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봤어? 이게 바로 한림(翰林)에서 일하는 인재의 수준이야. 말로는 당할 수가 없는데 이런 남자와 평생 함께 살면 얼마나 재미가 없겠냐. 그냥 단념하고, 지루하게 책 읽기나 좋아하는 여인들에게 양보해라.”
권서함은 몸 둘 바를 몰랐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듯 장서열을 향해 웃어 보였다. 장서열도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자의 입방정은 고질병이었다.
만정은 부끄럽고 화가 났다. 나이를 먹고도 아직도 헛소리를 지껄이고 다니다니.
“입 좀 다물어!”
하지만 당자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뭘? 없는 소리를 한 것도 아니잖아. 됐다, 그만하고 가자. 물 위에 떠있는 건 이제 너무 지루해. 서열, 이 도련님과 말타기 시합 한 판 어때?”
입술을 삐죽 내민 만정이 말했다.
“누가 너랑 말 타겠대? 너나 가!”
장서열이 위로하듯 만정의 손을 잡았다. 사실 그녀는 말을 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내게 져서 망신당할까 걱정도 안 돼?”
“이 몸이 널 무서워할 것 같아? 가자, 어서!”
당자가 재빨리 유람선으로 건너갔다.
“어서 타. 어차피 저쪽은 곧 있으면 글재주나 뽐내러 갈 거야. 따분해 죽겠어.”
만정이 발을 동동 구르며 장서열을 끌어당겼다.
“가고 싶으면 너 혼자 가. 다들 여기 있는 거 안 보여?”
헌원상은 얌전히 누이 뒤에 서 있었다. 평소처럼 위축된 모습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대담하지도 않은, 착하고 온순한 모습이었다.
구염락이 다가왔다.
“그래. 모처럼 만났으니 이 열셋째가 누님께 주인의 도리로 성심껏 대접할 기회를 줘야지.”
“여기가 제자전도 아닌데 어째서 주인의 도리로 대접을 하신다는 겁니까?”
만정은 다가오는 구염락을 바라보다가 멈칫하며 장서열의 옷자락을 그러쥐었다. 문득 그의 뒤에 선 권여아의 등장 때문이었다. 다시 한번 입술을 삐죽 내민 그녀가 토라진 사람처럼 수면 위로 시선을 던졌다.
만정의 태도에 고개를 돌리던 장서열은 때마침 권여아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권여아의 눈에 놀란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한눈에 저 여인이 장서열임을 확신했다. 붉은 옷을 저토록 아름답게 소화할 수 있다니……. 그녀는 마치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형 같았다. 누구든 저렇게 매혹적인 여인에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권여아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구염락과 그녀가 얽힌 일은 이미 지나간 과거였다. 또한 구염락은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더는 자신에게 어떠한 상처도 줄 수 없으리라.
권여아는 담담한 얼굴로 장서열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바르고 여유로웠지만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장서열은 태연한 미소로 답한 뒤 예의 바르게 시선을 돌렸다. 즉시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만정이 꾹 붙들고 있어 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배 위에 들러붙어 내려오지 않는 당자를 향해 말했다.
“당 공자, 대체 글재주가 얼마나 형편없기에 그렇게 안달이신가요?”
“몰라, 얼른 가자! 여기는 정말 볼 것도 없고 지루해. 아주 진절머리가 나.”
권여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자신의 제안으로 오게 된 나들이였다. 그녀는 당자가 일부러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일까 생각했다.
권서함이 언제나처럼 빙그레 웃으며 누이동생의 곁에 섰다. 그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마. 그의 말에 화를 내면 끝도 없어.”
권여아가 입술을 삐죽이며 웃음을 터뜨렸다.
“무슨 말씀이세요, 오라버니. 제가 언제 화를 냈다고요.”
말을 하는 권여아의 시선이 자기도 모르게 장서열에게로 향했다. 금용은 몰래 장서열을 쳐다보다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워져 있었다.
당자가 장서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리 와. 가자.”
그러나 만정은 장서열이 떠나지 못하도록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고 자신을 대신해 분풀이를 해 달라는 듯 권여아 쪽으로 무언의 눈짓을 던졌다.
‘대체 저 애는 왜 구염락 뒤에 서 있는 거야!’
당자가 만정의 속도 모르고 짜증스레 고함쳤다.
“만정! 너 대체 왜 그래? 정말 권서함에게 반하기라도 한 거야?”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만정이 화가 나서 발을 굴렀다.
“너야말로 권 공자에게 반한 거 아냐? 놀기나 좋아하지 예의범절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주제에!”
하필 구염락 앞에서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고 말하다니. 만정은 창피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서열 언니, 당자 말하는 것 좀 봐요.”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오히려 장서열을 난감하게 하는 건 만정이었다. 그렇다고 구염락에게 달려가 권여아를 밀어버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사실 장서열에게 권여아는 불쌍한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자신의 눈 밖에 난 사람 중 멀쩡한 최후를 맞이한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녀는 권여아를 마주보는 것조차 미안할 지경이었다.
“언니…….”
장서열은 당장이라도 달아나고 싶었지만 만정은 허락하지 않았다. 장서열이 고개를 저으며 낮은 목소리로 위로했다.
“일단 가자. 배에서 다시 얘기해.”
“싫어요.”
