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9화
사대천지주의 눈이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삼대천의 기적이라 불리는 장 씨 가문의 적녀이자 세자의 정혼자였다.
‘저… 저 아가씨가 여기까지 무슨 일이지? 설마…….’
사대천지주는 바닥에 엎드려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가 누구인지 알아본 다른 이들도 서둘러 길을 비켜 주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인 채 더는 그녀를 바라보지 못했다.
장서열은 속으로 후회했다. 만에 하나 정말로 위지해어와 함께 있는 서풍엽을 맞닥뜨리게 된다면 그녀는 바람난 정혼자를 현장에서 잡는 꼴이 된다. 그것도 서풍엽의 동료와 부하가 보는 앞에서. 이 행동이 서풍엽의 위신을 땅에 떨어뜨리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난다면 바람난 정혼자에게 상심하여 제풀에 물러난 꼴이 될 터였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그래도 서풍엽이 남편으로서 위신을 세우지 못하는 것보다 자신이 망신을 당하는 편이 나았다. 장서열은 그대로 자리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끝낸다면 기껏해야 여인의 질투가 불러온 작은 소동으로 끝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 손가락질 당할 일도 아니었다.
장서열이 뒤돌아섰을 때, 문득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세자의 친위대군요. 저 안에 형님이 있나 봅니다.”
순간 장서열은 구염락의 입을 틀어막고픈 충동을 느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을 하다니!
뜨끔했던 사내 한 명이 당황하며 무릎을 꿇었다.
“십삼황자와 서열 아가씨를 뵈옵니다.”
나머지 사람들도 막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놀라서 황급히 무릎을 꿇었다.
“십삼황자와 서열 아가씨를 뵈옵니다!”
소문으로만 듣던 미래의 태자를 맞이한 이들이 당황하여 고개를 숙였다. 다들 너무 놀란 나머지 장서열의 등장이 그들의 주인에게 미칠 영향조차 잊은 채였다.
이들을 안내한 여인 역시 놀라서 얼른 무릎을 꿇었다.
“소… 소인, 전하이신 줄 모르고 무례를 범했습니다. 전하께 인사 올립니다. 혹여 소인이 지은 죄가 있다면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여인의 말은 안중에도 없이 구염락은 오로지 굳게 닫힌 문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서풍엽은 분명 저 방에 있었다.
그는 장서열이 어서 방문을 열기를 기다렸다. 서풍엽의 목적이 무엇이든 위지해어를 찾은 건 명백한 잘못이었다. 그리고 서열 누님은 그에게 본때를 보여 줘야 했다. 서풍엽의 진면목을 보게 된다면 누님은 그와 혼인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장서열이 입을 뗐을 때 구염락은 벌써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서열 누님이 이런 식으로 괴롭힘을 당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었다. 그가 막 문을 열려고 할 때, 재빨리 뛰어간 장서열이 그를 붙잡았다.
“제가… 열겠습니다.”
의혹이 사실이라면 이토록 많은 사람 앞에서 서풍엽을 망신당하게 할 수는 없었다. 장서열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걸 보니 이야기가 잘 안 풀리나 봅니다. 혹 제가 도와줄 게 없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상황이 이리 되어 안타깝네요. 해어 아가씨와 언니, 동생 하며 지냈다면 얼마나 좋았을지…….”
가식적인 말을 늘어놓은 장서열이 재빨리 방에 들어와 급히 문을 닫았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놀란 얼굴의 서풍엽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비단이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절망에 찬 위지해어의 눈동자가 장서열을 향했다.
위지해어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서둘러 장서열에게로 달려온 서풍엽이 그녀의 눈을 가린 후 문을 박차고 나갔다. 떨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아무 일도 없었어. 넌 아무 것도 못 본거야……. 그녀는 잠이 든 것뿐이야. 놀라지 마, 서열아. 아무 일도 없었어…….”
서풍엽은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장서열을 안은 채 그녀의 기억이 사라지기만을 바라며 쏜살같이 밖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녀를 안은 손이 쉬지 않고 덜덜 떨렸다.
