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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21)화 (121/449)

제121화

장서열은 만정의 시선이 닿는 곳을 함께 바라보았다. 저런 것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앞으로 궁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만정이 안쓰러웠던 장서열은 그녀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다른 화제를 꺼냈다.

“꽃물을 사용해 봐. 넌 아직 어리니까 연지로 너무 화려하게 꾸밀 필요 없어. 매일 아침 단장할 때 마마들에게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가려달라고 해. 예를 들어 눈가가 어둡다든지, 입술색이 너무 붉다든지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을 테니까”

그 말에 만정이 드디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입술색을 왜 가려요?”

그녀에게 입술은 더욱 붉어 보이도록 연지를 발라야 하는 곳이었다.

“입술이 덜 붉으면 연약해 보여서 보호 본능을 일으키거든.”

그렇게 말한 장서열은 해바라기씨를 까서 입 안에 넣었다. 그녀의 앞에 별안간 누군가 다 깐 해바라기씨 한 접시를 불쑥 밀어주었다.

얼굴이 살짝 물든 만정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손수건을 비비 꼬았다.

“언니는 그런 것도 알아요……?”

장서열은 웃으며 엉망으로 까놓은 해바라기씨를 말없이 앞으로 끌어당겼다. 서풍엽은 모른 척 함박웃음을 지으며 권서함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권서함은 서풍엽의 행동에 너털너털 웃었다. 뭇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드는 세자에게도 제법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첫 번째 시험이 끝났다. 영리한 하인은 상위 백 명의 명단을 세 부나 베껴 써서 가지고 돌아왔다.

얼른 고개를 내민 권여아가 구염락과 함께 한 부를 보다가 놀라서 말했다.

“1등은 역시 그 사람이네요. 온 줄 몰랐어요.”

구염락은 평소와 다름없이 평온했다. 다만 명단을 그녀 쪽으로 살짝 밀어서 권여아가 지나치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놀랄 것도 없지요. 대사마가 실각했으니 좋은 기회일 겁니다. 남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 장원을 하는 편이 벼슬길엔 더욱 순조로울 테니까요.”

“그래요? 2등은 예전에 오라버니께 들었던 사람 같아요.”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3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권서함과 서풍엽은 3등이 쓴 글귀를 논평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수만 명의 문인 중 그가 특별히 빼어난 시를 지어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서열이 슬쩍 명단을 훑어보았다. 상위 등수에는 예상대로 익숙한 이름이 없었지만 뒤에 추가된 백 명 중 가장 구석에서 그녀의 서출 오라버니인 장서양을 찾을 수 있었다.

장서열은 그의 이름을 잠시 응시하다가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다. 수만 명 중 백 명 안에 들었다는 건 장서양의 문장이 뛰어났다는 걸 뜻했다. 그렇다면 그를 제자로 두려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만정은 분한 시선으로 권여아를 쳐다보다 문득 권여아의 신분을 떠올렸다. 자신이 무슨 자격으로 화를 낸단 말인가. 권여아는 사실상 황후로 내정된 인물이었다. 만약 정말로 자신이 궁에 들어가게 된다면 권여아와는 감히 다투지 못할 것이다.

“언니, 우리도 창가에 가서 구경해요. 이런 성대한 모임을 못 보면 아깝잖아요.”

말을 마친 만정이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더 이상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좋아.”

두 사람은 휘장 안쪽에 기대 헌원가와 당자와 함께 사람들을 구경했다. 헌원가는 장서열과 만정이 다가오자 손가락으로 중앙 맨 앞줄에 있는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봐요. 저 사람이 조금 전 1등한 사람이에요.”

“어디요, 어디?”

만정이 얼른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전혀 안 보이는데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보이는 게 이상하지. 다음 시험의 1등은 금 천 냥을 상금으로 준대. 두 번째 문제가 나왔어! 어라? 그런데 웬 병풍이지?”

중앙으로 화려한 비취옥 병풍이 등장했다. 정교한 여덟 폭의 병풍은 금과철마도(金戈鐵馬圖, 위풍당당한 군대의 모습을 그린 그림)와 동일한 화풍을 선보이며 사람들 앞에 펼쳐졌다. 비취와 백은을 상감해 넣은 병풍에서 화려한 빛이 쏟아져 나왔다.

