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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08)화 (108/449)
  • 제108화

    작은 상자를 든 헌원가가 시위들을 이끌고 기세 좋게 출발했다. 그러나 헌원가는 신중하게 행동했다. 헌원상을 데리고 나온 그녀는 마차가 번화가를 우회하도록 지시했다. 사람이 붐비지 않는 교외로 돌아가려는 것이었다.

    잠시 후, 그들은 만정과 만났다. 남색 옷을 차려 입은 만정은 하얗고 사랑스러운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열 언니, 절에 향을 피우러 가는 것도 아닌데 왜 그리 천천히 와요!”

    헌원가가 휘장을 걷고 말했다.

    “내 남동생을 데리고 가는 중이라 마차를 천천히 몰게 했어. 뭘 그리 크게 떠드니? 모르는 사람이 보면 네가 절을 아주 싫어하는 줄 알겠다.”

    만정이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언니!”

    거침없는 성격의 헌원가가 만정에게 눈짓을 한 뒤 걷었던 휘장을 내려놓았다. 잠시 후 마차가 다시 출발했다.

    청산 근교, 연경을 감싼 민심하(民心河)는 봄날을 즐기기에 더할 나위 없는 장소였다. 연경 부호들은 대부분 자신의 배를 이곳에 정박시켜 놓곤 했다.

    민심하는 본래 이름처럼 착한 강이 아니었다. 천성(天城)을 발원지로 한 이 강은 열일곱 개의 성을 거쳐 흘렀기에 물살이 셌다. 드넓고 수심이 깊어 연경에서 가장 큰 항구인 이곳은 화물선 수백 척을 수용할 수 있어 대주국에서도 손에 꼽히는 항구 중 하나였다. 그중 청산 부근의 호수는 수면이 잔잔하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한가롭고 부귀한 이들이 선호하는 장소였다.

    헌원상은 곧 이들을 따라온 것을 후회했다. 모두가 여자들일 뿐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어떤 연지의 향기가 짙은지, 어떤 꽃 비녀가 아름다운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다. 그는 배에 앉아 홀로 옥패를 가지고 놀았다. 강바람에 날린 비단 휘장만이 그의 얼굴을 간지럽혔다.

    이들이 탄 삼층 규모의 배는 조옥언의 유람선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뱃놀이를 즐기기 위해 장서열은 특별히 외숙에게 부탁해 배를 가져오게 했다. 대청처럼 넓은 배 안에서 아이들은 창문 너머 흐르는 강물과 각양각색의 배를 구경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헌원가는 남동생이 불편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그녀의 집에는 모두 여자 아이들뿐이었고, 평소 헌원상이 곁에 있다는 걸 딱히 의식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창가에 엎드려 해바라기씨를 까먹던 헌원가는 무심코 껍질을 강물에 버리다 문득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가 곧 웃으며 말했다.

    “서열 언니, 곧 혼례를 올린다면서요?”

    만정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돼! 언니는 겨우 열두 살이잖아요. 혼인이 아니라 정혼을 맺을 나이라고요!”

    손의 동작을 멈춘 헌원상도 고개를 들어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곧 올릴 것 같아. 나도 자세히는 모르겠어.”

    헌원가가 환호성을 터뜨리며 해바라기씨를 내팽개친 채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그럼 소문이 사실이었네요! 정말 뜻밖이에요. 전 언니 같은 절세미인은 연경의 모든 소년들을 다 미친 듯이 싸우게 만든 후에야 혼인할 줄 알았어요. 세자가 아주 복이 많네요. 물론 세자도 괜찮은 사람이죠.”

    말을 마친 헌원가가 다시 해바라기씨 몇 개를 집어 들었다.

    “저희 아버지는 뭐라고 하는지 아세요? 듣도 보도 못한 남자를 두고 제 신랑감이라더군요.”

    만정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누군데요?”

