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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17)화 (117/449)
  • 제117화

    “서영아, 이 분은 오라버니의 친한 벗 백계상학이라고 한다.”

    백계상학이 정중하게 인사를 올리자 장서영 역시 가볍게 답례 인사를 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달아오른 얼굴로 큰오라버니의 뒤에 숨어 나올 줄을 몰랐다.

    백계상학은 평민 출신이었다. 그가 국자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연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누이는 어느 조정 대신의 측부인이었다. 누이가 정실부인에게 부탁한 덕분에 그는 국자감 시험에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고, 뜻밖에도 합격했다.

    그러나 그는 장서양보다도 보잘 것 없는 신분이었기에 장서양이 자발적으로 자신과 어울려 주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했고, 그의 누이동생인 장서영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장서양이 흥미롭게 물었다.

    “무슨 선경이기에 그래?”

    백계상학이 있는 그대로 말했다. 어차피 주변의 모든 이들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숨길 수도 없었다.

    “방금 누각 아래에 여인 한 명이 앉아 있었어요. 하늘하늘한 자태가 선녀처럼 몽환적이었죠. 누각에 오른 이들이 전부 깜짝 놀라 그녀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시를 짓기 시작했어요. 학식이 부족한 이들은 그녀가 너무 짧게 머물다 떠난 탓에 시를 마무리하지 못했다고 불경한 말까지 내뱉었어요.”

    그 말에 장서영이 더욱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그렇게나 예뻤나요? 얼마나요?”

    몹시 궁금해하는 장서영의 모습에 장서목이 입을 열었다.

    “너희 여자들은 항상 그런 불필요한 것에 흥미를 갖지. 예뻐 봐야 얼마나 예뻤겠어. 문회에 온 자들이라 괜히 시를 짓는다고 유난인 것뿐이야. 네가 저 아래 있어 봐라.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갑자기 시상이 폭포처럼 쏟아질 거야.”

    장서영이 짐짓 투정을 부리며 둘째 오라버니를 흘겨보았다.

    “하여튼 제멋대로 말하는 데 선수라니까.”

    백계상학이 진지하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아가씨였어요.”

    그는 물론 장서영도 예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전 목격한 아가씨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장서양의 얼굴이 살짝 꿈틀거렸다. 누이동생을 앞에 두고도 그 미모를 칭송할 만한 여인은 연경에 그리 많지 않았다.

    설마 장서열이 나온 것인가 싶었지만, 그녀는 정혼한 몸이기에 오늘 이런 자리에 나오지 않는 게 마땅했다. 설령 정말로 그녀가 문회에서 문인들을 만나볼 생각을 했다 하더라도 홀로 저 아래에 앉아 있었을 리 만무했다.

    어쩌면 자신의 상상이 지나친 것이리라. 오늘 문회에는 여인들의 모습도 상당수 눈에 띄었다. 그중 장서열만큼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을지 모른다.

    “서양 형님, 무슨 생각하세요?”

    “별 것 아니야.”

    백계상학이 말했다.

    “어서 구각영월천(九閣映月泉)의 물을 만져보고 육대천(六臺天)으로 향하는 게 좋겠어요. 문회가 곧 시작될 거예요. 늦게 갈수록 들어가기 힘들어요.”

    문회는 인원을 제한하기 위해 입장 시 간단히 풀 수 있는 문제 하나를 제시했다. 하지만 모든 이들의 답은 앞서 나온 답과 같지 않아야 했다. 따라서 늦게 도착하는 건 손해였다. 가끔은 이미 답이 다 나온 관계로 학식이 뛰어난 사람조차 문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한참 뒤 기운을 차린 만정이 장서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염락은 조금도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그는 만정이 자신의 서열 누님을 힘들게 하지 못하도록 금수를 시켜 만정을 부축하도록 지시했다.

    청산에는 아홉 개의 대천(臺天)이 존재했다. 산기슭에서 산꼭대기로 갈수록 값이 비쌌다. 그중 일대천 구각영월은 청산에서 가장 자릿세가 저렴한 장소 중 하나였다.

