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고개를 숙인 권서함은 탁자를 닦고 있었으나 계속해 장서열과 서풍엽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자신을 어쩔 수가 없었다. 서풍엽이 어디를 가나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저런 여인과 떨어져 있으면 자꾸만 눈에 밟힐 것이다.
권여아가 자리를 옮겨와 걱정스레 오라버니 곁에 앉았다.
“데지 않았어요?”
“괜찮아. 하찮은 상처야.”
장서열이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약을 바르는 게 좋겠어요. 뜨거운 차를 손 위에 쏟았는데 괜찮다니요.”
그가 쏟은 건 시녀가 따른 지 얼마 되지 않은 차였다. 장서열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몹시 아플 텐데 아프지가 않다니? 남자들은 그래야만 영웅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권서함은 그 방면으로 일가견이 있었다. 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나약한 소리를 해본 일이 없었다. 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시 나가서 정리 좀 하고 오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못한 채 권서함이 허둥지둥 자리를 떠났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떠오른 상상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중이었다.
‘대체 언제부터였지? 어째서 전혀 자각하지 못했을까…….’
갑자기 불안해진 장서열이 얼른 구염락을 향해 말했다.
“그 시는 제가 지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저를 죽이시면 안 돼요.”
잠시 황당한 표정을 하던 구염락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권여아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그를 따라 웃었다.
서풍엽이 장서열의 코를 문지르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전하께선 절대 너를 안 죽여. 그 정도의 믿음도 없다니, 네게 잘해 주는 전하께 미안한 줄 알아.”
“그래요?”
장서열이 고개를 들고 서풍엽을 바라봤다.
“그렇다니까.”
서풍엽이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서풍엽을 힐끗 바라본 구염락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가 낮은 목소리로 권여아에게 배가 고프지는 않은지 물었다. 그가 관심을 쏟고 싶어 하는 이는 정작 그의 관심이 전혀 필요하지 않은 듯했다.
그때, 헌원가과 당자가 시녀에게 지시했다.
“배고프다. 땅콩 한 접시 좀 갖다 줘.”
“난 고기 만두.”
느릿느릿 다가온 시녀 한 명이 장서열의 곁에서 걸음을 멈춘 후 입을 열었다.
“아가씨, 루 부인이 아가씨가 여기 계신 걸 알고 찾아왔습니다.”
향안(香案, 향로를 놓아두는 탁자)에 향촉이 밝게 켜졌다. 시녀의 말과 동시에 세 번째 문제가 공개되었다. 장서열은 잠시 멈칫했다.
‘그런데 왜 들어오지 않는 거지?’
“알았어.”
장서열은 농교를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루 부인은 공들여 만든 성장(盛裝)을 차려 입고 있었다. 높게 틀어 올린 머리와 정교한 화장은 그녀를 평소보다 더욱 생기 있어 보이게 했다.
“스승님.”
장서열의 부름에 루 부인이 가볍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가씨, 여기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청산지주가 아가씨가 와 계시다고 말했지만 저는 사람을 잘못 본 거라고 생각했지요.”
“스승님께서는 무슨 일로 저를 찾아오셨나요?”
루 부인은 에두르지 않고 싱긋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께서는 역시 총명하시군요.”
이어 그녀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설명하자 장서열이 작게 웃어 보였다. 루 부인은 누군가에게 본때를 보여주려는 것이었다.
루 부인은 오늘 네 번째 문제를 위해 초청되었다. 무희로 초청된 교방(敎坊, 관에서 설치하여 음악, 무용, 배우, 잡희 등을 관장하던 곳)의 소녀에게 금 반주를 해 주는 역할이었다.
그러나, 하필 오늘 초청된 교방 소녀의 스승은 루 부인과 원수지간이었다. 이를 알게 된 교방 소녀는 루 부인이 반주를 하면 무대에 오르지 않겠다며 생떼를 부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명성 높은 기녀라 해도 감히 문회에서 춤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단지 루 부인의 콧대를 꺾으려는 것이었다.
루 부인 역시 추호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루 부인은 과거 교방 소녀의 스승에게 된통 당한 뒤 교방을 뛰쳐나와 장 씨 가문에 들어온 것이었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은 루 부인이 원수의 제자와 타협할 리 만무했다.
루 부인이 웃음을 머금고 평소 어렵기 그지없는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때요, 아가씨? 이 스승이 큰소리를 칠 수 있도록 도와주시겠어요?”
문회에서 춤을 선보이는 건 명성과 이익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교방 소녀는 당연히 이 기회를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청산에서 다섯 번째 문제를 위한 연주자로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의 딸을 초청한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문회의 무대에 오르는 건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루 부인은 교방 소녀의 뜻대로 연주를 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제자가 어찌 스승님을 돕지 않을 수 있겠어요.”
장서열이 루 부인의 손을 잡았다.
“대신 나중에 제가 스승님의 연주를 망쳤다고 탓하시면 안 됩니다.”
“망치는 건 제 연주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계획일 겁니다.”
루 부인이 싱긋 웃었다. 그녀는 곧 자만심 가득한 교방 후배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을 예정이었다.
“스승님은 정말 무서운 분이군요.”
“제자님도 만만치 않지요.”
사실 장서열의 목적은 다른 데 있었다. 장서양 그 건방진 이름이 거듭해서 백 명 안에 들고 있었다. 장 씨에 ‘서(栖)’자 돌림은 너무 눈에 띄었다. 만일 지금 타격을 가하지 않는다면 세간에는 장 씨 가문의 후손으로 장서양의 이름이 가장 먼저 거론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리는 그녀의 오라버니인 장서전의 것이었다.
세 번째 시험이 막을 내리자 새로운 성적이 잇따라 도착했다.
