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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03)화 (103/449)
  • 제103화

    안개가 걷혔다. 새들이 소란을 피우는 활기찬 하루가 시작되었다. 호수의 수면 위로 버드나무 가지가 드리우자 오리가 발을 움직이며 몸을 뒤뚱거렸다. 궁 안의 모든 연못은 봄이 완연한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보잘 것 없는 궁방(宮房) 안, 업무를 교대하려는 시위가 일찍이 배치를 기다리고 있었다.

    “빨리해. 넌 오늘도 또 늦겠다. 검 챙겨야지, 옷도 제대로 입고. 빨리 와!”

    장서전은 일사천리로 준비를 마친 후 검을 들고 집합 장소에 도착했다.

    오늘은 그가 당직을 서는 날이었다. 금위군 갑옷을 걸친 그의 위풍당당한 자태에서 위엄이 느껴졌다. 순찰을 돌고 보초를 서는 그에게서는 한 치의 실수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집에서처럼 호들갑을 떨거나 사람 골머리를 앓게 만드는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두 줄로 나란히 곧게 선 금위군이 중문 대로를 지났다. 마침 구염락은 뭇 사람을 이끌고 전전(前殿)에서 나와 제자전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금실과 은실로 수놓아진 이무기 문양의 도포는 그의 강인하고 냉담한 면모를 유달리 돋보이게 만들었다. 어느덧 공무를 보기 시작한 그는 자유자재로 위엄과 결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앞장서서 걷는 그의 곁에서 관원이 몸을 숙인 채 무슨 말인가를 건넸다. 순간 구염락이 발걸음을 멈췄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서는 장서전과 시위들이 이미 군법에 맞게 예를 취하고 십삼황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구염락이 고개를 돌려 두 줄로 선 시위들 사이에서 정확하게 장서전을 응시했다.

    ‘그인가?’

    구염락이 소리자에게 조용히 무언가를 지시했다. 소리자가 황급히 뛰어가 몸을 굽힌 채 금위군 무리를 이끌던 대장에게 무어라 말을 건넸다. 그리고는 대열 안에 있는 장서전을 바라보았다.

    ‘왜 나를 쳐다보는 거야?’

    장서전은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는 감히 불만을 드러낼 수 없었다.

    금위군을 이끌던 대장은 더더욱 불만이 없었다. 십삼황자는 현재 떠오르는 태양이었다. 황제의 깊은 총애를 받고 있었고, 혼란스러운 시국에도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소문에 의하면 황제는 이미 십삼황자를 태자로 봉한다는 성지의 초안을 작성한 상태라고 했다. 아마도 그를 지지하는 건 황후뿐만이 아닐 것이다.

    “공공(公公)의 뜻대로 하십시오. 장서전, 앞으로 나오거라!”

    장서전은 스스로를 가리키며 소리 없이 경악했다.

    “저 말입니까?”

    “멍청히 서서 뭘 하는 게냐! 전하의 시간이 지체되고 있지 않나!”

    “네!”

    황급히 검을 내려놓은 장서전이 앞으로 나갔다. 가슴이 쉴 새 없이 두근거렸다. 어째서 그가 자신을 찾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최근에 그는 어떠한 물의도 일으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구염락과 마주친 적도 별로 없었다. 몇 번 잠깐 스쳐 지나간 정도였고, 그마저도 집에 돌아가 누이동생에게 털어놓으며 감회에 젖었던 게 전부였다.

    ‘십삼황자가 갑자기 왜 나를 부른 걸까? 내가 관심을 끌 만한 구석이 어디 있다고? 설마 과거의 일로 아예 결판을 내려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장서전이 생각하기에 구염락은 그렇게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 우뚝 솟은 중문 대로에서 급히 절을 올렸다.

    “십삼황자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십시오.”