    이대천 화만인간(花滿人間)은 꽃이 가득 만발해 봄을 즐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였다. 삼대천 마답천벽(馬踏淺碧)은 푸른 자연을 벗 삼아 기마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과거 장서열과 당자가 자주 방문하던 장소이기도 했다.

    장서열이 막 삼대천에 올랐을 때였다. 당자와 헌원가가 고개를 숙인 채 풀죽은 모습으로 나타났다.

    “문이 닫혔어요.”

    장서열은 전혀 놀라지 않은 얼굴로 웃어 보였다.

    “당연하지. 오늘은 문회를 개최하는 날이니까. 만일 무회(武會)가 열렸다면 육대천도 똑같이 문을 닫았을 거야. 나중에 무회가 열리면 그때 다시 와.”

    “웃음이 나와요? 난 몸에 녹이 슬 지경이구만.”

    “이렇게 넓은 곳에서도 녹이 슬다니. 넌 차라리 배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당자는 입을 다물었다. 여기에 있는 것이 답답한 배 위에 있는 것보다 백 배 나았다.

    사대천은 성세안락(盛世安樂)이었다.

    성세안락에는 장벽이 쳐져 있었다. 작은 도로 이외에는 누구도 올라올 수 없도록 시위들이 주변을 봉쇄하고 있어 외부인은 전혀 출입할 수가 없었다.

    만정과 헌원가, 그리고 장서열도 이곳에 와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장서열은 매번 마장에만 들렀을 뿐 나머지 구역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사대천은 자릿세가 터무니없이 비싸다고 했다.

    “여기는 뭐하는 곳이에요?”

    만정이 ‘성세안락(盛世安樂)’이라 쓰인 글자를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어째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키고 서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장서열 역시 궁금한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구염락도 와본 적이 없었기에 소리자를 쳐다볼 따름이었다. 보통 태감들은 모르는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소리자 역시 알지 못했다. 이건 그에게 필요한 지식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어떤 곳인지 알고 있는 건 당자뿐이었다. 그가 쑥스러워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여긴 기방이야. 너희가 상상할 수 없는 미인들이 다 모여 있지. 연경에서 난다 긴다 하는 기녀들보다도 훨씬 만나기 어렵고. 소문에는 연경의 제일 유명한 기녀가 온다 한들 이곳의 미인을 모시는 시녀급밖에 되지 않는다고 하더군.”

    “…….”

    “성세안락에 드나드는 사람은 모두 나라를 쥐락펴락할 만한 세력가들이니 괜한 호기심은 갖지 않는 게 좋아. 어차피 너희는 절대 들여보내 주지 않을 테니까. 나도 전에 한 번 몰래 들어갔다가 결국 붙잡혀 나왔어. 보아하니 오늘도 불가능해 보이는군.”

    “누가 들어가고 싶대? 우리가 기방을 왜 보고 싶겠어. 너처럼 수치를 모르는 사람이나 이런 곳에 오지!”

    당자는 만정의 말에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그는 다른 뜻도 없었고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았으니, 기녀가 있는 곳에 드나드는 것도 켕길 것이 없었다.

    “가자.”

    어쨌든 여러 명의 여자아이가 이런 곳에 서 있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장서열이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그녀들 중 성세안락을 궁금해 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곧 인파를 따라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삼대천에 도착했을 때쯤, 장서열이 돌연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사람들에게 에워싸인 채 성세안락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그녀가 미간을 찡그렸다.

    ‘서풍엽?’

    당자의 입이 벌어졌다.

    “와, 역시 세자 형님이야! 문지기가 바로 통과시켜 주잖아! 난 언제쯤 형님과 같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으려나.”

    헌원가가 장서열을 바라보며 말했다.

    “세자가 무슨 일이죠? 설마 위지해어가 저기에 있다고 마음 아파하는 건 아니겠죠?”

    장서열이 놀란 얼굴로 헌원가를 마주보았다. 전혀 몰랐던 사실이었다.

    ‘말도 안 돼. 위지해어가 기방에 있다고?’

    밀려드는 인파 사이를 힘겹게 버티고 서 있던 헌원가는 마치 모든 이들을 한 번에 쓸어버릴 기세로 장서열의 뒤를 지키고 선 미남 십삼황자를 부러운 눈길로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저도 어디서 전해 들은 거예요.”

