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3화
복잡한 심경으로 시선을 옮긴 권여아는 눈앞의 찻잔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권서함이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장서열은 이미 정혼을 한 몸이었다. 그의 눈에는 걱정할 게 없는 관계였으나 누이동생은 마음을 넓게 갖지 못했다.
돌연 번쩍 고개를 든 권여아가 오라버니를 마주보았다. 권서함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상냥하게 웃어 보인 그녀가 걱정스레 장서열을 향해 말을 건넸다.
“태의를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요? 혹 흉터라도 생기면…….”
그 말에 당자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장서열의 손을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녀의 손등에 발린 연고를 대충 걷어낸 후 햇빛에 이리저리 비춰보았다. 그가 비웃으며 말했다.
“이런 대수롭지 않은 상처에 거추장스럽게 약은 발라 뭐합니까? 서열이는 말을 타며 활을 쏘던 사람이라 이런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서열이가 다른 규방 여인들처럼 연약할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에요.”
손수건을 꺼낸 장서열이 손등에 바른 연고를 가볍게 닦아내면서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왠지 방금 전 구염락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서열이 말했다.
“제가 모두의 흥을 깨 버렸습니다. 양해해 주세요.”
권여아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구염락이 당자의 막말까지 용인하는 것을 보면서 두 사람이 보통 사이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의 표정이 평소와 같은 것을 확인하고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녀는 왠지 살짝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혹시 잘못한 게 있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누님, 다른 음식이라도 좀 드시겠어요?”
“네.”
안도한 구염락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음식을 만들러 갔다. 미처 그를 막지 못한 소리자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하께서는 근면이 몸에 배시어 언제나 노비를 부리는 걸 잊으십니다.”
말을 마친 소리자가 황급히 구염락의 뒤를 따랐다. 장서열은 주위의 모든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조용히 앉아 있었다.
무언가를 눈치챈 헌원가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만정은 구염락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낙담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조금 전 그는 한 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권여아 역시 입을 열지 않았다. 또 말실수를 해서 괜히 불같은 성격의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정자세로 자리한 헌원상은 분위기가 갑자기 어색해지자 역시 아무 말도 못했다. 그는 의아한 시선으로 장서열을 봤다가 다시 자신의 누이를 바라보았다.
권서함 역시 불편함을 느꼈다. 조용한 건 익숙했지만 이상하게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그는 문득 장서열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덕분에 주변 사람들도 덩달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로 기이한 침묵이 감돌았다.
권서함은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열셋째 전하께서는 여전하십니다. 예전부터 서열 아가씨의 일이라면 망설임이 없었으니 어린 궁녀를 혼낸 것도 당연합니다. 그런 전하께서 직접 만든 음식이라면 분명 맛있을 겁니다. 마음껏 즐기시지요. 나중에는 먹고 싶어도 그럴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장서열은 미소로 그의 체면을 세워 주었다. 언짢은 기색을 단번에 지운 그녀가 평소처럼 말했다.
“그러게요.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이니 소중히 해야겠어요.”
헌원가도 웃으며 말했다.
“언니 덕을 본다면 저도 먹어볼 수 있겠죠? 어쩌면 백 세까지 장수하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장서열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게 무슨 용혈봉육(龍血鳳肉, 용의 피와 봉황의 고기로 만든 음식)이라도 되는 줄 아니?”
구염락이 때마침 쟁반을 받쳐 들고 들어왔다.
“누님, 용혈봉육을 드시고 싶으세요? 그건 좀 난감하네요. 어디 있는지만 가르쳐 주시면 제가 갖다 드리지요.”
장서열이 얼굴 가득 미소를 짓고 나무라듯 말했다.
“똑같이 농을 하시면 어찌합니까. 전하의 신분을 잊으셨나요? 전하께서 친히 만드신 음식을 저는 감히 먹을 수 없으니 그냥 혼자 드십시오. 그걸 먹었다가 행여나 감찰반에서 조사라도 나오면 어쩌려고요. 보세요, 여기 한림원 7품 전의(典儀, 예식과 의례를 담당하던 관직명)도 지켜보고 있지 않습니까.”
권서함이 얼른 두 손을 들고 말했다.
“전 아무 것도 못 봤습니다.”
“난 봤어요. 본 사람에게는 마땅히 그 몫을 챙겨 줘야죠.”
당자가 얼른 비집고 들어와 만정을 밀어내고 장서열의 곁에 앉았다.
“말도 마세요. 열셋째 전하의 음식 솜씨는 누구도 못 따라갑니다. 예전에 제가 데려온 요리사도 전하의 솜씨만 못해서 서열 누님이 다시는 제 음식을 먹지 않을 정도였죠. 반만 좀 주세요.”
오랫동안 구염락이 만들어 준 음식을 맛보지 못한 건 장서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색상이 밝은 과일과 잘게 썬 얼음이 뿌려진 떡을 바라보았다. 선명한 색채와 달콤한 향이 보고만 있어도 군침을 돌게 했다.
“얼른 먹어 봐야겠다. 전하께서 고생하셨네요. 당자, 내가 부럽지?”
당자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부러워요, 부러워.”
동시에 순식간에 반절을 덜어간 당자가 바로 음식을 한입에 삼켰다. 과육의 쫄깃한 식감과 시원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입에 딱 맞는 감칠맛에 당자가 몸을 돌려 남은 반절까지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장서열은 빼앗기지 않았다.
