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그녀가 떠날까 두려웠던 구염락이 마음을 졸이는 사이, 소리자가 불현듯 한발 앞으로 나와 말했다.
“서열 아가씨, 잠시 앉았다 가시는 게 어떨는지요. 잠시 후 전하와 권 공자께서는 청산 춘방(春坊)으로 자리를 이동해 시문을 겨루실 겁니다. 아가씨들 모두 재주와 학식을 겸비하신 분들이니 함께 자리하시어 견문을 넓혀 주신다면 더욱 좋을 듯합니다.”
헌원가가 즉시 답했다.
“좋아요.”
그녀는 남동생이 더 많은 사람과 접촉하기를 바랐다. 그러다 권서함에게 인정이라도 받게 된다면 훗날 남동생의 벼슬길은 탄탄대로나 마찬가지였다.
헌원가가 의지가 타오르는 눈길로 권서함을 힐끗 바라보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헌원상을 권서함에게 보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남동생이 그의 의젓하고 기품 있는 태도를 배울 수만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우리도 마침 춘방에 가보려던 참이었어요. 그렇죠, 언니?”
헌원가가 장서열을 향해 열심히 눈짓을 보냈다. 그 모습에 몹시 화가 난 당자의 얼굴이 잿빛이 되었다.
“헌원가, 네가 언제부터 그런 이상한 것들을 좋아했지? 어디 아파?”
당자의 말에 헌원가가 반박했다.
“여인의 이름을 그렇게 함부로 불러도 되는 거야? 계속 그러면 날 좋아하는 것으로 알겠어.”
“우습군. 권 공자가 서열이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는데, 그렇다면 권 공자도 서열이를 좋아하는 거야?”
말을 마친 당자가 갑자기 다급히 자신의 입을 때렸다.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세자에게 이르는 사람은 소인배야!”
권서함이 쓴웃음을 지었다. 당자의 교양에 박수를 쳐야 할 지경이었다.
오라버니를 쳐다본 권여아는 그의 안색에 변화가 없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위험했다. 장서열을 대하는 오라버니의 태도는 확실히 평소와 달랐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서신을 보내 하루빨리 오라버니의 혼처를 정하자고 압력을 넣자 다짐했다.
구염락이 긴장한 눈길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두통이 더욱 심해진 장서열이 어쩔 수 없다는 듯 당자에게 입을 열었다.
“헛소리 마. 사실 우리는 춘방에 가기로 돼 있었어.”
차마 헌원가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러나 장서열은 여전히 구염락의 두 여인과 함께 하는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자기도 모르게 금용을 익사시켜 버릴까 봐 두려웠다.
앞으로 나선 헌원가가 눈치껏 말했다.
“말은 저녁에 타면 어때요?”
헌원가가 장서열을 향해 계속해 눈을 깜빡이며 자꾸만 자신의 남동생을 그녀 쪽으로 내밀었다.
‘내 남동생의 장래는 언니에게 달렸어요.’
장서열의 시선이 사람들의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좋아. 말은 저녁에 타자.”
말을 마친 그녀가 누구도 이해하지 못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아득한 표정이었다.
‘금용, 오랜만이구나.’
한편 당자는 풀이 죽었다. 이곳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란 기대가 조각나고 있었다.
“서열 누님, 시는 포기해요. 어차피 시가 누님을 싫어해요. 그냥 사람들은 춘방에 가라고 하고 우리는 말을 타러 가자니까요. 말 타기 시합 한 번을 못하다니, 누님의 기마술이 아까워요.”
헌원가가 즉시 반대했다.
“서열 언니의 학식이 얼마나 뛰어난데. 시를 짓지 않으면 그간 배운 언니의 학문이 아까워.”
“헛소리 그만해. 서열이는 주 대학사의 시간만 되면 항상 눈을 감고 있었어. 못 믿겠으면 십삼황자께 물어봐.”
장서열의 옆에 선 구염락이 웃음을 머금고 답했다.
“서열 누님은 천성적으로 총명해 수업을 듣지 않아도 뛰어났다.”
