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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09)화 (109/449)
  • 제109화

    권서함은 동요 없이 침착하게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여유롭던 권여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녀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오라버니와 구염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장서열이라고?’

    그녀에게는 상처나 다름없는 이름이었다. 누구도 자신의 앞에서 언급하지 않았고, 그녀 자신조차 줄곧 모르는 척 외면하고 살았던 여인을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러나 본래 권여아에게 관심이 없던 당자가 그녀의 심정을 알 턱이 없었다. 설령 알고 있었다 해도 마음에 두지 않았을 터였다. 질식할 것 같은 이곳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개의치 않았을 그였다.

    권서함은 위로하는 시선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그는 당시 벌어진 일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싶지 않았다. 동생과 서열 모두 잘못한 게 없었을 뿐더러 어차피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게다가 그는 장서열이 누이동생과 친해질 만한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기왕 마주쳤는데 한 번 만나보지 않겠느냐?”

    아랫입술을 꽉 깨문 권여아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은 슬픔에 젖은 얼굴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서열의 존재는 그녀에게 있어 오랜 악몽과도 같았다. 오라버니도 원망스러웠다. 오랜만에 궁 밖을 나온 자신을 즐겁게 해 주지는 못할망정, 악몽과 만나라고 하다니.

    “장서열! 이 몸 여기 있다!”

    당자가 풍부한 성량으로 우렁차게 외쳤다.

    구염락은 당장이라도 어딘가에 숨고픈 심정이었다. 이제 그와 권여아의 혼사는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거기에 서열 누님이 그가 권여아와 함께 뱃놀이를 하는 광경까지 본다면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당혹스러웠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부르는 당자의 들뜬 고함 소리가 들릴 때마다 그를 물에 처넣고 싶었다.

    ‘권여아를 보고 서열 누님이 언짢아하지는 않을까? 누님이 오해하면 어쩐다.’

    어지러운 그의 마음을 눈치챈 소리자가 주인에게 공손히 차를 따라 주며 무심한 듯 말했다.

    “이렇듯 화창한 날에 공자들과 함께 문회(文會, 문인(文人) 또는 문학(文學)을 애호(愛好)하는 사람들이 작품(作品)을 감상(鑑賞), 평가(評價)하거나 그밖의 행사(行事)를 하기 위()한 모임)를 거행한 것은 정말 시기적절한 선택이셨습니다, 전하.”

    소리자의 말에 구염락이 자세를 바로 했다. 그는 권여아와 뱃놀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권서함과 함께 문회(文會)에 온 것이다.

    장서열을 보러 가기 위해 구염락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 할 때였다.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있던 권서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달빛처럼 하얀 장포를 걸친 그는 침착하고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전하, 실례지만 제 누이동생을 잠시 돌봐 주시겠습니까? 소인, 오랫동안 서열 아가씨를 만나지 못했으니 가서 인사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충왕부의 연회 이후, 그는 집으로 돌아가 많은 곡을 모방해 보았다. 하지만 모두 엉터리였다. 그는 언제고 장서열을 만나 그날 금을 연주한 사람이 정녕 그녀가 맞는지,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번 연주를 들려줄 수 있는지 묻고 싶었다.

    다만 권서함은 구염락이 장서열을 피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으므로 그녀를 이쪽 배로 부를 생각은 없었다.

    구염락은 멀어지는 권서함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안 될 말이었다. 권여아를 여기에 둔다면 더 큰 오해를 살 것이다. 나가야 했다.

    그가 어두워진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를 지켜보던 권여아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권여아가 말했다.

    “그녀가 절 피할 필요는 없지요. 전 그렇게 나약한 사람이 아니에요. 생각해 보면 저와 그녀가 원수도 아니니, 이쪽으로 초대해 한 번 만나보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순간 구염락이 권여아를 쳐다보았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서열 누님이 너 때문에 자리를 피한다고? 어디에라도 숨어야 할 사람은 바로 너일 텐데.’

    구염락의 뒤에 서 있던 소리자와 금용이 권여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그들은 알고 있었다. 주인의 마음속에 장서열이 얼마나 커다란 존재인지를. 애초에 권여아는 장서열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고개를 숙인 금용이 경멸의 눈초리로 권여아를 쳐다보았다. 저 아가씨는 스스로를 아주 대단한 금지옥엽이라 여기는 듯했다. 하지만 장 씨 아가씨도 소문이 좋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금용은 그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려는 충왕부의 세자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구염락이 차분한 표정으로 권여아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함께 나가서 만나 보시겠습니까?”

    안 그러면 자신이 권여아를 강물에 밀어버릴지도 몰랐다. 잠시 생각하던 권여아가 기품 있는 모습으로 대답했다.

    “좋아요. 전에 그녀가 전하께 잘해 줬다고 들었어요. 제가 그녀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겠어요.”

    권여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그녀는 자신이 정말로 장서열에게 고마움을 전해야 할 입장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금용은 어이가 없었다.

    ‘자기가 전하의 어머니라도 되는 줄 알아? 아직 혼인한 것도 아닌데 어디서 주인 행세를 하는 거야?’

    소리자는 시종일관 머리를 숙인 채였다.

    배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유람선에 탄 네 사람은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갑판 위에 서 있었다. 만정이 입을 가리고 피식 웃었다.

    “당자, 손 그만 흔들어! 그러다 팔 떨어지겠다.”

    장서열도 함께 웃었다. 곧 권서함이 나오는 것을 본 장서열이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넨 뒤 당자를 바라보았다.

    “권 공자 곁에 있으면서도 조금도 점잖아지지 못했구나.”

    “당자가 점잖아지면 연경의 폭군 한 명이 사라지는 셈이니 많은 소녀들이 상심할 거예요.”