    장서전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십삼황자가 과거의 일을 떠올릴까 두려웠다. 그는 금위군에서 제외되고 싶지 않았다. 과거에 자신은 어찌 그리 바보 같은 짓을 저질렀던 건가. 당시 누이동생이 자신을 타이르지 않았더라면 그는 지금 황궁에 발을 들이기는커녕 감히 장군의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장서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한 채 신중하게 행동했다. 지금 눈앞에 선 남자는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목숨 줄을 쥔 주인이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따라오거라. 할 말이 있다.”

    말을 마친 구염락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곁에 있던 이와 대화를 나누며 자리를 떠났다. 장서전은 감히 원망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는 차라리 십삼황자가 자신을 한 대 때려도 좋으니 그걸로 서로 빚진 게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제자전 밖에 선 장서전은 오전부터 정오가 될 때까지 계속해 구염락을 기다렸다. 작열하는 태양이 머리 위로 쏟아졌지만 그는 감히 땀 한 번 제대로 닦지 못했다. 이러다 목이 말라 죽겠다 싶을 무렵, 소리자가 그에게로 뛰어왔다.

    장서전은 구염락이 고의로 자신을 벌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제자전에 서 있던 오전 내내 그는 구염락이 매우 바쁘다는 걸 알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쉴 틈 없이 제자전을 오고 갔다. 모든 이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보아, 그의 상상처럼 황자는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은 것 같았다.

    소리자와 함께 대전에 들어간 장서전은 더욱 공손하게 굴었다.

    “내 장 시위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군.”

    장서전은 과분한 말에 놀라 급히 몸을 숙였다.

    “아닙니다. 나라와 민생을 위해 고생하시는 전하께서 이렇듯 시간을 내 소인을 만나 주시는 것만으로 큰 영광입니다.”

    “그래도 이리 오래도록 기다리게 하다니 정말 미안하네. 앉지.”

    “천만의 말씀입니다. 소인, 전하를 뵐 수 있어서 황송할 따름입니다.”

    말을 마친 장서전은 조용히 고개를 들다가 십삼황자의 탁자 위에 떡과 차 한 잔이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무래도 그는 쉬는 시간을 틈타 자신을 만나는 듯했다. 바쁜 와중에도 이토록 짬을 내어 자신을 만나려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구염락은 신기한 눈으로 장서전을 바라보았다. 과거 불같은 성미를 갖고 있던 장서전을 떠올린 그는 현재 금위군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장서전의 모습에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정말 못 알아보겠군.”

    장서전이 외가인 조국공부에 끌려가 교육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그는 외가에서 적지 않은 교훈을 얻은 것 같았다.

    “장 시위가 그렇게 말하니 참으로 적응이 되지 않아.”

    장서전은 긴장으로 두피가 다 저릴 지경이었다. 그 역시 구염락이 몰라보게 달라졌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단순히 달라졌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엄청난 변화였다.

    구염락은 의자에 기댄 채 조금은 앳된 목소리로 위엄 넘치던 모습을 덜어내며 말했다.

    “여러 해 동안 외지에 나가 있었다고 들었어. 덕분에 우리도 참 오랜만이군. 난 좀 그리웠거든.”

    장서전은 제대로 숨을 쉬지도 못했다. 그는 십삼황자에게 과거를 그리워할 만큼 좋은 기억이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 서열 누님은 내게 참 잘해 줬지. 자네도 앞으로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도록 해.”

    장서전은 약간 얼이 빠졌다. 십삼황자가 정말로 자신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일까. 하찮은 시위를 굳이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려는 이유가 뭘까. 하지만 그의 직속상관인 섭궁개조차도 십삼황자의 사람이었다.

    장서전은 영문 모를 시선으로 십삼황자를 쳐다보다 서둘러 눈을 돌렸다. 누이동생이 그에게 잘해 줬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십삼황자는 과거를 수치로 여겨 언급하는 것을 꺼린다고 했다. 도대체 어느 쪽이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생각해 보니 서열 누님과 함께 앉아 이야기를 나눈 지도 참 오래 됐어. 오늘 자네를 만나니 익숙한 향기가 나는군. 향이 짙고 쉽게 흩어지지 않지. 내 기억이 맞다면 그건 서열 누님이 가장 좋아하는 향료야. 절로 예전 일들이 떠오르는군.”