눈에 띄지 않는 뒷방 안, 다소 거만한 얼굴을 한 소녀가 수많은 의복 속에 숨어 있었다. 그녀는 루 부인이 어서 초조한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 주기만을 기다렸다.
그녀는 이미 무대 의상을 갖춰 입고 머리도 꾸민 상태였다. 이번 일은 제1교방에서 벌어진 내부 다툼이나 다름없었지만 소녀는 이번 일이 자신의 앞길까지 망치는 건 바라지 않았다.
제1교방은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이곳의 기녀들은 제왕의 후궁부터 왕부(王府)의 첩까지 다양한 경로로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들은 좋은 평판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앞날을 두고 장난을 치는 건 불가능했다. 소녀는 그저 노쇠한 루 부인의 기세를 눌러줄 심산이었다.
“서열이는 왜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거지?”
돌아온 농교를 발견한 서풍엽은 그녀의 친구들이 여전히 자리에 앉아있는 걸 깨닫고 안심했다.
“금 이야기라면 끝이 없을 것 같군. 여인들은 한번 모이면 별다른 용건이 없어도 한나절은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까.”
권여아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 여자들이 모두 수다쟁이라는 말씀이신가요?”
서풍엽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말, 서열이가 절대 듣지 못하게 하세요. 안 그러면 전 호되게 혼날 겁니다.”
서풍엽의 농에 권여아가 조용히 구염락을 바라보며 웃었다. 구염락은 못 본 체했다. 만정이 불쾌하다는 듯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세자, 서열 언니의 가르침은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물론 그렇지요.”
서풍엽은 장서열의 친구들에게 밉보일 수 없었다. 특히 그녀와 아주 가까운 만정이라면 더더욱 그랬다.
갑자기 북과 징이 울리기 시작했다. 호화로운 무대 위로 오색 비단 끈이 가득 휘날렸다.
흩날리는 비단 사이로 빼어난 미모의 여인이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졌다. 보일 듯 말 듯 아스라한 모습은 달빛을 가리는 구름 같기도,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순식간에 모든 이들이 시선을 빼앗겼다.
시간의 흐름을 잊을 정도로 아리따운 몸짓이었다. 옷깃이 휘날리고 비단 끈이 흩어졌다. 가느다란 팔과 다리는 가을에 활짝 핀 국화인 양 부드럽고 아름다웠으며, 하늘하늘한 춤사위는 절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사람의 마음을 온통 뒤흔들어 놓을 만큼 어여쁘고 설레는 동작이었다.
눈을 크게 뜬 당자가 떨리는 손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서… 서열…….”
헌원가가 크게 소리쳤다.
“서열 언니가 춤을 추고 있어요!”
서풍엽과 구염락이 즉시 창가로 뛰어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권서함도 갑작스런 풍경에 의아한 얼굴이 되어 같은 곳으로 향했다.
높게 솟은 무대 위,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가 아름답게 움직였다.
권서함은 완전히 넋을 잃었다. 무대 위에 선 장서열은 만발한 꽃 그 자체였다. 세상의 그 어떤 아름다움도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춤에 비할 수 없었다.
마치 하늘로 날아오를 듯 바람과 함께 뛰어오르는 그녀의 모습에 권서함은 자신도 모르게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철통같은 마음이 속박에서 벗어나 그녀를 향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서풍엽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창가의 휘장을 찢어버린 그가 순식간에 아래로 내려갔다. 무대 위에서 춤을 추던 여인은 별안간 서풍엽에게 안겨 화려한 무대 위에서 사라졌다.
구염락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서열 누님. 우리가 권력 아래 타의로 움직여야 하는 장기 말이 아니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장서열과 그는 같은 하늘 아래에 있었다.
다시 긴 두루마리 종이가 내려왔다. 네 번째 문제 ‘경무(驚舞, 놀라운 춤)’도 막을 내렸다. 대청 안은 여느 때처럼 글을 적어 내려가는 소리가 아닌, 정적만이 감돌았다.
서풍엽이 멈춰 섰음에도 불구하고 장서열은 여전히 그의 가슴에 기댄 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 딱 한 번뿐이에요. 딱 한 번 스승님을 도와드린 거라고요.”
그녀에게 퍼부을 말을 한 가득 준비하고 있던 서풍엽은 그녀의 어리광에 모든 마음이 녹았다. 결국 딱 한 마디밖에 할 수가 없었다.
“정말이지 잠시만 눈을 떼도 말썽을 일으키니 안심할 수가 없구나.”
“오라버니…….”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껴안은 서풍엽이 순진무구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렇게 연약한 팔목이 사람의 혼을 빼놓는 춤을 춘다는 게 몇 번을 봐도 믿기지가 않았다.
“서열아.”
서풍엽은 가볍고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멀지 않은 곳에는 무용복을 차려 입은 교방 소녀가 서 있었다. 그녀는 멍한 표정으로 막을 내린 무대와 장서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이건 내 무대였는데…….’
금을 안고 내려오던 루 부인이 소녀 옆을 지나치며 소리 없이 웃어 보였다.
“가서 네 스승에게 전하거라. 과거 그녀가 내 적수가 아니었던 것처럼 지금 그 제자도 마찬가지라고. 나중에 좀 더 크면 그때 다시 덤비거라.”
말을 마친 루 부인은 의기양양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교방 소녀는 제자리에 선 채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일생일대의 기회가 모두 날아가 버렸다.
청산지주가 달려왔다. 그는 감히 루 부인을 질책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희로 데려온 소녀는 달랐다. 아무리 제1교방이 루 부인과 척을 졌어도, 돈을 받고 춤을 추러 온 이상 본분을 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