‘봤어… 서열이가 봤어! 그런 장면을 보게 하다니!’
“서열아, 괜찮아. 내가 있잖아. 아무 일도 없었어…….”
서풍엽은 지금처럼 걱정스러운 일을 맞닥뜨린 적이 없었다. 너무나 두려웠다. 사람의 죽음을 목격한 이들은 대개 강한 충격에 빠지거나 정신을 잃기도 했다. 서풍엽은 당장 장서열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지 염려할 겨를이 없었다. 오직 그녀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는 조심성이 없던 스스로를 탓했다. 하필이면 서열이가 그런 장면을 보게 만들다니. 그때 위지해어는 눈도 채 감지 못한 상태였다. 만약 원한에 찬 얼굴이 천진한 서열이의 뇌리에 각인된다면…….
“서열아, 괜찮은 거야? 두려워 마. 나도 두려워하지 말고… 서열아…….”
구염락은 즉시 두 사람의 뒤를 쫓았다. 그의 눈에 장서열은 방에 들어가자마자 놀란 서풍엽에게 끌려 나온 것이었다. 그녀에게 불리한 일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바닥에 꿇어앉아 있던 이들은 영문을 알지 못해 어리둥절했다. 사대천지주도 몹시 궁금했다.
‘결국 세자도 위지해어에게 마음이 흔들린 것인가? 위지 씨 가문에 희망이 생긴 걸까?’
그중 가장 호기심이 강했던 이가 방 안을 들여다보다 순간 크게 비명을 질렀다.
“악! 사람이 죽었다! 사람이 죽……!”
그러나 그는 곧 충왕부 시위에 의해 기절했다. 시위는 놀란 기색 없이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황은(皇恩)을 저버린 위지해어가 법을 어기고 도망쳤기에 이를 발견한 세자께서 자결을 명하셨다.”
말을 마친 시위는 사소한 일을 처리하듯 태연한 얼굴로 부하에게 시신을 옮기도록 명령했다. 그는 주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혹여나 아가씨께 좋지 않은 모습을 들킨 것은 아닌지 걱정할 따름이었다.
장서열에게 들리는 건 바람 소리뿐이었다. 이렇게 빠른 속도를 느끼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귀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녀는 보통의 여인이라면 똑같은 장면을 본 후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난감했다. 전생에서 황제의 수많은 비빈을 직접 처리했던 악독한 황후에게 이런 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질투심이 영혼을 갉아먹었던 시절, 그녀는 이보다 더욱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냉궁에 갇혔던 시절도 마찬가지였다. 죽을 만큼 괴로운 학대를 당한 적도 있었다.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만 다행히 의지와 정신력이 강했던 덕분에 장서열은 이런 일에 놀랄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서열아…….”
서풍엽의 목소리가 떨렸다. 초조해서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그는 차마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그녀가 자신의 얼굴에서 방금 전 목격한 장면을 떠올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잠시 뒤, 서풍엽은 성세안락 바깥으로 나왔다. 그는 연못가의 아름다운 봄 풍경 속에서 장서열이 심신을 가다듬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장서열은 여전히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상태였다.
‘비명을 질러야 하나? 아니면 풍엽을 밀어내며 악마라고 소리치는 게 좋을까?’
장서열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만일 서풍엽을 밀어낸다면 어떻게, 어느 정도로 밀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때 묻지 않은 순진무구함을 드러내기 위해 뒷걸음질도 치고 바닥에 주저앉아야 하는 걸까.
그녀는 맨 처음 사람이 죽는 장면을 목격했을 때의 느낌을 기억해 보려 애를 썼다. 설마 그때에도 아무 생각이 없었나 싶었지만 그녀는 그 정도로 냉혈 인간은 아니었다.
장서열은 필사적으로 자신을 부르는 서풍엽이 안쓰러웠다. 그는 어째서 자신을 그리 애지중지하는 걸까. 그녀는 서풍엽이 생각하는 완벽한 여자가 아니었다.
“서열아… 내 말 들려?”
이제는 죄책감까지 들 지경이었다. 확실히 서풍엽은 구염락 그 나쁜 자식보다 백 배는 더 나았다.