만정이 애교를 부렸다. 그녀에게는 구염락과의 친분도, 그녀를 아껴주는 서열 언니도 있었다. 만약 장서열이 자신을 위해 힘써 준다면 구염락은 분명 그에 응할 것이다. 만정은 반드시 이곳에 남아야 했다. 저 여자가 더는 구염락에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장서열은 무척 난감했다. 상대는 권여아였다. 전생에서 그녀의 손에 억울하게 죽어 간 사람. 죄책감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자신에게 핍박 받아 죽은 이를 다시 보는 건 거북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중요한 건, 당시 자신과 구염락 사이 불화의 서막을 열었던 권여아의 죽음을 굳이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장서열은 아직도 구염락이 자신을 압박하며 던졌던 숨 막히는 질문들을 기억했다. 그는 장서열에게 대체 무슨 자격으로 자신의 여인를 처단했느냐 물었다. 죽을 고비를 넘기던 시절 자신에게 밥 한 톨 나눠 주지 않은 주제에 양심이란 게 있냐고, 살아남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아냐며 그녀를 몰아붙였었다.
권여아가 죽은 뒤, 구염락은 성대하게 장례를 치르고 작위를 내렸다. 만백성 앞에서 대놓고 따귀만 때리지 않았을 뿐, 장서열의 체면을 철저히 짓밟은 행위였다.
그리고 그녀는 바보처럼 화만 냈다. 당시 그녀는 자기 연민에 빠져 황후의 체면을 짓밟은 구염락을 원망하기에 바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비극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는 어려운 시절 구염락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여인을 죽였다.
그가 그대로 자신을 죽이지 않은 건 마지막까지 이성의 끈을 놓지 않은 결과이리라.
그리고 지금, 장서열은 전생과 같은 굴욕을 반복할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권여아는 정말 괜찮은 여자였다. 조금 거만하긴 해도 최소한 남을 속이는 술수 따위는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만정이 그녀와 가까워질 수만 있다면 금용을 처단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장서열은 만정이 절대로 자기처럼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랐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가진 권비(權妃, 전생의 권여아)를 적수로 두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진짜 적은 구염락의 뒤에 선 어린 시녀였다.
“정아, 내가 보기엔 말을 타는 것도 좋은 생각인 것 같아.”
기회를 엿보던 장서열은 자신의 배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움직였으나, 동작이 빠르고 민첩한 만정이 재빨리 그녀를 붙잡았다. 장서열의 팔을 가슴에 꼭 껴안은 만정이 달달한 미소를 지었다.
“어림없어요, 언니.”
결국 참지 못하고 배에서 내린 당자가 짐짓 만정을 위협하는 행동을 취했다. 자신을 가로막은 자는 여자라도 벌을 받아야 했다.
장서열이 빠르게 당자를 저지했다. 비록 그가 진심으로 손을 쓰지는 않았다 해도 만정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한 동작이었다. 이를 본 헌원가가 박장대소했다.
“당자, 넌 정말 재밌는 사람이구나. 만정처럼 연약한 미인을 상대로 싸우려 들다니.”
화가 난 만정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당자 앞에 섰다. 이제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당자, 가만 안 둬!”
만정이 자신을 걷어차려 하자 당자가 만정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기려 했다.
“어디 할 수 있음 덤벼 보시지!”
“닥쳐!”
하필 만정은 장서열의 뒤에 서 있었다. 장서열은 정신이 사나워 견딜 수가 없었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정신없이 다투는 두 사람을 향해 결국 그녀가 크게 고함을 쳤다.
“그만해!”
장서열이 어지러운 표정으로 한 차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머리를 매만졌다.
헌원가는 한쪽에서 입을 가리고 웃고 있었다. 당자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보아 그녀는 굳이 그를 좋아하는 마음을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녀는 다정하고 여성스러운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다. 물론 아내를 때리는 남자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자는 그런 남자가 아니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원칙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었다.
제자리에 멈춰 선 만정과 당자는 더는 서로에게 덤벼들지 못했다. 장서열의 손목을 붙잡은 만정이 애원하는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열 언니…….”
그러자 당자가 장서열의 반대쪽 팔을 잡고 흔들며, 만정보다 한층 더 애교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열 누님…….”
만정이 당자를 노려보았다. 장서열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알았다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헌원상, 역시 네가 화근이구나.’
헌원상은 갑자기 장서열이 왜 자신을 쳐다보는지 알 수 없어 두 눈을 깜빡였다.
살짝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권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그들을 쳐다보았다. 모두 귀족 가문의 자제들인데 어찌 저리 단정치 못하단 말인가.
“이건…….”
장서열이 침착하게 말했다.
“이런 걸 우정이라고 부르죠.”
그 말에 권서함이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초승달 모양으로 구부러진 눈에서 소년의 패기가 느껴졌다.
“하하, 정말 못하는 말이 없군요. 어쩐지 초혜전 친구들은 다들 하나같이 아가씨를 두 번 다시 보려 하지 않아요.”
놀란 권여아가 권서함을 쳐다보다 이내 다시 장서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권여아의 머릿속에 한 줄기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오라버니가 설마…….’
구염락은 장서열의 팔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좌우로 누군가 그녀의 팔목을 잡고 있는 모습이 무척 거슬렸다. 그녀의 곁은 언제나 그의 자리였다. 오직 자신의 것이었다.
장서열이 기회를 틈타 말했다.
“호수에선 더는 볼 게 없는 것 같아. 우리 차라리…….”
당자의 눈이 반짝 빛남과 동시에 만정이 얼른 장서열을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