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장서전은 부끄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어린 시절을 떠올리자 바보가 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구염락은 미래에 황제가 될 수도 있는 인물이었다. 만일 그가 과거의 일을 따지고 든다면 자신의 벼슬길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과거 아버지의 말을 엿듣고 철없이 굴었을 때, 아버지는 자신을 혼내기는커녕 오히려 잘했다고 칭찬했다. 아버지에게 아들의 장래 같은 건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아마… 아버지도 모르셨겠지.”
장서전은 차라리 아버지가 우매할지언정 자신에게 애정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단번에 그의 순진한 기대를 깨뜨렸다.
“그때 구염락은 아주 어렸어요. 그가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정말로 아버지가 몰랐을까요? 하마터면 오라버니는 황자를 죽인 대역 죄인이 될 뻔했어요. 아무리 총애 받지 못하는 황자였대도 누군가 트집을 잡으려고 마음먹었다면 아마 오라버니는 평생 감옥에서 썩었겠죠!”
장서전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친자였다. 자신이 무예를 갈고 닦느라 아무리 학문에 소홀했대도, 그리하여 아무리 아들이 불만스러웠다 해도, 그게 친아들을 해칠 이유는 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아니야. 난 아버지의 아들이고 적장자야. 가서 아버지께 물어보겠어. 지금 당장!”
그러나 눈앞에 놓인 건 진실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그간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었는지를 깨달았다.
장서열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오라버니를 붙잡았다. 그가 자신을 뿌리치지 못하도록 단단히 잡은 장서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마 우리가 아버지가 원했던 자식이 아니기 때문일 거예요.”
장서전은 문득 장서양을 떠올렸다.
“원했던 자식이 아니라니?”
장서열은 방금 자신들이 거쳐 온 곳 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버지는 저 곳도 싫어해요.”
그 말은 장서전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어머니를 싫어하다니? 그에게 어머니는 거의 완벽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런데 아버지가 어떻게 어질고 현명한 어머니를 싫어할 수 있단 말인가.
장서전은 갑자기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우뚝 멈췄다. 그는 장서열의 오라버니였기 때문에 어떤 일에서는 그녀보다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특별한 용무가 없을 때는 어머니의 처소에 들지 않는다는 것.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지금이라도, 실은 모든 게 거짓이라고 말해주기를 바랐다.
눈앞에 무더기로 핀 꽃들을 바라보는 장서열은 평온한 모습이었다. 가진 걸 모두 잃었을 때만큼 사람을 후회하게 만드는 건 없다. 다행히 아직은 시간이 있었다. 그녀와 오라버니는 함께 노력해야 했다. 장래에 좌상부가 무리 없이 오라버니의 것이 될 수 있도록.
“바람이 시원하네요.”
누이동생의 앳되고 평온한 얼굴을 의아한 시선으로 바라보던 장서전은 문득 자신이 너무 나약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대체 무얼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이동생이 이 모든 게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주는 것? 아니면 누이동생의 위로? 그것도 아니면 아버지가 스스로 뉘우치는 것?
하지만 그는 장래에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책임져야 할 유일한 적장자였다. 더 이상 바보처럼 진실을 부정하고, 아버지의 장점을 찾으려 노력하고, 누이동생과 어머니의 노고를 무시하며 제자리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오라버니, 이제 우리도 다 컸으니 부친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어요.”
장서전은 꽃밭에 서 있는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붉게 타는 저녁노을 속의 그녀는 퍽 강인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새삼 누이동생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아버지의 진실을 마주하고도 그녀는 평정을 유지하며, 어머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는 제멋대로였던 누이동생이 언제부터 화를 내지 않았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그녀는 아버지에게 찰싹 붙은 응석받이에서 벗어나 어머니를 화나게 하지도, 걸핏하면 어머니를 내버려두고 전원(前院)으로 도망가 버리지도 않았다.
장서전은 문득 누이동생이 일곱 살이 되던 해에 벌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서열이는 별안간 기 씨의 세 자녀에게 베풀었던 호의를 거두고 다시 그들을 원래의 자리로 쫓아냈다. 그때는 서열이가 성격대로 그저 작은 심술을 부린 것으로만 여겼다.
당시 누이동생은 얼마나 어렸던가. 제 기분조차 추스르지 못할 나이에 그녀는 행여나 오라비가 구염락을 괴롭히지는 않을까, 항상 걱정했었다. 혹시라도 그가 뛰쳐나가 구염락을 때리는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그녀는 매일 그를 꼭 붙들어 놓고 단속했다.
장서전은 자신에게 오라버니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보호해야 할 사람은 그였다. 이렇게 어리고 사랑스러운 누이동생에게 너무 일찍 세상의 추악한 면을 보게 해 버렸다.
‘이제 안심해. 앞으로는 네가 못난 오라버니를 걱정하지 않도록, 기필코 최선을 다해 구염락에게 잘 보일 테니까.’
장서전은 손을 뻗어 누이동생을 껴안은 후 미안한 속마음을 감추고 짐짓 짓궂게 말했다.
“서열아, 몸집이 좀 커졌구나.”
오라버니에게 기대어 있던 장서열은 순식간에 충격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녀가 곧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라버니… 지금 살이 찐 탓에 숨이 차서 씩씩거리는 거 알죠? 어느 절세미인이 이런 모습을 좋아하겠어요.”
장서열이 그를 마주 껴안았다.
‘고생 많았어요, 오라버니. 저 같은 누이동생을 둬서… 가장 억울한 건 오라버니예요.’