    헌원가는 계속해 몸을 미는 인파에 짜증이 치밀었다.

    “뇌물 수수에 반역죄로 위지 대사마의 남자 식솔들은 모조리 추방당했고, 여자 식솔들은 노비가 됐다고 들었어요. 운 나쁘게도 위지해어는 저런 곳으로 보내졌죠……. 아, 그만 좀 밀어요! 아파 죽겠네!”

    “이보시오, 대체 가는 거요 마는 거요? 길 막지 말고 비키시오!”

    “그러게 말이야! 어린애들이 나와서 뭘 한다고…….”

    그러나 장서열을 본 남자는 즉시 입을 다물고 헌원가를 피해 멀리 돌아갔다.

    청산은 성곽에 견줄 만큼 넓은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물샐 틈 없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헌원가는 이곳이 모여든 이들로 인해 답답하게 느껴졌다. 모두가 출세를 원하는 이들이었다. 헌원가는 노기가 가득한 얼굴로 사람들을 노려보며 당자를 방패처럼 곁에 세워두었다. 장서열의 품 안에 선 만정은 헌원가를 향해 그저 웃어 보였다.

    잠시 제자리에 서 있던 장서열이 굳어진 얼굴로 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인파는 자연스레 그녀를 중심으로 길을 터주듯 갈라졌다. 그녀 앞을 방해하는 이들은 구염락에 의해 휩쓸려 나갔다.

    구염락이 장서열에게 말했다.

    “서열 누님, 정말 가 보려고요? 세자를 믿으세요. 형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헌원가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니요? 상대는 위지해어입니다. 지금 위지해어는 기녀이니, 세자에게는 어떤 풍문을 일으켜도 책임질 필요가 없는 절호의 기회이지요. 설마 이를 놓치려 할까요?”

    만정은 감히 헌원가처럼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당자도 난처했다. 그는 남자였기에 어느 정도 세상물정을 알고 있었지만 남녀 사이의 일은 무어라 말하기가 곤란했다.

    게다가 헌원가의 말처럼 위지해어가 기녀가 된 지금, 세자가 그녀를 찾는 것은 그다지 큰일이 아니었다. 당자는 오히려 세자가 이런 기회를 놓친다면 바보라고 생각했다.

    “누님, 이상한 생각 마요. 분위기상 어쩔 수 없었겠죠.”

    당자의 말에 구염락이 장서열을 이성적으로 타이르며 말했다.

    “당자, 헛소리 그만하라. 세자는 정말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문회와 관련된 공무 때문인지도 모르지.”

    구염락의 의중을 깨달은 당자는 더는 함부로 입을 놀리지 않았다.

    “맞아요. 공무 때문인 게 분명해요. 서열 누님, 얼른 다시 올라가요. 어차피 우린 못 들어갈 테니 시간 낭비라고요.”

    헌원가가 화를 내며 말했다.

    “갑자기 선비인 척하지 마! 기방까지 와서 공무를 보는 사람이 어디 있어? 언니,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요. 앞에서는 언니만 아내로 맞이하는 척하고 뒤로는 이런 곳에 드나들다뇨? 그동안 서열 언니가 일편단심으로 그를 대한 게 아까워요!”

    멈추지 않고 내려간 장서열이 문 앞에 서자 즉시 누군가가 나와 앞을 막아섰다.

    “이곳은 청산의 요충지로 출입을 금합니다.”

    그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 권서함이 누이동생과 함께 올라오고 있었다. 고개를 든 권서함은 굳이 찾으려 애를 쓰지 않아도 바로 눈에 띄는 장서열 일행을 발견했다. 뜻밖의 재회였다. 조금 전 하인은 그들이 이미 오대천에 도착했다고 알려 왔었다. 오대천 찻집에서 이들을 만날 거라 생각했던 권서함에게는 다소 의외의 풍경이었다.

    장서열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들을 하는 거야? 세자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그럼 내가 간다고 무슨 일이 있겠어?”

    ‘위지해어가 정말 저 안에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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