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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20)화 (120/449)
  • 제120화

    구염락은 깨달았다. 서열 누님은 거짓으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서풍엽과 혼인을 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뿐이었다. 자신이 서풍엽보다 고귀하지 못하고 출신이 비천하며 모든 면에서 서풍엽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부족했을 것이다. 어째서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사랑받지 못했을까. 어째서 좋은 성품을 타고나지 못하고, 남에게 괴롭힘을 당해야 했을까.

    그가 주먹을 꽉 쥐었다. 피가 배어 나왔지만 결코 주먹을 펼 생각이 없었다. 구염락은 어두운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광경을 피와 뼈에 새기듯이.

    서열 누님… 나를 봐요. 내가 여기 있잖아요. 이젠 내가 싫어졌군요. 어째서 나를 원하지 않는 거죠?

    아니, 아니야. 누님에게 화를 내서는 안 돼. 어떻게 누님에게 화를 낼 수가 있지? 누님이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서열 누님은 고의로 그런 게 아니다. 분명 고의가 아닐 거야……. 누군가 누님을 현혹시키고 내게서 누님을 빼앗아가려는 거야.

    구염락의 눈에 사나운 기색이 어리다 금세 사라졌다. 자신은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천하를 손에 넣으면 그녀 또한 얻을 수 있다. 어차피 세상에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멀리서 서로를 껴안은 두 사람을 바라보던 그의 마음속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파동이 사라졌다. 그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구염락은 사대천의 광활한 하늘 아래 감정을 깊이 묻고, 야심을 꺼내 들었다.

    장서열을 꼭 끌어안고 있던 서풍엽이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혼자 나온 거야? 오늘 문회 때문에 얼마나 많은 관병(官兵)들이 나왔는지 알아?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홀로 이탈하다니, 하여튼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꼭 말썽을 피우는구나.”

    장서열이 겸연쩍게 말했다.

    “혼자 나온 게 아니에요.”

    그녀는 구염락과 함께였다.

    “만정과 헌원가도 함께 왔어요. 뱃놀이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권 공자와 열셋째 전하를 만나 함께 온 거예요. 권 공자야 어차피 문회에 따로 별실을 두고 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 생길 일은 없어요.”

    “사고는 순식간에 벌어지는 거야. 저들은 네가 별실에 있든 신분이 높은 사람이든 상관 안 해. 앞으로 이런 위험한 곳에 오는 건 절대 안 돼. 정 오고 싶다면 내게 먼저 알려.”

    고개를 든 장서열이 예쁜 눈을 깜빡였다.

    “그럼 세자께서는 왜 이런 곳에 오셨어요?”

    “나… 는 차를 마시러. 여기가 차 맛이 좋거든.”

    서풍엽의 팔에 기댄 장서열이 그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차를 마시러 왔다고요? 그럼 내가 여기서 사흘 밤낮으로 함께 마셔 줄까요?”

    서풍엽이 즉시 항복했다.

    “잘못했어. 오지 말았어야 했는데 일이 있어서 온 거야. 그런데 넌 여기가 어떤 곳인지 알면서도 들어온 거야? 설마 나를 보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따라온 건가?”

    서풍엽은 기분이 좋아졌다.

    “맞아요. 나중에 누가 내게 은자를 내고 사람을 찾아가라고 할까 염려돼서요.”

    서풍엽은 감히 말을 잇지 못하고 얼른 화제를 돌렸다.

    “내가 데려다 줄게.”

    장서열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구염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전하와 함께 왔어요.”

    서풍엽은 그제야 구염락의 존재를 인식했다.

    “열셋째 전하?”

    구염락은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미간에 산만한 기색이 엿보였다.

    “누님은 좀 어떤가요?”

    “전하, 이제 괜찮습니다.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전하께서는…….”

    “서함과 함께 왔다가 우연히 서열 누님과 마주쳤습니다. 이왕 만났으니 세자도 함께 가시지요.”