장서열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등 뒤에서 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당장 놓지 못해! 서풍엽, 누님에게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서풍엽은 갑자기 구염락이 왜 나타났는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걱정스런 빛이 가득했다.
“조용히 해! 방금 전 서열이가 많이 놀랐어. 뭘 그렇게 보고 있어, 빨리 서열이 눈이 괜찮은지 확인해 봐! 서열아…….”
서풍엽의 목소리는 초조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구염락이 그의 적인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경쟁이란 장서열의 안위가 보장될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었다.
장서열이 몸을 움직였다. 서풍엽을 위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아파요.”
그 말에 서풍엽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서열아!”
서풍엽은 즉시 장서열을 뒤돌아 세우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그녀가 겁을 먹을까 두려워 참을성 있게 물었다.
“서열아… 괜찮아? 이제 괜찮아졌어?”
“자꾸 흔드니까 어지러워요.”
장서열의 얼굴은 온통 창백했다. 누구라도 그렇게 빠른 속도로 옮겨지면 괴로울 것이다.
“왜 그리 빨리 뛰어요. 귀가 먹먹해서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리잖아요.”
서풍엽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얼른 그녀를 돌려 세웠다. 안색이 약간 창백하고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져 있었지만 눈도, 정신도 멀쩡해 보였다.
‘설마…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건가? 그게 정말 가능해?’
마음을 놓은 서풍엽이 기대에 찬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서열아…….”
“아파 죽겠어요. 왜 그렇게 빨리 뛰어요? 내게 잘못한 게 있는 거죠?”
그제야 서풍엽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녀를 덥석 껴안았다. 그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서열아! 정말 다행이다. 네게 아무 일이 없어서 정말 다행이야!”
장서열의 눈이 밝게 빛났다. 서풍엽에게 안겨 빙빙 도는 그녀에게서 봄의 정취가 느껴졌다. 그녀는 두렵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서풍엽은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만하고 내려 줘요! 어지럽단 말이에요.”
발이 땅에서 떨어져 있는 느낌은 흡사 날개가 사라진 새가 공중에 떠 있듯 공포스러웠다. 빙빙 돌기를 멈춘 서풍엽이 행복한 얼굴로 장서열을 껴안았다.
“서열아!”
입꼬리를 올린 장서열이 서풍엽의 품에 기대어 딱딱하게 물었다.
“날 배신한 거예요? 내게 용서받을 생각 마요.”
서풍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는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하늘이 자신을 돕는 게 분명했다.
“아니야. 내가 어떻게 널 배신할 수 있겠어. 아까는 위지해어가 갑자기 뛰어들기에 내가 바로 밀어버렸어.”
장서열은 기뻐하는 서풍엽을 보면서 자신의 행동이 옳았음을 깨닫고, 그를 더욱 안심시키기 위해 짐짓 투정을 부렸다.
“그래요? 그런데 왜 내 눈에는 나를 보자마자 당황해서 위지해어만 나쁜 사람으로 모는 것처럼 보이죠?”
서풍엽이 그녀를 꼭 껴안았다. 지금은 장서열이 욕설을 날린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렇게 귀여운 부인을 두고 내가 어찌 다른 사람을 바라보겠어.”
구염락은 모든 동작을 멈춘 채 조용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귀엽게 투정을 부리는 그녀는 서풍엽의 품에 안겨 그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순간 구염락은 맹수라도 마주친 양 뒷걸음질쳤다. 과거 그날보다 더욱 공포스러운 장면이었다. 몇 년 전 폭설이 내렸던 날, 그는 굶어 죽을 뻔했다. 모든 것이 눈에 덮여 사라졌고, 주변은 텅 비어 있었다. 세상에 오직 홀로 남은 듯한 느낌. 그때 그는 어떠한 소리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보다 더욱 그를 두렵게 하는 것은 없었다. 그는 버림받았다. 장서열의 세계에 그는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서열 누님에게 일 순위가 아니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며, 그와 평생을 함께 하거나 영원히 그의 곁에 있겠다는 생각 같은 건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