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4화
손에 든 향낭을 꽉 움켜쥔 구염락이 돌연 향낭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내게 선물로 줘.”
장서전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설마 구염락이 아직도 서열이에게 정을 품고 있는 건가? 하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향낭이 자기와 어울리지 않았다고 했는데.’
구염락은 어제 서풍엽에게 딸려 보낸 홍목 상자를 떠올리며 순간 스스로에게 화가 나는 걸 느꼈다. 그가 떠보듯 장서전에게 물었다.
“시간나면 서열 누님과 함께 들도록 해. 자리나 한번 같이 하지. 그녀가 몹시 보고 싶거든.”
그 말에 장서전은 속으로 깜짝 놀랐다. 그는 정말 아직도 누이동생을 마음에 두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훗날 정말로 구염락이 황제가 되는 날, 그는 누이동생에게 과거의 은혜를 보답하려 할지 모를 일이었다.
‘서열이에게 무슨 작위를 내려 줄까? 군주(郡主)? 현주(縣主)? 서열이는 이제 평생 걱정 없이 살겠구나!’
하지만 장서전은 곧바로 울상을 지었다.
“전하, 아무래도 누이동생은 그럴 시간이 없을 것 같습니다. 어제 저녁 세자가 찾아와 혼담을 꺼냈고 어머니께서도 승낙하셨습니다. 이제 누이동생은 혼사 준비로 외출이 어려울 겁니다.”
순간 구염락의 얼굴이 굳었다가 다시 풀어졌다.
“직접 신경 쓸 일은 많지 않겠지. 혼담이 오간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어차피 이미 다 준비해 놓았을 테니. 한 번 시간이 되는지 물어봐 줘.”
서풍엽의 일처리는 전과 다름없이 민첩했다. 안타깝게도 그가 이번에도 한발 늦은 듯했다.
구염락의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가벼운 표정으로 물었다.
“서열 누님은 이제 겨우 열두 살이라 장 부인께서도 딸을 혼인시키기에 너무 이르다고 생각하실 듯한데.”
장서전이 불만에 차서 말했다.
“누가 아니랍니까. 하지만 대체 어머니께서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서열이가 혼인하지 못할까 봐 두렵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였다면 충왕부고 뭐고 서열이가 열일곱 살이나 되어야 겨우 혼인을 생각했을 겁니다.”
“하하, 세자가 조급한가 보군.”
장서전도 즉시 따라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해본 말입니다, 전하. 세자에게는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온 소리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전하, 여아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이를 들은 장서전이 즉시 말했다.
“전하께 아룁니다. 소인은 당직 근무가 있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구염락이 손을 흔들며 허락했다.
“내 말 잊지 말고 물어봐 주게.”
“예.”
고개를 숙인 장서전이 자리에서 물러났다. 입구를 지날 때쯤 자줏빛 그림자 하나가 눈 깜짝할 사이 그의 앞을 스쳐 지나갔다. 장서전은 아주 멀리까지 물러난 뒤에야 비로소 허리를 편 채 공기에 남은 옅은 향기를 맡았다.
“권 씨 가문의 아가씨가 다 컸구나. 사람들이 기대한 대로 모란처럼 아름답게 자랐어.”
그러나 장서전은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안타깝게도 과거 태자와 혼인을 하려다 이제는 어린 도적놈에게 시집가야 할 처지에 놓여 있었다.
‘도도한 아가씨께서 어지간히 괴로우시겠군.’
행여나 속마음이 입 밖으로 새어나갈까 입을 가린 장서전이 진지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문틈 사이로 들어온 바람이 권여아의 자주색 비단옷을 살짝 휘날렸다. 그 모습은 선녀처럼 성스럽게 보였다. 인삼죽 한 그릇을 받쳐 든 방 마마가 그녀의 뒤를 따랐다.