“들었지? 수업 안 들었다잖아. 넌 알지도 못하면서 서열이의 학식이 뛰어나다고 말하는구나.”
당자가 핀잔했지만 만정이 즉시 반박했다.
“아니. 서열 언니의 학식은 스승님의 딸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뛰어나. 언니가 떠벌리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 다들 모르는 것뿐이라고.”
당자는 장서열의 학문이 기마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절대 인정할 수 없었다.
“아니! 서열이는 말을 타기 위해 태어났어. 말을 타고 벌판을 질주하며 천하를 호령해야 한다고!”
“무슨 소리야! 서열 언니는 여자야!”
헌원가가 의미심장하게 당자를 향해 말했다.
“너, 혹시라도 또 내 이름을 부르면 정말로 이 몸을 좋아하는 것으로 알겠어.”
헌원가는 확실히 안목이 남다른 것 같았다. 당자는 기본적으로 여인에게 잘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아내만큼은 끔찍하게 아낀 사람이었다. 당연히 현천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장서열은 격려를 아끼지 않는 시선으로 헌원가를 바라보았다.
한편, 권여아는 계속해 놀라는 중이었다. 헌원가는 여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바꿔 놓고 있었다.
‘여인이 사내에게 어쩜 저렇게 호감을 표할 수 있지? 명성에 해가 될 텐데?’
구염락의 표정은 점차 누그러졌다. 그는 모처럼 편안하고 따스한 기분을 느꼈다. 그는 헌원가를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서열 누님과 친분이 있다면 분명 특별한 구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결코 헌원가의 말이 틀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헌원가는 헌원 씨 가문의 적장녀로 아버지에 의해 사내아이처럼 길러졌다. 헌원상이 없었던 시절, 헌원오마는 데릴사위를 맞아들일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덕분에 헌원가의 성격은 사내 못지않게 용맹했고 기마에도 스스럼이 없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지난 번 낙마 사고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사내아이처럼 자란 탓에 친구가 적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낙마 사건이 있은 후 헌원가는 자신을 구해준 장서열과 가까워졌고, 그녀가 자신의 성격을 개의치 않아 하자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만정은 발을 동동 구르며 비장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그뿐만이 아니야. 서열 언니의 금 연주 솜씨는 천하제일이라고! 못 믿겠으면 가 언니에게 물어봐!”
헌원가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여운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연주를 해.”
그 말에 권서함이 귀를 쫑긋 세웠다.
쓴웃음을 짓던 장서열은 살짝 움직이는 금용의 치맛자락을 바라보았다. 금용은 늘 그렇듯 오래 서 있지 못했다. 과거 남소원에서 무릎을 다친 금용은 전생에서 장서열에게 문안인사를 할 때에도 무릎을 꿇지 않았다. 오래 꿇어앉아 있으면 반드시 병이 났고, 병이 나면 반드시 그녀를 괴롭히는 게 수순이었다. 그럴 때면 금용은 마치 그녀가 일부러 벌을 내리기라도 한 것처럼 생떼를 부렸다.
그때, 침묵을 지키고 있던 권여아가 입을 열었다.
“장 씨 아가씨의 금 솜씨가 일품이라는 소문을 들었어요. 적수가 없다고 하던데, 제게도 연주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어요?”
권서함이 말했다.
“모두들 괜찮으시다면 여기 서 있을 게 아니라 안으로 드셔서 천천히 이야기를 나누시지요.”
그 말에 구염락이 입을 열었다.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잠시 들어가 있는 게 좋겠군.”
“자, 이쪽으로 오시지요.”
어깨를 으쓱해 보인 당자가 고개를 떨궜다. 모든 희망이 사라져 버렸다.
구염락은 당연한 듯 가만히 선 채 장서열이 발걸음을 내딛기만 기다렸다. 덕분에 구염락의 뒤에 선 권여아 역시 걸음을 뗄 수가 없었다. 당자는 자연스레 장서열의 뒤에 섰다.
