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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12)화 (112/449)
  • 제112화

    권서함은 누이동생의 뒤에 서서 고개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으나 구염락의 대답에 이내 표정을 풀었다. 그러나 그가 분명 친모와 재회했음을 직감한 장서열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귀자태후는 현재 국암사에서 몹시 고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국암사의 늙은 비구니들은 사람을 따끔하게 다스리는 재주가 있었다. 조옥언이 기 씨를 그곳으로 보낸 것도 다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장서열도 국암사에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매우 초췌해진 기 씨에게서 이전의 미모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고된 노동에 찌든 촌부가 되어 움푹 꺼진 눈으로 아궁이 앞에 앉아 콩을 까고 있었다.

    그리고 장서열은 몰래 귀자태후를 보았다. 비쩍 마른 얼굴에 박힌 불룩한 눈은 보는 이를 깜짝 놀라게 했다. 완전히 넋이 나간 그 모습은 장서열의 기억 속 언제나 아름답게 웃고 있던 태후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만일 구염락이 그런 모습의 모친을 봤다면…….’

    장서열은 냉소를 금치 못했다. 그가 귀자태후에게 열과 성을 다해 효도하는 것도 당연했다. 비록 두 사람 사이에 모자의 정이 없다 해도 친모의 고생을 목격한 것만으로 구염락은 궁의 고귀한 여인들을 전부 그녀의 아래 무릎 꿇릴 수 있었다.

    장서열은 평소처럼 답했다.

    “어질고 인정 많은 황후마마께서는 언제나 백성들을 염려하시지요.”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마마께서는 매우 좋은 분입니다. 그 곁에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건 저의 복이지요. 참, 누님. 국암사 안에 오도지(悟道池)라는 큰 연못이 있어요. 그곳엔 꽃잎이 이중으로 피는 연꽃이 있는데, 나중에 기회가 되면 같이 가요. 제가 보여 드릴게요.”

    “좋아요.”

    그가 이토록 스스럼없이 말을 건네는 이유는 뒤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일부러 그들의 대화를 들려주기 위함일 터였다. 장서열이 생각했다.

    ‘구염락에게도 연기가 필요할 때가 있구나. 고생이 많네.’

    두 사람은 남들이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구염락은 자세히 설명했고 장서열은 귀를 기울였다.

    권서함과 만정에게는 익숙한 모습이었다. 초혜전에서 구염락은 언제나 장서열의 주변을 맴돌았다. 당시 장서열은 기분이 좋으면 몇 마디를 건넸지만 기분이 언짢을 때면 하루 종일 입도 벙끗하지 않았다.

    매우 예민해진 권여아는 연신 불안한 시선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궁에서 구염락은 하루 종일 말을 아끼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먼저 말을 걸지 않으면 그저 곁에 앉아만 있을 뿐, 지금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정의 시선이 권여아에게로 향했다가 다시 천천히 돌아왔다. 만정의 곁으로 다가온 헌원가가 의미심장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봤다네.”

    즉시 얼굴을 붉힌 만정이 뾰로통한 눈으로 헌원가를 노려보았다. 헌원가가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시녀가 걷어준 휘장을 지나 선박 내부의 화려한 대청 안으로 들어섰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앙의 팔각 하화정(荷花亭)이었다.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물길은 햇빛에 반짝여 그윽하고 아름다웠다. 한발 앞으로 나간 헌원가가 정자 앞에서 탄성을 내뱉었다.

    “서열 언니, 팔각정이 정말 예뻐요. 전하께서는 과연 욕심이 많으시군요. 이런 정자를 홀로 감상하고 계셨으니 말이에요. 오늘 뱃놀이를 하러 온 다른 이들은 속 깨나 쓰렸겠어요.”

    당자가 어이없다는 듯 받아쳤다.

    “네게 감상할 기회를 줬으니 즐기기나 해. 남 생각하는 척하기는.”

    말을 마친 당자가 지루한 얼굴로 정자의 난간 위에 앉아 상반신을 밖으로 내밀었다. 동시에 누이동생을 잡아끈 권서함은 무리에서 한 발짝 떨어진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엉뚱한 생각하지 마. 두 사람이 보통의 관계는 아니지만, 또 네가 생각하는 그런 관계도 아니야.”

    말을 마친 그가 잠시 뒤 이어 말했다.

    “다른 아가씨들과 좋은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리야. 뭇 사람들과 사심 없이 즐길 수 있는 마음이야말로 값진 것이지.”

    물론 권여아는 오라버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음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권서함은 누이동생의 등을 토닥이며 그녀를 자리에 앉혔다. 권여아는 어렴풋한 불안감을 억누르며 웃어 보였다. 오라버니가 아니라고 했으니 아닐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녀가 생각하는 관계가 맞다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과거 그녀가 바랐던 건 오로지 태자가 자신를 받아주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바라는 게 많아진 기분이었다.

    장서열의 등장 이후 구염락이 한시도 그 곁을 떠나지 못하는 모습은 어쩔 수 없이 권여아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과거 구염단신과의 일이 아직까지 괜한 영향을 미치는 것이라 생각하며 애써 마음을 가다듬었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헌원상은 누이에 의해 억지로 권서함의 곁에 앉아야 했다. 구염락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권여아가, 오른쪽에는 장서열이 앉았다. 권서함은 누이동생 곁에 있었다.

    장서열의 곁에 앉은 만정은 무의식적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이를 놀려 주려던 헌원가의 눈에 돌연 장서열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얼굴이 들어왔다. 순간 헌원가는 이상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방금 전, 그가 자연스레 장서열의 찻잔을 닦아 주었던 것이다.

