색 도포는 그를 한층 더 날카로워 보이게 했다. 잠시 후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전각 안을 울렸다.
“일은 어찌 되었느냐?”
향 연기가 휘황찬란한 전각을 감도는 가운데 손묘(孫淼)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 전하. 모두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오직 전하의 명령만이 남아 있습니다.”
구염락은 마치 아무 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한참을 그대로 달만 바라보았다.
“손 공공, 그대와 오랫동안 겨뤄보지 않은 것 같군.”
손묘가 즉시 답했다.
“전하께서 원하신다면 노비가 한 수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과거 손묘는 눈앞에 있는 소년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소년은 그의 손에 들린 검을 쉽게 떨어뜨리고 약점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분위기는 점점 고조됐다. 구염락은 검과 검이 부딪치는 불꽃 안에 깊은 살기를 담아 상대를 공격하고 있었다.
쨍 소리와 함께 손묘는 구염락이 자신의 목을 향해 휘두른 검을 막아냈다. 손묘의 이마는 이미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그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구염락은 마치 누군가 죽어야만 끝난다는 듯이 인정사정없이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운 나쁘게도 하필이면 전하의 상태가 좋지 않을 때 대련을 청한 듯했다.
“저… 전하,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손묘는 계속 저항했다. 일부러 져서라도 그만두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런 상태의 구염락과 대결을 펼치는 건 죽으려고 작정한 것과 다름없었다. 만에 하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가 갑자기 사정없이 칼을 휘두른다면 노비에게는 울면서 죽는 길뿐이었다.
엄청난 검광이 춤을 추며 덮쳐들었다. 손묘는 이를 악물고 대적했다. 순간 입을 열 기회조차 잃은 그가 속으로 생각했다.
‘약은 제때에 먹고 있으니 분명 병이 재발한 것은 아닐 것이다. 딱히 전하의 숨겨진 상처를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어찌하여 전하께서는…….’
챙 소리와 함께 손묘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다. 그의 목 끝에는 구염락의 검이 닿아있었다. 순식간에 손을 거둔 구염락이 평온한 눈으로 말했다.
“마음이 딴 곳에 가 있구나. 물러가라.”
* * *
같은 시각, 권여아는 황후에게 효를 다하고 있었다. 촛불이 흔들리는 가운데 미인추(美人錘, 안마할 때 사용하는 망치 모양의 도구)를 손에 든 그녀가 황후의 다리를 두드려 주었다.
“전하와 오라버니를 따라 청산을 한 바퀴 둘러보고 왔습니다.”
황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역시 자신은 사람을 잘못보지 않았다. 구염락은 권여아에게 매우 잘해 주었다.
황후는 사랑하는 조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속으로 매우 기뻐했다. 이 아름다운 소녀는 본래 구염단신의 황후가 되어야 했지만 아쉽게도 구염단신에게는 그런 복이 없었다.
황후는 조카를 이용해 부귀영화를 얻을 생각은 없었다. 단지 자신이 그녀의 남은 인생을 아무런 희망도 없는 이에게 묶어 두지 않은 것을 감안해, 훗날 권여아가 구염단신이 편안한 여생을 보낼 수 있도록 신경써 주기를 바랄 뿐이었다.
“구염락이 네게 잘해 주든?”
고개를 숙인 권여아는 황후가 무엇을 묻는지 깨닫고 그에 걸맞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동시에 지나치게 기뻐하거나 무관심한 기색 없이, 주어진 삶에 순응하는 얼굴로 그녀가 답했다.
“잘해 줍니다.”
황후에게는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권여아와 같은 미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건 구염락의 신분을 고려할 때 전생에 수많은 공덕을 쌓아야만 가능한 복이었다.
황후가 사랑스러운 조카의 손을 토닥였다.
“힘들지? 마마에게 하라고 하고 넌 돌아가 쉬거라.”
“힘들지 않아요. 황후마마의 시중을 드는 건 제 영광인걸요.”
황후는 예의 바르고 상냥한 조카를 바라보며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불쌍한 것…….’
모두 자신의 탓이었다. 만일 조카딸이 좋은 혼처를 구하지 못한다면 그녀가 어찌 오라버니에게 떳떳할 수 있겠는가.
* * *
어두컴컴한 신형사(愼刑司)는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보름 뒤, 곤장 스무 대를 맞은 금용은 이미 의식을 잃은 채였다. 새하얗게 질린 고운 얼굴은 피로 뒤덮여 있었다. 하인을 시켜 그녀를 옮기도록 지시한 소리자가 초조하게 그 뒤를 따랐다.
남녀가 유별한 관계로 소리자가 금용을 직접 돌볼 수는 없었다. 그는 하인방의 송 마마에게 금용을 부탁하며 말했다.
“맡지 못하겠다 하시면 영패를 들고 의원을 찾아가겠습니다.”
예순이 훌쩍 넘은 송 마마는 붉은 색 정품(正品) 복색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제자전의 명실상부한 대 고고(大姑姑)였기에 십삼황자조차 그녀를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도움을 필요한 이에게 확실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구염락이 제자전에 들어왔을 때부터 그를 각별하게 보살펴 왔다.
“어서 가서 당직을 서시게. 내게 금용을 맡기는 게 그리도 안심이 안 되는가?”
“아닙니다. 안심이 됩니다.”
소리자가 침대에 누워있는 금용을 안쓰럽게 바라본 뒤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는 기색으로 자리를 떠났다.
송 마마는 소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는 참으로 괜찮은 자였다. 만일 금용이 소리자와 서로 의지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큰 축복이리라. 안타깝게도 금용은 자신의 미색을 믿고 야심에 가득 차 있었기에 소리자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단출한 하인방에 등황색 촛불이 깜빡이며 흔들렸다. 아무리 1등 대궁녀(一等大宮女, 궁녀의 품계)라 해도 주인의 허락이 없이는 붉은 초를 사용할 수 없었다.
나무 침상에 누운 금용은 이미 깨어나 있었다. 뼈를 스미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버티며 이 정도 상처쯤은 별 거 아니라고, 전에는 더한 설움도 겪었으니 이까짓 게 대수냐고 스스로를 타일렀다.
허나 애써 이해하는 머리와 달리 찢어지게 아픈 가슴은 어쩔 수 없었다. 전하는 자신을 때렸다. 전하에게 벌을 받은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고, 모두 같은 이유에서였다.
금용은 울었다. 몸의 통증보다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전하께서 세 사람이 함께 동고동락하던 정을 잊고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이었다.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오던 송 마마는 금용이 몹시 서럽게 우는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곁에 있던 시녀에게 연고를 건네받은 뒤 시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방 안에는 오직 두 사람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