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8화
“헌원가와 만정은 들어갈 수 없으니 먼저 올라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따라갈게.”
만정은 이미 자신이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서열의 경우 정혼을 한 몸이기에 특정 장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만정은 아니었다.
“서열 언니, 조심해요. 전하와 떨어지지 말고요. 그리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풍엽 오라버니에게 너무 화내지 말아요.”
장서열이 쓴웃음을 지었다. 서풍엽이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녀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설령 그들의 상상이 사실이라 해도, 그는 어떤 여인이든 밖에서 깔끔하게 만난 뒤 혼인한 후에는 가차 없이 버릴 사람이었다.
“걱정 마. 절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때리지 않을게.”
헌원가는 함께 가서 소란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자신의 신분을 고려해 제멋대로 굴지 못했다.
“어라? 권 공자가 왔어요. 상아, 이리 와.”
권서함은 성세안락이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네 글자를 보며 감탄했다.
“훌륭한 필체로군요. 그런데 다들 여기 서서 뭐하는 거죠? 왜 들어가지 않고요.”
다른 곳은 모두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는 모처럼 인파가 몰리지 않는 곳을 찾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신분이라면 충분히 들어가고도 남을 것이다.
당자가 매우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며 말했다.
“권 공자, 먼저 드시지요! 이봐, 자네들도 막지 못할 걸? 그가 누군지 몰라? 권 씨 가문의 큰 도련님이자 한림원 7품 전의잖아.”
시위가 매우 정중하게 답했다.
“소인, 권 공자를 뵈옵니다.”
그러나 시위는 그를 들여보낼 생각이 없었다. 권 씨 가문은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장서열이 권서함에게 말을 건넸다.
“금방 나오겠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먼저 올라가 주시지요.”
말을 마친 그녀가 허리에 찬 요패(腰牌, 출입을 증명하는 허리에 차던 패)를 꺼내 시위에게 보인 후 곧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염락이 그 뒤를 따랐다.
요패를 본 시위는 즉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잠시 후 장서열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그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허리를 굽실거린 그가 계속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저 온통 땀범벅이 된 그가 부들부들 떠는 것을 목격했을 뿐이었다.
전혀 저지당하지 않은 채 바로 사람들의 시야에서 사라진 장서열을 보며 당자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장서열이야. 이 세상에 그녀에게 금지 구역이란 없다니까.”
놀란 권여아는 성세안락 네 글자를 바라보다가 조금 전 오라버니보다 장서열을 두려워하던 시위를 떠올렸다.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라버니, 서열 아가씨가 손에 들고 있던 건 무슨 패예요?”
권서함의 시선이 잠시 멈칫했다. 그가 사람들을 데리고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여짐친임(如朕親臨, 이 패를 지닌 사람을 짐(朕)처럼 대하라)이다.”
권서함은 장 부인이 장서열에게 그 패를 준 것을 뜻밖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요패는 장서열 본인의 것이었다. 그녀는 이 요패를 침대 머리맡에 다 걸어도 남을 만큼 넘치게 갖고 있었다. 몇 년 전, 그녀는 황제에게 청하여 면사금패(免死金牌, 죽을죄를 사면해 주는 금패) 백 개를 하사받았다. 그런 물건이 비교적 안전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 * *
서풍엽은 여러 사람의 호위를 받으며 성세안락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의 얼굴은 서릿발처럼 차가웠다. 그를 마주한 사람들은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오직 사대천지주(四臺天之主)만이 행여나 실수할까 두려워하며 성심성의껏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세자, 찾으시는 사람은 정말로 이곳에 숨어있지 않습니다. 사실이니 믿어 주십시오.”
서풍엽이 음산하게 입을 열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네가 결정하는 게 아니다. 네가 위지 씨 가문과 어떤 사이인지 내가 모를 줄 아느냐?”
사대천지주의 등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세자, 굳이 이러실 필요가 있습니까? 그녀 역시 불쌍한 사람입니다. 어차피 위지 씨 가문의 상황으로 보아 그녀는 앞으로 절대 장 씨 아가씨에게 해를 끼치지 못할 겁니다.”
발걸음이 더욱 빨라진 서풍엽의 얼굴에 냉기가 더해졌다.
“그래? 그럼 내가 어제 집 앞에서 본 건 귀신이었나 보군.”
사대천지주의 몸이 굳었다. 전날 산을 내려간 위지해어가 세자를 보러간 모양이었다. 이에 그가 이토록 분노한 것이다.
예전이었다면 위지해어의 신분이 그녀를 지켜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칠 것이 없는 지금, 서풍엽이 그녀를 용서해 줄 리 만무했다. 사대천지주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세자, 소인의 설명을 들어 주십시오. 그녀는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너무 억울하여 그런 일을…….”
그러나 세자의 굳은 얼굴을 본 사대천지주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제는 위지해어가 혼자 있지 않기만을 비는 수밖에 없었다.
사대천지주는 과거 위지 대사마에게 큰 은혜를 입은 일이 있었다. 대사마가 아니었다면 지금의 그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 대사마의 딸이 곤경에 처했으니 그가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당연했다.
사실 서풍엽 역시 위지해어를 모른 척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위지해어를 보살펴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평안히 살게 하거나, 풍문이 사그라든 후 그녀의 이름을 바꿔 주고 평민과 혼인시켜 평범하게 살게 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평소 위지해어에게 잘해 준 서풍엽의 행동을 눈여겨 본 하인들이 그녀의 환심을 얻고자 그녀를 하산시켜 주었고, 이는 그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대천지주는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세자가 어떤 인물인가. 그가 정말로 죽이고자 마음먹었다면 살릴 수 없을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위지해어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서풍엽은 막힘없이 여러 누각을 지나쳤다. 앞으로 다가오던 여인들은 그의 차가운 시선에 겁을 먹고 뒤로 물러섰다. 사대천지주는 그들의 행동에 분통이 터졌다. 평소에는 적극적이지도 않던 여인들이 하필 이런 때 눈치 없이 굴고 있었다.
