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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07)화 (107/449)
  • 제107화

    현천기가 마차에서 내렸다. 회색 휘장을 걷자 평범한 표정에 특색 없는 얼굴이 드러났다. 튀지 않는 옷차림에 반듯이 상투를 틀어 올리고, 공손하게 배첩(拜帖, 남의 집에 방문할 때 가지고 가던 붉은 색의 명함)을 내밀고 있는 모습은 조그만 빈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에 반해 온몸을 붉은색으로 치장한 장서열은 마치 맹렬한 불길 속에서 홀로 살아남은 꽃송이처럼 눈이 부셨다.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집사가 재빠르게 다가왔다.

    “서열 아가씨,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저희 아가씨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현천기가 뜻밖이라는 듯 힐끗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그가 짜증스럽게 시선을 옮겼다.

    두어 걸음 걷던 장서열은 돌연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 현천기에게 다가갔다. 그와 한 걸음 거리에 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현 공자, 혹시 아는지 모르겠으나 그런 차림새는 지나치게 수수해서 오히려 더 눈에 띕니다. 고작 열두 살짜리 남자 아이가 그런 차림을 하는 건, 남들 눈에 당신이 가문에 먹칠을 하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지요.”

    말을 마친 장서열은 그를 향해 싱긋 웃어 보인 뒤 다시 기분 좋게 발걸음을 옮겼다.

    완정과 농교는 깜짝 놀랐다. 그들은 그제야 금방이라도 마차에 올라 숨어 버릴 것 같은 남자의 존재를 발견했다. 아가씨가 말을 걸지 않았다면 그곳에 사람이 서 있다는 사실도 몰랐을 것이다.

    집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는 마차를 보자마자 곧 현 씨 가문의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이는 그의 눈썰미가 좋아서가 아니라 마차의 모든 장식이 온통 그의 품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즉시 사람을 보내 소식을 알렸다.

    현천기가 매서운 눈으로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그는 오늘 헌원 씨 가문에 혼인을 청하러 온 것이기 때문에, 되도록 늦게까지 호부상서를 기다리며 성의를 표하고자 했다. 그런데 얄미운 장서열이 또 훼방을 놓은 것이다.

    현천기는 자신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오히려 눈에 띈다는 장서열의 말은 그를 몹시 불안하게 했다.

    한편, 기분이 무척 좋아진 장서열은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현천기는 자만심이 강했다. 그는 음흉하게도 언제나 꽁꽁 숨어 있다가 상대가 방심한 틈을 타 치명타를 입히는 자였다.

    ‘어디 오늘은 얼마나 잘 숨어있는지 보자.’

    헌원가가 재빨리 장서열을 맞이하러 나왔다. 시녀들을 거느린 노란 그림자가 쾌활하게 달려오며 꾀꼬리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언니, 드디어 오셨네요! 오랫동안 기다렸어요. 혹 제가 준비한 게 부족하지는 않은지 어서 와서 봐 주세요. 뱃놀이를 마친 뒤에는 말을 타러 갈까요?”

    헌원가의 용모는 평범했지만 또래에 비해 활달하고 생기 넘치는 모습이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구해 준 장서열을 무척 좋아했다.

    “어라? 상아, 어째서 여기 있니? 오늘은 스승님 댁에 안 갔어?”

    헌원가의 말에 장서열이 침착한 표정으로 헌원상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헌원상은 쑥스러운 듯 고개를 떨군 채 허리에 찬 옥패를 만지작댔다. 그는 차마 그들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헌원상의 태도에 헌원가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그녀가 곧 부드럽게 격려하듯 말했다.

    “상아, 스승님께서 이렇게 손님을 맞이하라고 가르치시던?”

    헌원상이 황급히 몸을 바로 하고 선 뒤 반듯하게 예를 갖춰 절했다.

    “서열 아가씨를 뵈옵니다.”

    헌원가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어. 앞으로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인사하도록 해. 그나저나 오늘 초대한 아가씨가 서열 아가씨인 것도 알고 똑똑한걸? 녀석, 갈수록 귀여워진다니까.”