당자가 즉시 정색하며 놀라서 말했다.

“사내들 게 아니잖아?”

열 폭 길이의 두루마리가 공중에 펼쳐졌다. 두루마리에는 쓰인 건 ‘무제(無題)’였다.

“무슨 문제가 저래?”

무대 아래 사람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장서열은 찻잔을 들고 흥미 없는 눈길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권여아와 구염락이 창가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아래를 내려다 본 권여아가 놀라운 듯 말했다.

“정말로 북제 공주(北齊公主)의 병풍일까요? 저렇게 귀한 보물이 나타나다니!”

하인이 건네 준 병풍의 화첩을 손에 든 권서함 역시 창가로 다가왔다.

“예상이 틀리지 않다면 분명 무쌍 공주(無双公主)가 사용했던 물건이겠구나.”

“무쌍 공주라고요?”

헌원가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렇다면 말이 되네요. 북제 황실의 무쌍 공주는 미모와 학식을 두루 겸비했지만 먼 곳으로 시집가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고 들었어요.”

당자가 정곡을 찔렀다.

“망국(亡國)의 공주로군. 복수를 하려다가 도리어 먼저 죽었지.”

헌원가가 즉시 그에게 눈을 부라렸다.

“네가 뭘 알아? 그녀는 시대를 잘못 타고났을 뿐이야.”

권여아도 깊이 우수에 젖어 말했다.

“미인이 난세를 만났으니 험난한 일생을 살 수밖에요. 그녀의 병풍은 부친인 북제 황제가 무쌍 공주를 위해 수만 냥의 금을 들여 특별히 제작한 거예요. 그 정교함을 따를 물건이 세상에 없다고 들었어요. 아직 저걸 모방할 수 있는 장인이 없다고 들었는데 살아생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턱을 괸 헌원가 역시 비애에 잠겨 말했다.

“저 병풍도 이곳에선 하나의 장식품에 불과하군요.”

“너희는 뭘 그리 슬퍼하는 거야?”

권여아가 나지막이 읊었다.

“한없는 슬픔, 막막한 재난.

노래 소리 그치니 밝은 달 기우네.

화려한 무덤 속 벽혈(碧血, 푸른빛을 띤 선혈)은 언젠가 푸른빛 바래어 사라지겠지만,

아름다운 여인의 넋은 떠나지 않고 나비가 되었네.”1)

잠시 정적이 흐르며 슬픈 공기가 감돌았다.

장서열이 해바라기씨 한 알을 깨물자 아작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사람들은 슬픔에서 빠져나와 정신을 차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미인은 기구한 운명을 살았다. 무쌍 공주의 아름다움은 족쇄였다.

권서함이 화첩을 거두며 말했다.

“시가 참 훌륭하구나. 만일 시험에 응시했다면 분명 백 명 안에 들었을 거다.”

하지만 장서열은 마뜩찮은 기분이 들었다. 무쌍 공주는 전생의 그녀처럼 모든 걸 잃은 사람이었다. 그런 이를 두고 떠올릴 수 있는 게 고작 여인의 한과 처량함뿐이라니. 이 얼마나 하찮은 슬픔이란 말인가.

그녀는 구염락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병풍은 무쌍 공주의 조국을 멸망시킨 그녀의 남편이 손수 가져 온 전리품이었다. 도처에서 전쟁의 불길이 일던 때였다. 학식과 미모를 두루 겸비한 여인이 조국의 멸망 앞에 먼저 여인으로서의 감정을 내세웠을 리 없었다.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흥망성쇠는 짧디짧고, 인생은 부평초처럼 정처 없는 것.

영화는 실로 지키기 어려우며, 연못가의 누대도 결국은 사라진다네.

오늘날 부귀는 어디에 존재하는가.

그저 하릴없이 그림만 그릴 뿐이로다.

한 잔 술도 영원히 즐거울 수 없고, 금 노래 소리도 영원히 울릴 수 없네.

나는 본래 황실의 자녀였으나 적국의 포로로 보내졌다네.

하루아침에 조국이 무너지니, 가슴 속에 시름만 가득하네.