    서풍엽은 사랑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의 뒤에 선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서풍엽은 그녀를 데리고 상부에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오랜만에 외출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명 받들겠습니다.”

    서풍엽은 보물을 쥐듯 장서열의 손을 잡았다.

    구염락은 담담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정면을 바라보았다. 마치 그 외에는 그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한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대전(大殿)을 지나치려 할 때, 시위의 시선이 계속해 서풍엽을 향했다. 서풍엽이 그를 못 본 체하자 장서열이 그의 옷소매를 끌어당기며 말했다.

    “가 봐요.”

    서풍엽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

    “세자, 다 처리했습니다.”

    “알았다. 먼저 돌아가거라.”

    서풍엽이 웃으며 돌아왔다.

    “별 일 아니야. 찻값으로 지불한 은자를 보고해야 하거든. 혼인 후에는 내 용돈을 두둑이 챙겨 줘야 해.”

    “좋아요. 동전을 한 수레 안겨 줄게요.”

    “벌써부터 나를 놀리는구나.”

    구염락은 곁에 아무도 없는 듯 차분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하지만 어떤 말은 기어코 귓가에 맴돌아 무시하기 어려웠다.

    청산 오대천은 유명한 찻집이었으나 오늘은 사람이 별로 없었다. 종소리가 울리자 그나마 있던 사람들마저 빠르게 빠져나갔다. 세 사람은 아무도 없는 오대천에 서서 한껏 풍경을 감상했다.

    “이미 입장이 시작됐을 거야. 앞문으로는 못 들어갈 테니 우린 뒷문으로 가자.”

    “뒷문도 있어요?”

    “세상에 없는 게 어디 있어.”

    어차피 황자와 세자의 신분으로 청산에서 하지 못할 것은 없었다. 사실 청산과 같은 곳은 많지 않았다. 청산은 수년간 명문세가에 기대는 일 없이 독자적으로 운영해 왔다. 오히려 그들을 대우해 주지 않아 적지 않은 권력자들의 미움을 샀다.

    하지만 관리자인 청산지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잘 보여야 하는 이가 누구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선 구염락과 서풍엽 같은 인물과는 필사적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과거 헌원가의 낙마 사건 당시 그가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장 씨 가문인 것만 보아도 그러했다. 그는 눈치가 빠르고 소식에 능통한 자였다.

    육대천 ‘무문농묵(舞文弄墨, 글재주를 부리다)’은 이미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입구에는 끝도 없는 길이의 하얀 비단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로는 첫 번째 글자 ‘춘()’이 두껍게 쓰여 있었다.

    육대천에 입장하려는 자는 반드시 봄과 관련한 노래나 시, 경구, 성어를 답해야 했다. 대신 타인과 겹치는 답변은 허용되지 않았다.

    서풍엽은 장서열을 데리고 뒷문으로 들어갔다. 길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으나 마주친 이들은 대부분 안면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잠시 뒤 그들 모두가 구염락과 서풍엽 주변에 몰려들었다.

    장서열은 기회를 틈타 빠져나가려 했지만 서풍엽이 그녀를 단단히 붙잡았다. 곧 사람들을 떠나보낸 서풍엽이 그녀를 옆으로 끌어당겼다.

    “바짝 붙어있어. 안 그러면 바로 집으로 데리고 갈 테니까. 열셋째는?”

    “내각 사람이 데려 갔어요.”

    서풍엽은 사라진 이들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제법 고역을 치르겠군.”

    장서열은 서풍엽을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육대천으로 향하는 마지막 계단에 오르자 눈앞에 웅장한 건물 한 채가 우뚝 서있었다. 사자와 기린을 정교하게 조각한 건물은 그대로 구대천까지 닿을 듯 높이 솟아 있었다.

    서풍엽은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장서열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 와 봤구나. 청산지주는 꽤 수완이 좋아. 아니었다면 청산에서 열리는 문회도 이렇게 성공하지 못했을 거야. 심지어 내각과 한림원도 매월 이곳에서 모임을 열어.”