    몸을 숙인 그녀가 헌원상의 작은 코를 꼬집었다.

    “하지만 오늘 왜 스승님 댁에 가지 않았는지 대답하지 않았어. 수업을 빼먹은 거니?”

    장서열의 눈치를 보며 헌원상이 빠르게 답했다.

    “아니에요! 스승님께서 오늘은 일이 있으니 오지 말라고 하셨어요.”

    그 뒤에 이어진 그의 목소리는 몹시 작았다. 다시 고개를 숙인 채 옥패만 만지작거리는 그의 말은 뒤죽박죽이었다.

    헌원가는 오늘따라 남동생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도 그녀의 친구들이 방문 했었지만 이토록 낯을 가린 적은 없었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장서열은 헌원가가 남동생을 몹시 아낀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녀는 외실이 낳은 자식이라며 남동생을 차별하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잘해 주고 있었다. 헌원가의 애정이 아니었다면 그는 후원에 들어올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장서열이 싱긋 웃으며 헌원상에게 말했다.

    “그동안 많이 컸구나. 마침 쉬는 날이면 이 누이들과 함께 놀러가는 건 어때?”

    고개를 번쩍 든 헌원상이 두 눈을 반짝이며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 그래도 돼요?”

    사실 그는 누이가 장서열을 초대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바삐 건너온 것이었다. 헌원가가 미안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래도 될까요? 상이는 아직 어려서 데려가면 돌봐 줘야 하는데, 혹시 방해가 되지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장서열이 앞으로 다가가 헌원가가 했던 것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럴 리가. 우리도 특별히 할 일은 없잖아. 데려가서 함께 경치 감상하자. 가고 싶니?”

    헌원상은 장서열의 손길이 어색해 피하고 싶었지만 감히 그러지 못했다. 그녀의 소매에서 한 줄기 향기가 전해졌으나 그녀가 손을 거두자 곧 사라졌다.

    “네, 가고 싶어요.”

    헌원가가 웃었다.

    “그럼 가서 옷 갈아입고 오렴. 그렇게 입고는 안 돼. 계절이 바뀐 지가 언젠데. 땀띠 날까 걱정도 안 되니? 어서 가. 늦게 오면 기다리지 않고 갈 거야.”

    헌원상이 후다닥 뛰어갔다. 복도 끝에서 그가 잊지 않고 소리쳤다.

    “빨리 갔다 올 테니 꼭 기다려야 해요!”

    헌원가가 웃음을 그치지 못하고 말했다.

    “얼른 갔다 오기나 해. 계속 떠들면 안 데려갈 거야!”

    남동생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헌원가가 말했다.

    “실례했어요. 예전에는 저렇게 낯을 가린 적이 없었는데 오늘따라 왜 그런지 모르겠네요. 어쩌면 언니가 너무 예뻐서 그런지도 모르죠.”

    헌원가가 장서열의 팔에 자신의 팔을 둘렀다.

    “가서 제가 준비한 것 좀 봐 주세요. 우리도 빨리 출발해야죠. 만정을 오래 기다리게 하면 안 되니까요.”

    헌원 씨 가문의 저택은 정자와 누각, 가산과 냇물이 모두 갖추어져 있는 대저택이었다. 저택에는 헌원가 이외에도 그녀의 서출 동생과 언니, 이랑(姨娘, 아버지의 첩)들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래서 후원은 온통 오색찬란한 의복과 옥처럼 고운 미인들로 가득했다. 그녀들은 헌원가를 보며 인사를 건넸는데, 말투에서 서로 사이가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헌원가가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의아한 눈길이었다.

    “언니는 왜 놀라지 않아요? 저들은 모두 이랑이지만 마치 친어머니처럼 제게 잘해 줘요. 이상하지 않아요?”

    장서열이 담담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서로 빼앗을 게 없다면 가능한 일이야. 이상할 게 뭐가 있니?”

    헌원가가 싱긋 웃으며 장서열의 팔에 더욱 달라붙었다.

    “언니는 참 묘한 사람이에요. 소문과 전혀 달라요.”