헌원가는 먼저 들어가고 싶었지만 황자가 멈춰 있었으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이는 권서함도 마찬가지였다. 구염락과 몇 걸음 떨어져 뒤따르려 했던 그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자 가만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장서열이 무심한 표정으로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당연히 구염락이 먼저 발걸음을 떼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어색한 상황이었다. 구염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은 채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가만히 구염락을 마주보던 그녀는 문득 스치듯 권여아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구염락, 네가 총애하는 후궁 앞에서 왜 날 쳐다보는 거지?’
그러다 불현듯 무언가를 깨달은 장서열이 다시 구염락의 두 눈을 마주보았다. 그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설마 그동안 잘해 준 공이 이제야 빛을 발하는 건가? 드디어 네게 존중 받게 된 거야?’
순간 장서열의 마음속에 기쁨이 차올랐다. 바라던 황금 열쇠가 드디어 손안에 들어온 것이다. 구염락이 이처럼 자신을 높이 사고 존중한다면 이제 금용과 헌원상, 그리고 주소유를 제거하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헌원상을 손봐주는 건 조금 기다리자.’
어차피 그녀의 사위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며, 헌원상은 어린아이였다.
장서열이 씁쓸한 첫걸음을 내딛었다. 그러자 구염락이 자연스레 그 뒤를 따르며 평온하게 입을 열었다.
“서열 누님, 요즘 몸은 좀 어떤가요? 불편한 곳은 없어요? 지난번 물에 빠진 뒤로 다시 열이 나지는 않았고요?”
장서열이 구염락의 곁에서 나란히 발맞추며 말했다.
“열셋째 전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조금 놀랐을 뿐, 이미 다 나았습니다. 전하께서는 요즘 매우 바쁘시지요? 바쁜 와중에 모처럼 쉬러 오셨으니 많이 걸으세요. 아직 어리시니 건강에 주의하셔야죠.”
웃음을 터뜨린 구염락이 문득 장서열의 귓가에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나는 요즘 무량대사(無量大師)에게 무예를 전수받고 있어요. 무량대사 알죠?”
장서열이 구염락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고 말했다.
“모르겠는데요?”
무량대사는 몰라도 귀자 사태(師太, 비구니)라면 알고 있었다. 그녀는 구염락의 친모였다.
구염락이 얼른 덧붙여 설명했다.
“그는 국사(國寺,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찰)의 주지예요. 기 수련과 호흡법의 대가죠.”
애석하게도 그는 그것을 다른 용도로 쓰고 있었다.
“그런가요.”
호흡을 가다듬고 기를 단련하면 건강에 좋다는 말인 듯했다. 문득 장서열이 그를 바라보았다. 확실히 구염락은 몇 년 전보다 많이 건강해 보였고 키도 훤칠했다. 그녀 역시 키가 큰 편이었지만 그의 턱은 어느새 그녀의 머리 위에 올라와 있었다. 게다가 그의 얼굴은 이미 윤곽이 뚜렷해져 훗날의 모습과 거의 흡사했다.
“누님도 배워볼래요? 제가 국사에 동행할게요.”
“됐어요. 거긴 모두 스님뿐이잖아요.”
남자 사부를 모시는 건 곤란했다. 구염락은 그제야 자신이 바보 같은 제의를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럼 함께 암자에 가요. 국암사(國庵寺)의 여승 역시 기를 수련하는 데 조예가 깊다고 들었어요.”
장서열이 불현듯 물었다.
“국암사에 가 보셨어요?”
그곳에는 구염락의 친모인 훗날의 귀자태후가 있었다. 그곳에 들렀다는 건 곧 구염락이 친모와 재회했다는 걸 의미했다.
‘두 사람이 벌써 결탁한 걸까?’
구염락은 문득 말실수를 했음을 깨달았다. 그들의 뒤에 권 씨 가문의 자제가 뒤따르고 있었다. 구염락이 평이하게 말을 이었다.
“황후마마를 대신해 불전에 향을 바치러 간 적이 있어요. 누님은 가본 적이 없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