허나 예로부터 모두 같은 운명이었으니 나만이 홀로 겪는 일은 아니로다.

오직 명군곡(明君曲, 왕소군이 흉노에 시집갈 때 만든 비파곡)만이 멀리 시집온 슬픔을 위로해주는구나.”2)

진정으로 그녀에게 어울리는 건 망국의 한이었다.

구염락과 서풍엽, 그리고 권서함은 순간 기이한 것을 목격한 듯 그윽한 눈빛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곧 시선을 돌린 권서함이 손에 든 화첩을 보며 깊은 생각에 빠져들었다.

내내 잠자코 있던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제가 만일 무쌍 공주의 남편이었다면 그 시를 읊은 누님을 죽였을 겁니다.”

나라를 잃은 슬픔, 원망을 노래하는 여인과 한 침대에서 편히 잘 수 없다는 뜻이었다. 서풍엽이 순간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구염락을 쏘아보았다.

장서열은 듣지 못한 척 계속해 해바라기씨를 깨물었다.

‘그렇다면 넌 네 자신을 죽여야겠군. 난 그저 네가 쓴 시를 읊었을 뿐이니까. 역시 넌 자나 깨나 황위 생각뿐이야.”

만정이 즉시 말했다.

“서열 언니, 정말 멋져요. 대체 여인은 호방한 기백을 가질 수 없다고 누가 말했는지 모르겠어요.”

권서함도 입을 열었다.

“서열 아가씨의 시도 일리가 있군요. 당시 저 병풍을 마주한 무쌍 공주는 원한에 사무쳤을 거예요. 그녀의 일생은 애달픔으로 가득했지만 그건 결코 남녀 간의 사랑 때문은 아니었죠.”

권여아가 아랫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권서함은 권여아를 위로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장서열의 시를 차분히 되짚고 있었다. 끊이지 않는 전쟁의 시기, 무쌍 공주는 남편이 자신의 조국을 공격하는 걸 무력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름답던 유년 시절과 아버지의 사랑이 깃든 병풍이 조국의 패망을 안고 자신의 앞에 놓였을 때, 그녀는 이를 받아들일 수도, 태연히 바라볼 수도 없었을 것이다.

미인의 운명은 기구하다 했던가. 무쌍 공주는 민족의 대의와 멸망한 조국을 위해 봉황처럼 스스로를 불태웠다. 그리고 끝끝내 자신을 용납하지 못한 남편의 계략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이 일은 후에 안타까운 역사로 기록되었다.

이어 두 번째 문제를 통과한 상위 답안이 올라왔다. 역시나 무쌍 공주의 사랑과 그 슬픔에 관한 글이었다. 권서함은 흥미가 싹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스스로를 불태우면서 굳건하게 심지를 지킨 무쌍 공주의 의지로 가득했다.

그는 일순간 피바람이 몰아치는 전장에서 붉은 연꽃 같이 노기를 띤 채 서 있는 아름다운 장서열의 모습을 상상했다. 그곳에서 그는 필사적으로 적진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그녀가 울고 웃는 모든 순간, 그 눈 속에 오직 자신만이 존재하기를 바라면서.

터무니없는 상상에 깜짝 놀란 권서함이 순간 손에 받치고 있던 백자 찻잔을 떨어뜨렸다. 들고 있던 답안이 흠뻑 젖었다.

“오라버니, 괜찮아요?”

장서열의 시선이 권서함을 향했다. 그는 갑자기 장서열이 있는 방향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괜찮다.”

그 대답에 시선을 거둔 장서열이 다시 아래쪽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서풍엽이 창문의 휘장을 내리며 질책하듯 말했다.

“밖으로 고개 내밀지 마.”

“싫어요.”

“자꾸 그러면 못 보게 할 거야.”

장서열이 불쾌한 듯 콧소리를 냈다.

역주: 김용의 소설 《서검은구록(書劍恩仇彔)》에서 진가락(陣家洛)이 자살한 향향 공주의 묘 앞에서 읊은 시. 향향 공주가 죽은 후 시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선혈만 가득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녀가 나비가 되어 날아갔다고 믿었다.

중국 남북조시대 대의공주의 《서병풍시(書屛風詩)》. 대의 공주는 화친을 위해 돌궐로 시집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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