권여아는 단정하고 온순했지만 태도만큼은 대범한 편이었다. 지난 이 년 동안 그녀는 십삼황자와 서로 사이좋게 지냈다고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황후는 십삼황자 외에도 여럿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그녀 역시 십삼황자와 그리 왕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일 년 사이 황후의 태도는 명확해졌고, 그녀는 황후의 명을 받들어 여러 가지 물품을 전해 주기 위해 자주 그를 만나러 왔다. 그 의미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권여아가 희고 매끈한 손으로 구염락에게 직접 죽을 덜어 주었다.
“식사는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인삼죽이 잘 되어 한 그릇 가져왔으니 따뜻할 때 들어 보시지요.”
구염락이 공손한 태도로 답했다.
“아가씨께서 친히 덜어 주시다니 황송합니다.”
“황송하다니요. 모두 같은 사람일 뿐인 걸요.”
구염락이 의외라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권여아는 마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사람처럼 이어 말했다.
“어서 입에 맞는지 드셔 보세요.”
구염락이 인삼죽을 들여다보며 보기 좋은 얼굴로 살짝 그릇을 흔든 뒤 무심하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직접 덜어 준 죽인데 어찌 맛이 없겠습니까.”
권여아는 잠시 멈칫했다. 그녀는 그가 가끔씩 속내와 다른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태연자약한 얼굴로 엷은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이제 농담을 다 하시네요.”
“아가씨께서 붙임성이 있으니까요.”
구염락이 죽을 마시는 사이 방 마마는 권여아를 쿡쿡 찔러 그녀가 거만하게 굴지 못하도록 제지했다. 권여아의 안색이 일시에 붉어졌다가 다시 빠르게 본래의 모습을 회복했다. 그녀는 오늘 구염락을 찾아온 목적을 떠올리며 시름에 잠긴 사람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전 화를 내지 못해서 탈이에요. 성격이 너무 단조로워서 쉽게 재미없는 사람으로 보이죠. 그래서 사람들의 호감도 얻지 못해요.”
그녀는 아름다운 얼굴에 슬픔이 가득 묻어나는 애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구염락은 그대로 냉소를 터뜨릴 뻔했다.
‘시를 짓자고 억지로 시름에 젖는 꼴이군.(爲賦新詞强說愁, 남송시인 신기질의 시 《추노아.서박산도중벽》에 나오는 구절)’
“여인은 얌전한 것이 덕이지요. 그걸 몰라보는 사람이 있을 뿐입니다.”
말을 마친 그가 다시 죽을 한 모금 마셨다. 어차피 인삼은 물만 넣고 끓여도 맛있는 음식이었다.
권여아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속내를 들킨 것만 같아 창피함에 귀밑까지 붉어졌다.
“저… 전하께 웃음거리가 되었네요. 제가… 원망하는 게 아니라…….”
“압니다. 아가씨께서는 그 사람처럼 이기적인 사람이 아니시지요. 그는 언제나 자기 감정만을 앞세워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등한시했으니까요.”
순간 권여아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뜻밖에도 태자 자리에서 물러난 구염단신을 입에 올리고 있었다. 부정적인 태도였지만, 사실 구염락의 말은 틀린 것이 없었다.
실제로 구염단신은 한 번도 권여아의 기분에 주의를 기울인 적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어 했다. 덕분에 다섯 살에 궁에 들어와 황후를 섬겨야 했던 그녀가 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상한 눈초리를 받았는지도 전혀 관심이 없었다.
차라리 자신보다 잘난 사람에게 졌으면 수긍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외모밖에 볼 게 없는 장서열에게 졌다고 생각하니 분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태자가 다른 이의 미색에 홀린 것도 모두 자신이 많이 모자란 탓인 것만 같았다. 당시 그녀는 구염단신을 참으로 어리석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언제나 울분을 억누른 채 억지로 기쁜 표정을 지으며 황후를 위로해야 했다. 자신의 고통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었다. 과거를 떠올린 권여아가 창백해진 입술을 깨물었다.
구염락이 돌연 손을 뻗어 조용히 그녀의 손 위에 올려놓았다. 다정한 마음은 없었지만 담백한 위로의 손길이었다.
“아가씨는 꽤 괜찮은 규수예요. 나는 이제껏 아가씨처럼 온화하고 어진 여자는 본 적이 없어요. 단지 그가 너무 많은 것을 바란 탓에 중요한 사람을 등한시했던 것뿐입니다.”
