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저 아이는 영 철이 들지 않는다니까. 아직도 저렇게 버릇이 없구나. 홍촉, 들여보내라! 매파도 불러오고! 예단 목록이 여기 이렇게 있는데 무얼 밖으로 찾으러 나간 건지 모르겠구나.”
홍촉이 얼른 장서전을 들여보냈다.
“조심하세요, 도련님.”
이어 뒤돌아 선 홍촉은 영원히 예단을 찾지 못할 매파를 부르러 갔다. 장서전은 소년 특유의 풋풋한 분위기를 풍기며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왔다.
“설마 벌써 합의가 끝난 건 아니겠지요? 그러는 게 어디 있습니까. 오라버니인 제가 아직 허락하지 않았는데요! 저는 본가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누이동생과 별로 시간을 보내지도 못했는데 혼인이라니, 안 됩니다! 쓸쓸한 제 마음은 어떡합니까.”
조옥언이 즉시 아들을 향해 일침을 날렸다.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 넌 네 부인을 찾아 볼 생각이나 하거라. 누이동생이 벌써 혼인을 하니 너도 어떤 여인이든 데려와 혼인해야지.”
그 말에 장서전이 호기롭게 가슴을 탕탕 두드리며 말했다.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이 몸은 멋진 장군이니 당연히 제게 어울리는 절세의 미인을 부인으로 얻어야지, 어찌 아무나 데려오겠습니까. 어머니도 참!”
“미인은 무슨, 여인과 혼인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딸에 비하면 조옥언에게 아들은 애물단지나 다름이 없었다.
“어머니, 어찌 이 아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저도 사람들이 앞 다투어 데려가려는 좋은 신랑감이라고요.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제게 중매를 서주려고 하는데요! 제가 응하지 않을 뿐이지요.”
조옥언이 얼른 답했다.
“그래서 시정잡배의 여식이나 서시(西市) 어부의 손녀를 입에 올리느냐? 어디 정말로 그 아이들을 아내로 맞이해 보지 그러느냐.”
장서전이 백정 출신들과 함께 지낸 탓에 중매를 서주겠다는 사람들 역시 비슷한 부류였다. 그 때문에 조옥언은 골머리를 앓고 있던 참이었다. 그녀는 아들의 뻔뻔함에 기가 찼다.
서풍엽도 쓴웃음을 지었다. 장서전이 스스로 신분을 밝히는 걸 삼갔기 때문에 그의 곁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자신들과 같은 백정 출신인 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장서전에게 소개해 주고자 하는 여인들 역시 자연스럽게 그들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장서전은 언젠가 호기심에 여인 한 명을 소개 받고 돌아온 뒤로 다시는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장서열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는 이변이 없다면 이번 생에서도 올케가 될 여인을 떠올렸다. 장서열은 훗날 장서전이 올케를 만난 후에도 그녀가 절세미인이 아니라며 못마땅해 할지 궁금해졌다.
장서열의 표정을 본 장서전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서열아, 왜 그리 음흉하게 웃는 거야? 이제 혼인을 한다니까 너무 기뻐서 잠도 안 오지?”
“쓸데없는 소리 말아요, 오라버니.”
“떠들썩하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부인.”
한참이나 상부의 정원을 배회하고 있던 매파가 다시 방으로 들어섰다.
“제 기억력이 이렇습니다. 나이가 드니 무엇이든 아무 데나 놓아두고 돌아서면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해가 갈수록 심해지고요.”
완벽히 태도를 바꾼 조옥언은 매파가 무슨 말을 하든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매파는 과분한 대접을 받아 어쩔 줄 몰라하며 합의해야 할 것들을 재빨리 해결했다. 그리고 웃음꽃이 가득 핀 채 충왕부로 향했다.
절차에 따르면 매파가 첫 방문을 했을 때 신부 측은 혼사에 응하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두 번 더 반복해야 신부 측에서는 비로소 상대가 혼사를 진지하게 생각한다 여기고 ‘마지못해’ 혼인을 승낙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신부 측도 어느 정도 성의껏 혼사를 논의해야 했다.