    헌원가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현천기. 혹시 들어 봤니? 그래도 난 호부상서의 적녀이고, 훗날 태자가 결정되면 수녀 선발에 들어도 무리가 없는 신분인데 어째서 그런 이름도 모르는 남자와 혼담이 오가는지 모르겠어. 초혜전에서 함께 공부한 자라고 하던데, 왜 난 전혀 모르겠지? 너무 맹하게 생겨서 존재감이 아예 없었던 것 같아.”

    헌원가는 말을 하며 다시 한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만정은 ‘태자’라는 단어에서 잠시 안색이 비정상적으로 붉어졌다.

    ‘헌원가가 현천기의 부인이 된다고?’

    장서열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전생에서 헌원가를 낭떠러지로 떨어뜨려 죽게 만든 사람이 바로 현천기였다. 만약 이 혼담이 현실이 된다면 그녀는 진정 현천기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서열은 현천기의 꿍꿍이가 무엇일지 가늠해 보았다. 만약 그가 중상을 입은 헌원가를 아내로 맞이한다면 호부상서 입장에서는 그에게 빚을 진 셈이 된다. 그렇다면 헌원 씨 가문은 아픈 딸을 데려간 그에게 무엇이든 아낌없이 보상해 주려 할 것이다. 혼사는 호부상서까지 손에 넣기 위한 현천기의 계략이었다.

    ‘장인이 사위에게 내내 미안하게 생각할 만한 게 무엇이 있을까……. 혹 낙마 사건으로 헌원가가 자식을 낳지 못한다면?’

    장서열은 속으로 경악했다. 그녀는 현천기가 정말로 원하는 게 아내인지 권세인지 알 수 없었다.

    ‘이리도 간악하게 살았으니 황후를 폐하자는 천인공노할 짓까지 서슴없이 했군.’

    헌원가가 의아한 얼굴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서열 언니, 왜 그래요? 안색이 안 좋아요.”

    “괜찮아.”

    그녀는 정말로 그들의 혼사가 이루어질까 봐 불안했다. 현천기처럼 악독한 자라면 혼례를 올린 뒤 곧바로 헌원가를 죽이고 또 다시 만만한 가문의 여인과 혼인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그는 이미 한 번 헌원가를 해친 자였다. 죽도록 두들겨 맞아도 모자란 주제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혼인을 청하러 오다니, 짐승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그러나 헌원가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저는 그런 혼인은 원치 않아요. 초혜전에서부터 저를 흠모했대요. 그 말을 믿는 멍청한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초혜전의 남자들은 모두 언니를 좋아했어요. 그 사람이라고 예외였을 리 없잖아요.”

    만정이 부끄러움 없이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한 분석이네요.”

    장서열은 현천기가 단 한 번도 자신을 좋아한 적이 없을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애초에 그의 마음속에 그런 감정이 존재하는지조차 의문이었다. 물론 그가 헌원가를 흠모했다는 말 역시 거짓이었다. 흠모하는 여인을 벼랑 아래로 미는 작자가 어디 있겠는가.

    장서열은 두 동생의 농담을 무시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남들이 좋아할 만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살기 위해 고개를 숙이고 구걸을 했다.

    장서열이 헌원가에게 말했다.

    “가야, 내 생각에는 너와 당자도 잘 어울릴 것 같아. 당자는 너처럼 무예를 연마하는 걸 좋아하니 두 사람이야말로 천생연분이 아닐까?”

    만정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요! 게다가 중요한 건 당자의 모친께서 연경에 없다는 거예요. 시어머니가 없으니 말을 타고 싶을 땐 말을 타고, 하고 싶은 게 있음 전부 누리면서 남편과 둘이 자유롭게 살 수 있잖아요.”

    말을 마친 만정이 짓궂게 웃었다. 하지만 헌원가는 웃음기 없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연경의 모든 귀족을 통틀어 그가 내게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

    곁에 시어머니가 없다면 언제든지 그녀는 친정에 돌아와 집안을 돌볼 수가 있었다. 또한 당 씨 가문이 지닌 병권이라면 사람들 앞에서 움츠러드는 어린 남동생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고, 출신을 운운하며 남동생의 출세를 방해하는 사람들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만정이 놀란 눈으로 헌원가를 바라보았다.