    구염락은 웃음을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예전에 누님은 내 뒤를 쫒아다니면서 그 향료를 몸에 지니게 했어. 지니지 않으면 눈 하나 깜작이지 않고 나를 노려봤지. 하루 종일을 말이야.”

    “…….”

    “마치 무슨 큰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 같았어. 그 향이 얼마나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지, 그 향낭이 남자아이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는 안중에도 없이 무조건 다 나를 위한 것이라는 태도였지. 결국 몸에 지닌 모습을 보여줘야만 기뻐했어.”

    장서전은 순간 동지를 만난 듯 공감하며 소리쳤다.

    “맞습니다! 정말 보기 흉하지요. 분홍색인데다, 또 그 향기는 어떻습니까. 저는 궁에 들어오면 우선 향낭부터 풀어서 저 멀리 처박아 둡니다.”

    말을 마친 장서전은 순간 생각 없이 함부로 지껄인 스스로를 속으로 꾸짖었다. 구염락은 그의 무례를 조금도 알아채지 못한 것처럼 웃으며 말했다.

    “그건 정말 나를 위한 거였어. 나중에 알게 됐거든. 그 향료에는 모기를 쫓는 효과가 있어서 오래 지니고 있으면 나중엔 자연히 모기에 물리지 않게 된다는 걸.”

    “그… 렇습니까?”

    구염락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서전의 의사와 상관없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누님은 자네를 위해 그런 거야. 난 예전에 그녀 때문에 적지 않은 물건을 억지로 몸에 지니고 다녀야 했어.”

    구염락은 당시 모기가 많은 곳에 살던 자신을 염려해 장서열이 몹시 심혈을 기울여 항료를 구했을 거라는 걸 나중에야 깨달았다. 그가 돌연 말했다.

    “그 향낭, 내가 한 번 볼 수 있을까?”

    장서전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답했다.

    “소인이 지금 당장 가져오겠습니다.”

    잠시 뒤, 분홍색 아기 나비 두 마리가 정교하게 수놓인 향낭 하나가 구염락의 손에 들어왔다. 나비의 날개는 눈부신 금실로 엮여 있었고, 끝에는 고급스런 비단 술이 드리워져 있었다. 만사형통을 뜻하는 매듭을 거꾸로 매달아 허리에 찰 수 있게 해 놓은 모양이었다.

    바느질 선과 알 수 없는 자수 기법에서 오는 익숙함에 구염락은 오랫동안 이를 조용히 들여다보았다.

    그에게도 향낭이 하나 있었다. 비록 그 당시 장서열의 자수 실력이 썩 좋지 못했기 때문에 천과 자수 실이 분리될 정도였지만, 만사형통을 뜻하는 매듭만큼은 이와 꼭 같았다. 그건 장서열이 가장 좋아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하지만 잘 만들었다고 볼 수 없는 그 향낭 하나조차도 그땐 누군가의 심기를 건드려 기어코 빼앗기고 말았다.

    구염락이 냉소를 머금었다. 서풍엽은 그녀가 직접 수놓은 물건을 많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진 향낭을 모두 모으면 아마 장서열의 자수 실력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터였다.

    그때의 또렷한 기억, 그리고 서풍엽이 빼앗아간 향낭을 떠올리자 구염락은 어렴풋한 증오가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깟 자수 하나 남겨주지 않다니. 그는 서풍엽이 당시 무슨 생각으로 그리 박하게 군 것인지 궁금했다.

    장서전은 십삼황자의 표정이 달라지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혹시라도 누이동생이 과거에 구염락의 향낭에 독이라도 집어넣어 그를 자극했던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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