충왕부로 향한 매파는 능수능란하게 내용을 조율했고, 충왕부 역시 만반의 준비를 마친 덕분에 매파는 매우 순조로운 합의를 이끌어냈다. 충왕부를 나온 뒤, 매파는 서풍엽에게 한 꾸러미의 보답을 받고 기뻐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열흘 뒤 다시 방문하겠노라 말한 그녀는 연신 허리를 굽혀 절한 뒤 비로소 자리를 떠났다.
밤이 어두컴컴한 대지에 스며들었다. 마침내 혼사를 확정한 서풍엽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등 뒤의 좌상부를 바라보았다. 문득 구염락을 떠올린 그가 입가에 냉소를 머금으며 검은 말의 몸집을 쓰다듬었다.
‘아무래도 권 씨 가문 아가씨의 열의가 부족한가보군.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손 안에 들어온 부귀영화를 잡지 않는단 말인가.’
서늘한 눈빛으로 말에 올라탄 서풍엽이 곧 좌상부를 떠났다.
* * *
우뚝 솟은 황궁 안, 처마 끝이 갈고리처럼 휘어진 궁은 휘황찬란했다. 촛불이 가장 밝게 켜진 전각에는 정교하고 아름다운 그릇이 가득했고, 오색찬란한 옷을 입은 궁녀들은 분주하게 처소 안을 누비고 다녔다.
궁의 후방(後房, 뒤채. 정방의 뒤편에 세워진 가옥)에는 꽃이 조각되어 마치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하는 문이 조용히 닫혀 있었다. 매혹적인 향기가 감도는 방 안에는 옥그릇과 금으로 된 장식품들이 널려 있었다. 최상품의 구슬과 옥은 무심하게 실에 꿰어져 각 모퉁이마다 주렴(珠帘, 구슬을 꿰어 만든 발)으로 걸려 있었으며, 빛이 비치는 비단 병풍은 절묘하게 아름다웠다.
권여아(權如兒)는 가슴을 비단 천으로 덧댄 긴 치마를 입고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부드러운 비단옷을 바닥에 늘어뜨린 모습은 아름답고 단정했다. 수를 놓고 있던 그녀가 실수로 손가락을 바늘로 찌르자 피 한 방울이 맺혔다. 놀란 그녀가 손가락을 입에 살짝 물고 혀로 피의 흔적을 없앴다.
‘아프다.’
시중을 들고 있던 마마가 아가씨를 쳐다본 후 침착하게 다른 궁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향로 정리를 마친 마마가 앞으로 다가와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 무슨 걱정거리라도 있으신가요?”
방 마마(房嬤嬤)는 쉰이 넘은 나이로 연륜 있는 궁인이었다. 감청색 4품 궁녀복을 입은 그녀는 권여아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일등(壹等) 대 마마(大嬤嬤)였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권여아는 말하기 싫다는 듯 고개를 숙인 채 계속 수를 놓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방 마마는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여러 해 동안 시중을 들어온 그녀는 아가씨가 자기 고집이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제는 일개 군왕(郡王)이 된 구염단신이 혼사를 거절했을 때에도 잘 버텨 낸 아가씨였다. 게다가 지난 몇 년 동안 아가씨의 심성은 더욱 평온해져서 그녀가 크게 신경 쓸 일이 적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아가씨도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아가씨, 혹시 황후마마께서 정해주신 혼사가 기쁘지 않으신지요? 십삼황자의 나이가 어리고 신분이 비천해 아가씨를 욕되게 한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닙니까?”
권여아의 얼굴이 어색하게 굳었다. 마마가 이런 말을 꺼낼 줄 몰랐을뿐더러 자신의 마음을 꿰뚫어본 탓이었다.
“제가 감히 그럴 리가요.”
“감히 그러고 안 그런 게 어디 있겠습니까.”