    “언니, 설마 당자의 그 고약한 성미를…….”

    하지만 곧 만정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하게 험담을 했다간 미래의 당 부인이 도망가 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헌원가도 풀이 죽어 말했다.

    “그래. 아쉽게도 그의 행동거지는… 뭐, 누구에게나 단점은 있는 법이니까.”

    한편, 호수 저편으로 그들이 탄 배보다 훨씬 큰 배 한 척이 들어왔다. 작은 정자는 연꽃으로 둘러싸인 배에 뒤덮여 마치 배 위에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정자에선 여러 사람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건장한 체구의 당자가 뱃머리 위에 서서 쉴 새 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그는 전방에 놓인 낯익은 유람선을 바라보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마침내 탄성을 내질렀다.

    “장서열! 장서전! 지금 배에 있는 게 누구야? 여기 좀 봐!”

    배 안에 있던 구염락의 손이 순간 멈칫했다. 창문 앞에서 풍경을 감상하는 권여아를 힐끗 쳐다본 그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그는 즉시 당자를 물에 빠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권서함 역시 놀랐다. 배에 있는 게 장서전일 리 없었다. 방금 전 궁에서 나올 때 근무를 서던 장서전을 보았던 것이다.

    당자는 채찍을 휘두르며 있는 힘껏 소리쳤다.

    “이봐! 여기를 봐!”

    익숙한 목소리에 세 사람은 모두 놀라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다. 바깥을 내다본 만정이 힘껏 채찍을 휘두르는 당자를 발견하고 놀라서 외쳤다.

    “진짜로 당자예요! 창피하게 왜 저리 소리를 지른담.”

    만정이 짜증을 내며 휘장을 내렸다. 당자와 마주치면 꼭 성가신 일이 생겼다.

    “저것 봐요. 사람들이 죄다 우리를 쳐다보잖아요.”

    그러나 밖을 내다본 헌원가는 흥분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녀가 말썽쟁이처럼 몸을 내민 후 춤을 추듯 손을 흔들었다.

    “여기예요! 우리도 봤어요!”

    이어 헌원가가 사공에게 배를 그쪽으로 가까이 대라고 지시했다.

    “당 씨 가문에 저렇게 큰 배가 있는 줄은 몰랐어.”

    헌원가의 말에 만정이 의아한 듯 동그란 눈을 크게 떴다. 가 언니는 당자가 부끄럽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창문의 휘장을 내린 장서열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만정을 향해 미소 지었다. 헌원가의 행동은 눈에 콩깍지가 씐 사람의 전형이었다.

    “당자의 배가 아닐 거야. 다른 사람과 함께 왔겠지.”

    당자라면 배를 타는 대신, 즉시 호수 근처에 있는 경마장으로 향했을 것이다.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한가하게 배를 타고 있을 성격이 아니니까요.”

    말은 마친 헌원가는 또 다시 상체를 내밀고 있는 힘껏 손을 흔들었다. 장서열은 활기 넘치는 그녀의 모습에서 다시 한번 현천기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자는 한 번이라도 다른 사람을 위해본 적이 있긴 할까?’

    헌원가를 발견한 당자의 목소리가 더욱 커졌다. 헌원가가 아니라 건장한 부인이 나왔다 해도 마다하지 않았을 그였다. 게다가 헌원가의 존재는 그 곁에 장서열이 있다는 걸 암시했다. 그는 승마술의 고수를 생각하자 절로 기운이 솟았다.

    그들의 배가 가까이 다가오자 당자는 서둘러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이야기들 나누고 계십시오. 저는 장서열과 헌원가를 만나러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당자가 날 듯이 뛰어나갔다. 글재주를 부리는 문인들에게서 드디어 벗어난 것이다. 그는 차라리 장서열 일행과 경마나 공차기를 할지언정, 더는 구염락이나 권서함과는 함께 있고 싶지 않았다.

    ‘역시 장서열이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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