    서풍엽이 친절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청산지주는 많은 돈과 공을 들여 고집 센 유명 문인들을 매료시켰어. 몰랐겠지만 그에게는 문하생도 있어. 그들 중에서는 장원급제 후 요직에 있는 인물도 있지. 네가 지나온 길이 유난히 인적이 드물고 네가 어딜 가든 아무도 토를 달지 못한 것도 다 그 때문이야.”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계단을 다 올랐을 때, 미리 마중을 나와 있던 누군가가 그들을 정중하게 안으로 모셨다.

    “손 공자께서는 묵각(墨閣) 3층에 계십니다. 이쪽으로 드시지요, 세자. 서열 아가씨.”

    청산지주 관몽득(管夢得)은 장 씨 가문의 아가씨가 왔다는 보고에 인사를 하기로 마음먹고 친구들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난 몇 년간 그는 청산 경영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문회는 그럴 수 없었기에 특별히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었다.

    과거보다 더욱 살이 찐 채 값비싼 의복을 걸치고 걷는 그의 모습은 흡사 재물의 신이 강림한 형상이었다. 손가락에 낀 비취 반지 세 개는 그를 속물로 보이게 하기보다 오히려 그의 부귀함을 부각시켜 주었다.

    장서열은 거만한 기색 없이 청산지주를 마주했다. 그녀는 그의 말을 통해 루 부인이 오늘의 초대받은 금 연주자임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루 부인의 신분으로는 이렇듯 큰 행사에서 연주를 맡는 건 불가능했다. 장 씨 가문의 환심을 사기 위한 청산지주의 조치임이 분명했다.

    장서열은 청산지주의 호의를 고맙게 받아들이고 감사 인사 몇 마디를 나눈 뒤 헤어졌다. 차석에 앉은 권서함은 웃음을 머금은 채 장서열을 향해 물었다.

    “서열 아가씨의 친구들은 만천하에 널리 퍼져있군요. 청산지주와도 친분이 있으십니까?”

    “하하, 부러우신가요? 그럼 왜 지난날 청산지주를 문전박대 하셨어요.”

    권서함이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과거 낙마하는 장서열을 구한 것은 그조차도 생각지 못한 일이었다. 사고 이후 그는 아무도 만나려 하지 않았으나 청산지주는 일처리가 빠른 자였기에 눈치껏 권 씨 가문에 무수히 많은 선물을 보냈다. 그의 아버지 서재에 걸려있는 백묵도(百墨圖) 역시 그중 하나였다.

    돌아온 구염락은 더 이상 장서열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권여아는 구염락의 옆자리에 앉아 계속해 대화를 시도했다. 구염락은 가끔씩 고개를 끄덕였다. 권여아의 목소리는 매우 들떠 있었다. 그와 나눌 말이 끝도 없는 것 같았다.

    묵각(墨閣)은 1층 대청을 사방으로 둘러싼 원형 건축물이었다. 3층에 별실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아래층은 천장이 시원하게 뚫려 있어 오늘처럼 사람이 많은 날도 크게 혼잡해 보이지 않았다.

    첫 번째 시험이 시작되었다. 문제가 적힌 열 폭 길이의 두루마리는 가장 높은 곳에 걸려 있었다. 향 하나가 사그라들 때까지 봄에 관한 시 한 수를 지어야 했다. 시간을 지키지 못하는 자는 바로 탈락이었다.

    헌원가는 헌원상과 함께 창가에 앉아 떠들썩한 바깥을 구경했다. 장서열과 권서함, 서풍엽은 안쪽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대화의 대부분은 권서함과 서풍엽이 주도했다.

    장서열은 만정에게 진주 가루로 피부를 매끄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 전생에 황후였던 그녀는 온갖 귀한 물건을 전부 사용해 봤기 때문에 식견이 매우 넓었다.

    그러나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던 만정은 상석에 앉은 남녀만을 거듭 바라볼 뿐이었다. 두 사람은 마침 매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동시에 웃었다. 이를 보는 만정은 더욱 쓸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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