방 마마가 여전히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그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가씨는 어렸을 때부터 궁에서 자라셨지요. 궁 안에서의 흥망성쇠는 흩날리는 연기처럼 금방 사라져 버리는 법. 덕분에 아가씨도 많은 것을 보셨을 겁니다.”
권여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에게 필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해야 좋을지 조언해 줄 사람이었다. 방 마마가 계속 말을 이었다.
“총애가 뭐 그리 대단하겠습니까. 외모 역시 두려워할 것이 못됩니다. 그런 것들은 다 남자들이 한때 신선히 여기는 것에 불과하지요. 진실로 오래 남는 건 정입니다. 황제 폐하의 정만 얻을 수 있다면 이 궁은 여인이 지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지요.”
수를 놓던 권여아의 손이 멈칫했다. 방 마마가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아가씨는 재능이 둘도 없이 뛰어나고 성정이 관대하며 신분 또한 누구와 비할 바 없이 존귀합니다. 허나 아무리 아름다운 여인일지라도 내면을 길러야 하는 법입니다. 연경의 제일가는 미녀라는 좌상부의 아가씨도 아마 그 점에서만큼은 아가씨에 못 미칠 것입니다.”
“…….”
“이는 아가씨께서 선천적으로 그런 성정을 타고 난 것이 아니라 상황을 멀리 볼 수 있는 혜안을 지녔기 때문이지요. 만약 아가씨께서 평범한 자와 혼인을 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럼 세상에 단 한 벌밖에 없는 그 비단옷을 입으실 수 있겠습니까? 사시사철 각양각색의 귀한 음식을 먹을 수도, 어화원에 온갖 진기한 꽃들을 심을 수도 없을 겁니다.”
“…….”
“물론 가장 중요한 건 감정입니다만, 그것이 정말 아가씨가 원하는 것인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권여아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사랑 같은 걸 필요로 하지 않은 지 오래였다. 대신 자기 자리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기왕 그렇다면 아가씨께서는 어째서 아직 가만히 계시는지요. 십삼황자는 아직 태자가 아닙니다. 아가씨는 고귀한 신분이고요. 이럴 때 진심으로 그를 돕고 정성을 다한다면 장래에 부귀영화까지는 장담할 수 없을 지라도, 그 분과의 정만큼은 확실히 남게 될 겁니다. 어쩌면 황후까지도 노려볼 만하지요. 아가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권여아가 다섯 살일 때부터 곁에서 시중을 들어온 방 마마였다. 권여아는 깊은 생각에 잠겨 손에 쥔 바늘을 내려놓았다. 그녀 역시 줄곧 생각해온 문제였다. 지난 몇 년 동안 그녀는 구염락이 매우 원칙적이고 학식이 깊으며 반듯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또한 그는 그녀에게 항상 예의 바른 모습을 보여 주었다.
권여아 또한 그와 한평생을 보낸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을 리 없었다. 방 마마의 말대로 그녀는 황궁을 나갈 수 없으므로 십삼황자야말로 그녀가 심혈을 기울여야 할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째서 십삼황자가 비굴하게 사랑을 구걸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걸까.
권여아는 만에 하나 정말로 그런 날이 온다면 구염락이 지금처럼 여유롭게 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가끔 그는 극단적으로 단호해서 상대로 하여금 감히 그를 거역할 수 없게 만들었다.
방 마마는 아가씨가 자신의 말귀를 알아들은 듯하자 조용히 아가씨의 손에 들려 있던 수틀을 치우고 해야 할 일을 바꿔주었다.
“아가씨, 향낭을 수놓으세요. 십삼황자의 생일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권여아의 작은 얼굴이 살짝 홍조를 띠었다.
그러나, 사실 방 마마는 상황을 그리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아가씨는 스스로를 똑똑하다 여겼고 십삼황자에게 우월감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십삼황자는 바보가 아니었다. 그가 보이는 태도는 단지 아가씨를 귀찮게 여기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