구염락에게 구염단신은 감히 서열 누님의 충고를 무시한 자였다. 그렇기에 그는 스스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
권여아의 손을 잡은 구염락에게서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손에 잡은 것을 물건이라 여기는 듯했다. 권여아의 얼굴이 순간 붉게 달아올랐다.
“차 드세요, 아가씨.”
고개를 숙인 금용이 한발 뒤로 물러나며 권여아의 손을 잠시 쳐다보았다. 왠지 아니꼬웠다.
‘전하께서는 너 같은 여자를 좋아하지 않아. 거들먹거리며 잘난 체하고 안하무인으로 구는 그런 부류 말이야. 예전에 너희는 신분이 높다는 이유로 언제나 가장 좋은 물품을 빼앗아 갔지. 너희에게 아부하는 것들은 좋은 건 오로지 너희에게 갖다 바쳤고, 돼지도 안 먹을 음식이 남아야 겨우 우리에게 남겨 줬어.’
손을 거둔 권여아가 탁자 위에 놓인 차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온통 붉어진 얼굴로 말했다.
“아직 여인에 대한 말씀을 할 나이는 아니신 듯합니다. 전… 전 일이 있어 먼저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뒤에 남은 방 마마도 잊은 채 종종걸음으로 떠났다. 구염락은 다소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위로를 받으러 온 건가? 예전에는 저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전하, 차 드세요.”
금용이 얼른 앞으로 다가왔다. 권여아가 마시지 않아 다행이었다. 괜한 차를 낭비할 뻔했다.
“이건 봄에 딴 찻잎으로 끓인 좋은 차예요. 아가씨는 입맛에 맞지 않으신지 쳐다보지도 않으시네요.”
구염락이 무의식적으로 답했다.
“그녀는 이른 봄에 딴 찻잎으로 우린 건 좋아하지 않아.”
그 말에 금용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그런 가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상 위에 있는 죽은 너희에게 내리겠다.”
마음 속 씁쓸함을 억누른 금용이 귀신에 홀린 듯 입을 열었다.
“아가씨께서 친히 가져오신 건데, 전하께서 드시지 않으면 아가씨의 미움을 사는 것이 아닐까요?”
순간 구염락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훑었다. 놀란 금용이 서둘러 뜨거운 죽을 손에 받쳐 들었다.
“감… 감사합니다, 전하.”
그러나 금용은 기뻤다. 권여아가 가져온 죽을 하인에게 상으로 내릴 정도라면 그녀도 별반 대수로울 게 없었다.
“노비가 곧 전하의 오찬을 들여오겠습니다.”
금용은 자신을 대하는 구염락의 태도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전하는 언제나 그랬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에 쫓겨났을 것이다. 하지만 전하는 자신만큼은 특별하게 대해 줬다.
* * *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다. 떠나기 싫은 석양이 자연의 섭리에 짓눌려 눈부시게 아름다운 광채를 발하자 금빛 노을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관청을 나온 장신성은 서둘러 집에 돌아와 식사를 했다. 급변하는 조정의 정세는 그의 입지를 점점 좁히고 있었다. 그는 조옥언의 노여움을 사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야 했고, 예비 사위는 더더욱 귀인으로 대접했다.
그는 자신이 늙고 있음을 인정했다. 앞으로 부귀영화는 스스로 쟁취하기보다는 오로지 자녀에게 기대야만 얻어낼 수 있었다. 지난 며칠간 그는 기꺼이 딸과 함께 식사를 했다. 비록 황자와 혼인을 성사시키지 못해 몹시도 애석했지만 다행히 서풍엽도 괜찮은 사위였다. 그는 사위가 장인어른의 장래를 위해 힘써줄 것이라 굳게 믿었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장신성이 평소처럼 자애로운 얼굴로 딸 옆에 앉았다. 식사는 이미 차려져 있었다.
“서열이는 무엇이 먹고 싶으냐?”
음식을 먹을 때는 쓸데없는 말을 삼가야 하는 법. 장서열은 대답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