    헌원가가 웃으며 상대편의 배 위로 뛰어올랐다. 먼저 권서함을 향해 인사를 올린 그녀가 다시 당자를 바라보았다.

    “역시 서열 언니의 추측이 맞았어. 네가 혼자 배를 탔을 리 없지. 분명 권 공자에게 끌려온 걸 텐데, 무슨 바람이 분 거야? 이제 권 공자 밑에서 문관으로 커 볼 생각이야?”

    “헛소리. 말을 타고 세상을 누비는 이 몸께서 왜 그런 쓸모없는 걸 배우겠냐?”

    헌원가가 남동생을 부축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중앙에 정자가 놓인 배의 구조가 매우 특이했다.

    “권 공자 댁의 배는 과연 고상하고 멋지군요. 심지어…….”

    말을 끝맺지 못한 헌원가가 모퉁이를 돌아 나오는 사람을 확인하고 급히 허리를 굽혔다.

    “십삼황자를 뵈옵니다.”

    구염락이 나왔을 때 마침 장서열은 배에 오르는 중이었다. 해풍이 불어와 그녀의 붉은 옷자락을 휘날렸다. 물결에 반사된 그녀의 모습은 그야말로 눈이 부셨다. 어깨 위로 길게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이따금씩 뺨을 스칠 때마다 그녀는 손을 뻗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구염락은 걸음을 옮기는 것도 잊은 채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서열 누님…….’

    구염락의 뒤를 따르던 권여아는 갑자기 멈춰선 그를 보며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녀는 희미한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권여아는 구염락이 자신과 장서열의 만남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은 그토록 자상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구염단신의 낙마는 자신에게 그리 나쁜 일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배에 오른 장서열은 곧 저편에 선 구염락을 발견했다. 그녀가 반달 모양으로 눈을 휘어 보이며 조용히 미소 지었다.

    자기도 모르게 덩달아 따라 웃은 구염락은 장서열의 눈에 들기 위해 극도로 애를 썼다. 주변의 어떤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오로지 자신을 바라보던 장서열의 시선만이 남아 있었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권여아가 구염락을 살짝 밀었다. 생각보다 장서열이 그리 얄밉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현재 매우 평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구태여 장서열과 과거를 따질 필요는 없었다.

    “왜 가지 않으세요?”

    그 순간 구염락은 마법이 풀리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신이 돌아왔다. 그가 다시 장서열을 바라봤을 때, 그녀는 이미 시선을 돌려 권서함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는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 서열 누님은 자신의 아내로 내정된 여인 때문에 기분이 나쁜 걸까. 마치 자신이 서풍엽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권서함이 눈썹을 추켜세웠다. 과거 잔잔할 뿐이었던 소년의 얼굴에는 어느덧 멋스러움이 더해져 있었다. 장서열을 바라보며 그가 감탄한 듯 드물게 농담을 던졌다.

    “명불허전이로군요. 아가씨께서는 나날이 아름다워지십니다.”

    입을 가린 장서열이 싱긋 웃었다.

    “권 공자야말로 외모가 준수하고 훤칠하시니, 뜻을 이룬 소년이라 할 수 있지요.”

    “또 저를 추켜세워 주시는군요.”

    “그야 권 공자께서 정말로 그런 능력을 갖추신 분이기 때문이죠.”

    장서열과 권서함은 서로 마주보며 활짝 웃었다. 과거의 친분 덕분에 조금도 어색하지 않았다. 권서함이 친구처럼 말을 이었다.

    “경치를 구경하러 나왔나요?”

    “네.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고 심심해서요.”

    헌원상이 곁눈질로 권서함을 바라보았다. 장서열과 태연자약하게 담소를 나누는 모습에 부러움이 일었다.

    십삼황자에게 절을 하고난 뒤에도 오랫동안 일어나도 된다는 말을 듣지 못한 헌원가는 결국 알아서 허리를 폈다. 그녀는 넋이 나간 구염락을 바라본 뒤 허락 없이 일어난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재빨리 헌원상을 잡아당겼다.

    “상아, 어서 전하와 권 공자께 인사 올려야지.”

    “전하와 권 대인을 뵈옵니다.”

    권서함이 봄바람처럼 따사롭게 웃었다.

    “대인은 무슨. 헌원 공자만 괜찮다면 편하게 형님이라고 부르시지요.”

    헌원가는 혹여나 권서함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얼른 동생에게 그의 말을 따르라고 시켰다. 상대는 영원한 출셋길을 보장 받은 권 씨 가문의 적장자였다.

    구염락의 등장에 장서열 뒤로 몸을 숨긴 만정은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방금 전까지 활달했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저 멀리 서 있는 구염락을 향해 몸을 굽혀 인사를 한 것만으로도 부끄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당자가 의아한 시선으로 만정을 쳐다보았다.

    “너 괜찮아? 갑자기 이상해진 것 같은데. 어디 아파? 대체 뭘 봤기에 얼굴이 빨개져?”

    당자는 재빨리 사방을 둘러보았다. 딱히 눈에 띄는 사람이 없었다. 잠시 뒤, 그가 크게 소리쳤다.

    “너 설마 권 공자를 좋아하는 거야?”

    당자가 호들갑을 떨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내가 충고하는데 단념하는 게 좋을 거야. 꿈도 꾸지 마. 권 공자는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그는 시문에 능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그의 말에 권서함은 난감한 기색을 금치 못했다. 당자는 입단속이 안 되는 병을 영원히 고치지 못할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아가씨처럼 총명한 미인은 부족한 소인에게 과분합니다.”

    권서함의 말에 당자의 놀림이 한층 더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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