그녀는 전생에서 오래도록 느낄 수 없던 따뜻함을 느꼈다. 오라버니는 아직 어렸고 이제 그녀의 곁에 있었다.
“미안해요, 오라버니.”
내가 오라버니를 너무 고생 시켰어요.
뒷말을 삼킨 장서열은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 그녀가 혼인해 집을 떠나게 되면 아무도 오라버니를 돌봐 주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스스로 성장해야 했다. 더는 지금처럼 제멋대로 살지도, 이면에 숨겨진 위험을 눈치채지 못해서도 안 되었다.
장서전은 익숙한 뜰과 작은 시냇물을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간절하게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그는 반드시 가문을 일으켜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보호하리라 다짐했다.
“이제 그만 울어. 누가 보면 내가 울린 줄 알겠다. 그럼 어머니는 날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장서열이 고개를 들었다.
“오라버니…….”
장서전은 가슴이 철렁했다. 누이동생의 새하얀 얼굴에 눈물 자국이 나있었다. 평소 속없이 웃을 줄만 알던 동생이 슬픈 얼굴을 하자 그는 마음이 아팠다. 마음속에 이런 슬픔을 안고 있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서열아, 괜찮은 거야?”
“괜찮아요. 그냥 오라버니가 있으니 좋아서 그래요.”
오라버니를 껴안은 장서열은 생생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가 아직 생기 넘치는 청춘임을 실감했다. 모든 것이 다시 시작된 것만으로도 기뻤다.
“또 헛소리를 하는구나. 내가 잘해 주지 않으면 대체 누가 너에게 잘해 주겠어.”
이제껏 한 번도 거들떠본 적 없던 서출 녀석이 가문에 눈독을 들이고 있단 말에 장서전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장서양, 네가 감히 우리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고? 하지만 잊지 마라. 이 저택 역시 조국공부(趙國公府)에서 어머니께 내린 집이라는 사실을!’
“자, 이제 그만 울어. 계속 울면 못생겨지니까.”
“퍽이나요. 이 몸은 선천적으로 미모를 타고 났다고요.”
장서전은 하하 웃었다. 역시 누이동생은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 어울렸다.
그날 밤 장서전은 꼬박 밤을 새웠다. 비록 그는 학문에는 재능이 없었지만 무예로는 남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앞으로는 이전처럼 철없이 살 수 없었다. 부단히 노력해서 하루 빨리 높은 지위를 얻어야 했다.
다음 날, 아침 식사를 대충 끝낸 장서전은 난생 처음으로 날이 밝기도 전에 황궁으로 달려가 교대를 섰다. 쉬는 시간에는 동료들과 잡담하는 대신 따로 무예를 연마했다. 섭궁개는 장서전을 일컬어 천부적인 소질을 지녔으나 성격이 산만한 것이 단점이니, 부지런히 노력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우라 지시했다.
“장서전, 오늘은 일찍 왔구나.”
동료가 길을 지나며 말했다.
“해가 서쪽에서 떴냐? 웬일로 지각을 안 했어?”
퇴근하던 선배가 희한하다는 얼굴로 알은 체를 했다.
“서전 형님, 이제 슬슬 장가라도 가시게요? 어느 집 아가씨인데요? 현에서 떡을 파는 아가씨예요, 아니면 음식점을 하는 류 씨네 아가씨예요? 적당히 고르세요, 형님. 류 씨 집안 정도면 아주 괜찮아요. 상점을 무려 일곱 개나 갖고 있다고요.”
장서전이 적당히 동료의 말을 흘려듣고 연습에 매진할 때였다.
“장서전! 십삼황자께서 널 찾으신다!”
깜짝 놀란 장서전은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어제도 불러놓고 오늘도 또 찾는다고? 설마 정말로 나를 끝장내려는 건 아니겠지.’
동료이자 아우인 엄과(嚴過)가 흥분한 얼굴로 장서전을 쳐다보았다.
“서전 형님, 복 터지셨네요! 듣자하니 요즘 십삼황자께서 폐하의 명으로 친위대를 구하고 있대요. 형님, 잘되면 저희들도 소개해 주는 거 잊지 마세요. 저도 가고 싶어요.”
황자의 친위대에 들어가는 건 곧 출세를 의미했다.
“오해하지 마.”
급히 옷을 갈아입은 장서전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소리자를 따라 제자전으로 향했다. 구염락을 마주한 장서전은 역시 엄과의 추측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서열 누님께 물어봤느냐?”
상석에 앉은 구염락이 아래에 선 장서전을 바라보았다. 장서전은 순간 온몸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그는 조금 전 제자전 밖에서 십삼황자의 부름을 기다리는 수많은 관원들을 보았다. 십삼황자는 곧 업무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로 부른 이는 십삼황자의 일을 처리하지 못했다.
“소… 소인, 물어보는 걸 잊었습니다.”
장서전은 머리 위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을 견디며 거듭 고했다.
“오늘 집에 돌아가 반드시 물어보고 내일 아침 바로 전하께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를 힐끗 쳐다본 구염락이 곧 손을 흔들어 그를 물러가게 했다. 제자전을 나온 장서전은 손까지 떨고 있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뭘 무서워하는 거야! 그는 구염락이야. 어렸을 때 내가 수도 없이 쥐어 팼던 도적놈!’
그러나 그는 이제 옛날의 구염락이 아니었다.
* *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 했던가.
장서열은 헌원가의 초대를 받아 뱃놀이를 하러 온 참이었다. 그녀의 마차가 호부상서 헌원 씨 가문의 대문 앞에 멈췄을 때, 마침 현 씨 가문의 마차도 함께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