    헌원가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사실 구염락의 행동은 매우 평범한 것이었다. 아니, 실은 조금도 평범하지 않았다.

    찻잔을 닦아주는 건 상당히 친밀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친분이 두터운 사이라도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심지어 시녀를 곁에 둔 채 손수 잔을 닦아 주지는 않았다. 이는 이토록 사소한 일까지도 그녀를 위해 자신이 직접 해야만 마음이 놓인다는 뜻이었다.

    ‘설마 십삼황자가…….’

    이내 헌원가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열 언니는 곧 혼례를 올릴 예정이었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하지만 서열 언니는…….’

    권여아 역시 그 장면을 보았다. 그녀는 구염락이 비단 손수건을 꺼내든 것에 몹시 놀랐다. 그는 물건을 매우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었고, 귀한 비단으로 가치 없는 물건을 닦는 일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 일을 했다. 고작 찻잔 하나를 깨끗이 닦기 위해 귀하디귀한 손수건을 사용한 것이다.

    권여아는 서운한 마음에 갑자기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워졌다. 이제 어떠한 핑계로도 스스로를 설득할 수 없었다.

    “전하, 마침 오늘 태후마마께서 상으로 내리신 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서열 아가씨께서 맛보도록 올려 볼까요?”

    탁자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금용이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권여아의 기분이 나쁜 건 곧 금용을 기쁘게 하는 일이었다. 금용은 권여아가 더 이상 제자전에서 이래라저래라 안주인 행세를 하지 못하도록, 구염락에게 그녀가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전하께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은 서열 아가씨야!’

    그러나 금용의 말에 구염락은 안절부절 못하며 감히 장서열의 눈을 바라보지 못했다.

    장서열은 아무 느낌도 없었다. 그녀는 딱히 구염락의 옆자리에 앉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단지 권서함이 재차 겸손하게 양보하여 어쩔 수 없이 앉은 것뿐이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할 바도 아니었다. 천천히 채워지는 찻잔을 바라보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나는 차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깜짝 놀란 금용이 멈칫했다. 그 서슬에 차 한 방울이 장서열의 손에 튀었다. 장서열이 황급히 손을 움츠렸다. 물론 미지근한 차라 뜨거울 리 없었다.

    놀란 구염락이 즉시 그녀의 손을 잡고 샅샅이 훑어보았다.

    “대체 차를 어떻게 따르는 게냐! 쓸모없는 것, 이런 작은 일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누님,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놀란 금용이 황급히 바닥에 꿇어앉았다.

    “용서해 주세요, 전하! 노비가 잘못하여 서열 아가씨께 상처를 입혔습니다. 죽어 마땅한 죄를 지었습니다, 전하. 부디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 아가씨.”

    구염락이 금용을 향해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며 소리쳤다.

    “어디서 감히 용서를 구하느냐!”

    만정이 걱정스레 고개를 내밀었다. 장서열의 하얀 손등에 붉은 반점 하나가 떠올랐다.

    “언니, 많이 아파요? 흉터가 남으면 안 될 텐데요.”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이 걱정 어린 시선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구염락은 이미 약상자를 꺼내 약을 발라 주고 있었다.

    장서열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손을 거두려 했지만 그가 너무 센 힘으로 잡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다. 속으로 짜증이 났다.

    “괜찮아요. 살짝 놀랐을 뿐 하나도 안 아파요. 차도 뜨겁지 않았고요. 큰일이 아니니 일어나라고 하세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손을 거두려 했지만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구염락이 고개를 숙인 채 차갑게 말했다.

    “누님이 다친 건 큰일입니다. 본분을 다하지 못하는 자가 어떻게 궁에서 시중을 들 수 있겠습니까. 금용, 밖에 나가 꿇어앉거라. 궁으로 돌아가면 벌로 곤장 스무 대를 칠 것이다.”

    감히 항변하지 못한 금용이 이를 악물고 답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그녀의 눈에 차는 분명 한 방울도 튀지 않았다. 그저 탁자 위에 떨어졌을 뿐이었다. 어째서 자신의 잘못인지 알 수 없었던 금용은 억울했지만 눈물을 참으며 꿇어앉았다.

    그 모습을 장서열이 차분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금용의 눈 속에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

    “전하, 아직 어립니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니 저는 괜찮습니다. 미지근한 차 한 방울일 뿐이에요. 그만 두는 게 좋겠어요. 너무 매정한 처벌입니다.”

    장서열이 따뜻한 어조로 연민과 안타까움을 담아 말했다. 하지만 구염락은 매몰찼다.

    “잘못은 잘못입니다. 서열 누님께서 안타깝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오늘은 마음씨 고운 누님께 실수한 덕분에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지만, 만에 하나 황제 폐하나 황후마마께 실수를 저지른다면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는 일이 될 겁니다. 그러니 따끔한 교훈을 줘야죠.”

    “…….”

    “밖에 나가서 꿇어앉거라. 여기서 모두의 흥을 깨지 말고.”

    금용은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나 밖으로 향했다. 팔각정에서 나온 금용은 억울함에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잘못을 한 건지 알 수 없었다.

    소리자가 조용히 금용을 힐끗 바라보았으나, 이내 고개를 숙여야 했다. 그는 감히 금용을 위해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

    장서열도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구염락에게 잡힌 손이 너무 불편했지만 여전히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그가 만족할 때까지 손등에 연고를 바른 뒤에야 겨우 상황은 마무리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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