당자는 창피한 기색도 없이 입술을 혀로 핥았다. 구염락이 웃으며 당자의 머리를 밀어냈다.
“누님, 드세요.”
당자가 아파서 소리를 질렀다. 가볍게 미는 것만으로 사람을 떼어낼 수 있다니, 그의 힘은 날이 갈수록 비정상적으로 세지고 있었다. 당장 야생 멧돼지라도 잡으러 가야 마땅한 사람을 두고 대체 누가 상냥하고 고상한 황자라 했는가. 눈이 삔 게 분명했다.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그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한 자리에서 오래도록 담소를 나누었다.
장서열의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구염락이 장서열을 돌보는 모습 또한 매우 자연스러웠다. 몇 년간 장서열과 함께하며 익힌 암묵적인 규칙으로 그는 농교를 올라오게 한 뒤 그녀의 시중을 들게 했다.
바로 그 자연스러움이 권여아의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했다. 권여아는 그간 구염락이 자신을 특별하게 대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는 장서열에게 하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오라버니의 말처럼 정말로 그들 사이에 남녀 간의 사랑이 없다 할지라도 오늘 장서열에게 지극정성인 그의 모습은 그녀를 불안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장서열은 아름다웠고, 과거 구염단신은 그 장서열을 위해 황후의 명까지 거역했다. 구염락이라고 장서열의 매력을 모를 리 없었다.
장서열은 이따금씩 권여아에게 시선을 던지며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불쾌할 것까지야. 그저 남자일 뿐인데, 그가 진정으로 너를 좋아하는지가 정말 그렇게 중요할까?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네가 사랑하는 그 남자의 정만 놓치게 될 뿐이야.’
권서함은 빙그레 미소 짓는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바닷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쳐지나갔다. 살랑이는 옷자락 속 그녀는 선녀처럼 몽환적으로 보였다. 용모로는 그녀를 따라갈 여인이 없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열 아가씨, 미처 소개를 못했습니다만 이 아이는 제 누이동생 여아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황후마마의 곁에서 자랐고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죠. 오늘 모처럼 밖에 나와 아가씨와 만난 것도 다 인연이라고 생각합니다.”
권서함이 말을 이었다.
“지난번 놀라울 정도로 멋진 금 연주를 하셨다고 전해 들었어요. 저도 줄곧 듣고 싶었지요. 여아는 궁악방(宮樂坊)의 장일성(張一聲) 국사에게서 금 연주를 전수 받았습니다. 덕분에 안목이 높고요. 부디 서열 아가씨께서 동생의 콧대를 꺾어 주시길 바랍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콧대를 세우다 자칫 남에게 비웃음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말이지요.”
오라비의 말에 권여아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열 아가씨께 인사드립니다. 오라버니의 말은 듣지 마세요. 전 어렸을 때부터 음률을 너무 좋아해 손에서 놓지 않았을 뿐, 스승님께 연주를 배운 지 오래 되었는데도 아직 흉내만 내는 수준입니다.”
고개를 치켜든 당자가 음식을 먹느라 기름이 잔뜩 묻은 입으로 말했다.
“흉내만 내는 수준이면 곤란하죠. 서열 누님은 정말 대단하거든요. 누님이 뽐내는 걸 싫어해서 그렇지, 아니었음 연경에서 재주 깨나 부린다는 여인들 모두가 이름도 못 내밀었을 겁니다. 진짜 흉내만 내는 수준이면 홀로 즐기는 게 나아요. 괜히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을 게 아니라요.”
장서열은 입가에 미소를 거둔 채 당자의 말을 정정하며 권여아에게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의 헛소리는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도 조금 발을 담갔을 뿐입니다. 제가 어찌 감히 여아 아가씨와 비교될 수 있겠어요.”
그녀는 권여아의 금 솜씨를 알고 있었다.
‘당자, 이 망할 녀석, 능력 있으면 네가 권여아와 겨뤄 보든지!’
권여아에게 이토록 자신을 무시하는 발언은 난생 처음이었다. 헌원가가 입을 열었다.
“여아 아가씨께서는 지나치게 겸손하십니다. 정말 흉내만 내는 수준이라면 장 국사께서 칭찬했을 리 만무하지요. 다만 서열 언니의 금 연주 솜씨도 정말 대단합니다. 하지만 서열 언니의 연주를 들으려면 여아 아가씨께서도 비슷한 실력을 갖고 계셔야 할 겁니다. 안 그러면 세자의 정혼자가 분노해 여아 아가씨를 무시할지도 모르니까요.”
그 말에 장서열이 눈을 부릅떴다. 잘못하면 권여아와 원한을 쌓을 수도 있는 발언이었다.
“헌원가!”
이에 당자가 매우 동의한다는 듯 입을 우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 타기와 똑같습니다. 서열 누님의 능력을 아무리 설명해 봤자 무지한 이에게는 그저 소 귀에 경 읽기일 뿐이지요. 누님은 우리 수준과는 다릅니다. 아마 지금 여아 아가씨의 스승을 부른다 해도 서열 누님은 못 당할걸요.”
만정 역시 얼른 말을 보탰다.
“서열 언니의 금 솜씨는 정말 뛰어나요! 생동감이 넘치죠. 춤은 또 얼마나 아름답게 추는데요. 저는 세자 덕분에 몰래 한 번 본 적이 있는데, 정말 이루 말할 수 없이 눈부셨어요. 세자는 완전히 넋이 나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