    장서열도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소문처럼 멍청하지 않아 실망했니?”

    “하하, 언니는 참 재밌어요. 사실 우리 가문에는 남자가 없고 모두 딸뿐이라 언니 말대로 서로 빼앗을 게 없어요. 딸 가진 어머니라면 응당 딸이 좋은 시댁을 만나길 바라죠. 그래서 이랑들은 하나같이 어머니의 비위를 맞추려고 해요.”

    “…….”

    “전 상이와 그의 친모를 미워하지 않아요. 그건 어머니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더군요. 그들은 어머니가 정실 자리를 빼앗길까 봐 두려워서 상이의 친모를 집에 들이지 않았다고 해요.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에요.”

    생기 넘치던 헌원가의 얼굴에 약간의 슬픔이 어렸다.

    “과거 집안에 아들이 없던 날들이 얼마나 암울했는지 언니는 모를 거예요. 아버지뿐만 아니라 저희도 초조했어요. 그러니 집안에 이렇게 많은 이랑들이 있는 거겠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태어나지 않았어요. 어렵사리 한 명이 태어났지만 곧 죽고 말았죠. 사람들은 아버지 팔자에 아들이 없는 모양이라고 수군거렸어요.”

    명예와 권력을 모두 지닌 호부상서에게 아들이 없다는 사실은 모든 집안사람들의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었다. 그때부터는 누가 낳은 자식이든 상관없었다. 누구라도 헌원오마에게 아들을 안겨주기만 한다면 가문에 큰 공을 세운 은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상이가 태어났어요. 그 아이가 없었다면 우리 가문은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래서 오히려 전 상이를 끔찍이 아껴요. 그건 곧 가문을 아끼는 것과 같으니까요. 전 소문처럼 상이를 미워할 이유가 없어요. 상이가 없었다면 가문의 미래도 없었겠죠. 저에게도 좋은 혼처가 들어오지 않을 테고요.”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원가는 현명했다. 헌원상은 헌원 씨 가문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고, 가문의 몰락을 막은 장본인이었다.

    “오늘 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래도 언니라면 제가 어머니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외실(外室)과 그의 아들을 거짓으로 좋아하는 척한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 같아서예요.”

    장서열은 헌원가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만약 가능했다면 헌원 부인은 자신의 자리라도 기꺼이 헌원상의 친모에게 내놓았을 것이다.

    헌원가가 승마복을 꺼내들며 살며시 말했다.

    “사실 아버지는 그 여인을 싫어하세요. 절대로 그녀를 저택에 들이지 못하게 하셨거든요. 어머니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아직도 바깥을 떠도는 신세였을 거예요. 언니, 저 이걸 입으면 어떨까요?”

    “난 붉은 색을 가져왔어.”

    헌원가가 즉시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언니도 참 고생이 많아요. 대체 어떤 원수 같은 작자가 본명년에 운수가 사납다 했을까요? 반드시 붉은색만 입어야 한다니요.”

    장서열이 한숨으로 동의를 표했다. 눈부신 봄날이 코앞에 있었지만 오로지 붉은 옷만 입어야 하는 성가신 나날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누님, 저 준비 다 했어요!”

    헌원상이 튀어나왔다. 희고 부드러운 얼굴은 이미 이목구비가 또렷해 비단옷이 몹시 잘 어울렸다.

    다만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참을 수 없게 한 것은 그의 목에 걸린 장명쇄(長命鎖, 자물쇠 모양의 목걸이로 악마의 침입을 막고 장수를 빌었다)였다. 이는 그를 더욱 어린아이처럼 보이게 했다.

    헌원상은 누이들이 왜 웃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옷차림이 칭찬받을 만큼 근사하다는 나름의 미적 철학을 갖고 있었다. 헌원상이 초조하게 물었다.

    “이상해요?”

    “안 이상해. 매우 보기 좋아.”

    헌원가에 이어 장서열도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보여.”

    헌원상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는 낮게 숙인 고개를 다시 들지 못했다.

    “어서 가요. 이번에 제가 새로 연마한 승마술을 보여 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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