서풍엽이 가장 화려한 누각에 들어섰다. 여인들의 미모가 더욱 빛을 발했지만 손님은 매우 드물었다. 화려한 그릇과 산뜻한 향기가 만연했고 곳곳에 술과 고기가 넘쳐났다. 여인들은 매혹적인 자태를 뽐내며 난간에 기대 있었다.
서풍엽은 곁눈질 한 번 없이 가장 볼품없는 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사대천지주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세자는 모든 걸 다 준비하고 온 것이다.
“세자, 살려 주십시오! 소인은 절대 성지(聖旨, 황제의 명)를 거역하려 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위지 아가씨… 아니, 죄인이 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이것저것 가르치느라…….”
그의 말을 무시한 서풍엽이 벌컥 문을 열어 젖혔다.
한 여인이 조각처럼 창가에 서 있었다. 연한 남색 치마를 차려입은 그녀는 고요하고 차분했지만 빛을 잃은 두 눈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광채가 사라진 얼굴에는 이따금씩 긴 속눈썹만이 팔랑거렸다. 마치 생명을 잃은 인형처럼 애잔하고 슬픈 모습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은 그녀가 느릿느릿 고개를 돌렸다. 서풍엽을 발견한 그녀의 눈에서 눈물 한 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녀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세자, 잘못했습니다… 제가 잘못했어요. 제 아버지를 풀어주세요… 부디 제 아버지를…….”
뒤에 선 모두가 차마 그 모습을 바라볼 수 없어 시선을 돌렸다. 절로 동정심이 일었다.
그러나 서풍엽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그가 즉시 문을 닫아걸고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예상치 못한 행동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설마 위지해어의 가련한 모습에 마음이 흔들린 걸까?’
사대천지주가 마치 사면을 받은 죄인처럼 희한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지만 한 줄기 희망을 품고 마음을 놓았다.
한편, 장서열은 한 여인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위지해어의 거처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적잖이 놀라는 중이었다.
‘위지해어가 정말 이곳에 있는 걸까?’
사실이라면 자신을 연못에 뛰어들게 만든 원한을 이제야 갚는 셈이었다.
장서열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진 귀족 가문의 여식이라면 차라리 목숨을 끊게 해 주는 것이 그녀를 도와주는 길일 터였다.
‘해어 아가씨, 어때요? 차라리 그게 낫지 않겠어요?’
오랜 시간 겨울잠을 자다 마침내 동굴을 뚫고 나온 듯 장서열의 눈에서 차가운 불꽃이 일었다. 복수심에 불타는 눈을 본 구염락이 깜짝 놀라 장서열을 불렀다.
“서열 누님.”
장서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순식간에 어질고 선한 모습이었다.
“네, 전하.”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구염락이 정신을 차리려는 듯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녀가 평소와 다르다고 느꼈지만 아마도 오해인 듯했다.
“조금 빨리 걷는 게 좋겠어요. 깨끗하지 않은 곳이군요.”
장서열이 너그러운 표정으로 탄식을 표했다.
“그런 말씀 마세요. 모두 불쌍한 이들입니다. 위지해어 아가씨가 이런 곳으로 보내지다니 참으로 안타깝군요.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서열 누님은 너무 선해요. 위지해어가 누님에게 한 짓을 생각해 보세요. 황제 폐하를 홀려 나라를 망칠 화근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는데도 오히려 도와주려 하다니요.”
그것이 바로 장서열이 위지해어를 황천길로 보내 주려는 이유였다.
“어쨌거나 저로 인해 시작된 일이니 돕고 싶어요.”
그녀의 말에 곁으로 다가온 구염락이 존경하고 사모하는 눈으로 장서열의 손을 끌어당겼다. 자신의 서열 누님은 언제나 그랬다. 아무리 해를 끼치는 상대라도 언제나 그 사람을 배려했다.
과거의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아름다웠다.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불결한 자는 서열 누님의 곁에 설 자격이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구염락은 조용히 손을 거두고 묵묵히 장서열의 뒤에 섰다. 자신이 가장 사모하고 존경하는 여인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따로 언질을 줄 필요도 없이 장서열이 지나가는 곳은 여인들이 알아서 자리를 피했다.
이들을 안내하는 여인은 감히 장서열을 데리고 손님이 많은 곳을 지나갈 수 없어 눈치껏 멀리 길을 돌아갔다. 남자라곤 찾아볼 수 없는 여인들의 숙소가 이어졌다.
위지해어의 처소에 도착한 여인은 후문을 열려다가 문득 지체 높은 사내들이 문 앞을 에워싸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들은 쥐죽은 듯 가만히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다. 장서열 일행이 다가오자 그들은 곧 숨을 쉬는 것도 잊었다. 주변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장서열의 용모 때문이었다.
“흠!”
여인의 가벼운 헛기침에 마치 수면에 돌멩이가 날아온 듯 고요함이 사라졌다.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있을 거라곤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여인이 황급히 장서열에게 용서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노비도 몰랐습니다.”
장서열이 주변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괜찮다. 나를 여기로 데려와 준 걸로 족하다.”
구염락은 장서열에게 빠진 남자들의 눈을 모조리 다 찔러 버리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는 후에 반드시 이들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머릿속에 그 얼굴들을 똑똑히 새겼다.
“누님, 천천히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