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01)화 (101/449)

제101화

“바보 같은 것.”

“어머니가 세상에서 절 제일 아껴주신다는 거 알아요. 풍엽 오라버니도 저를 많이 아껴줘요. 그날 일은 정말로 오라버니와 무관해요. 그냥… 다른 사람을 떠올리다가 제 스스로에게 화가 나서 그랬던 거예요.”

조옥언이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널 이용해 큰일을 도모한다던 사람 말이냐?”

장서열과 서풍엽이 난감한 얼굴로 조옥언을 바라보다가 속으로 탄복했다. 그들은 두려움을 모르는 조옥언의 시선을 피하며 그녀가 느끼는 억울함과 원망이 대체 어느 정도일까 생각했다. 그녀는 감히 황제조차도 자신을 어찌하지 못할 거라 믿고 있었다. 실제로 황제의 포용이 그녀에게 끝 모를 자신감을 가져다준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장서열은 어머니의 손을 꼭 잡고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 또한 전생에 딸을 둔 어머니였기에 지금 이 순간 모친의 심정을 더욱 절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어머니, 어린 나이에 절 혼인시키는 게 마음 아프신 거라면 이 년은 더 데리고 계시다가 제가 다 크면 그때 보내세요.”

장서열의 말에 조옥언과 서풍엽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조옥언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그녀도 그러고 싶었다. 이 세상에 그녀보다 딸을 곁에 두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심지어 속사정을 잘 아는 풍엽에게 딸을 보내는 것조차 마음이 놓이지 않는 그녀였다.

하지만 성인군자 같았던 태자가 무너지고 근본을 알 수 없는 십삼황자가 달려든 것을 생각하면, 조옥언은 걱정이 되어서라도 더는 딸의 혼인을 지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권세를 잃고 나서도 딸의 일이 순조롭게 풀릴까? 만약 십삼황자가 죽기 살기로 매달린다면 그땐 또 어찌할 것인가?’

풍윤 그 고집불통이 또 무슨 악독한 수단을 생각해낼지 알 수 없었다. 조옥언은 딸을 혼인시키는 것만이 최선책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풍엽의 말처럼 정말로 혼례를 올린 뒤 다시 집으로 데려오는 한이 있어도 그 편이 나았다.

장서열은 시시각각 변화하는 어머니의 표정을 이해할 수 없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신이 딱히 잘못된 말을 한 것 같지는 않았으나 어머니와 풍엽 모두 의미심장한 얼굴인 게 마음에 걸렸다.

‘어머니는 내가 늦게 혼인하기를 바라지 않았나? 게다가 아직은 확실히 이른데……. 대체 뭐가 문제인 거지?’

조옥언이 이를 악 물었다.

“사실 네 나이는 어리지 않다. 내년이면 벌써 열세 살이잖니. 연말에 혼례를 올린다면 국법에도 어긋나지 않을 게야.”

장서열이 순간 놀란 얼굴로 조옥언을 바라보았다. 줄곧 혼인을 반대해 온 어머니였다.

“어머니, 무슨 일이 있으셨나요?”

서풍엽은 무거운 짐을 벗은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보아하니 쓸데없는 걱정을 한 건 비단 그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는 같은 염려를 한 듯한 조옥언을 바라보다가 뒤이어 장서열에게 말했다.

“별 거 아니야. 네가 기절한 걸 알게 된 십삼황자가 뛰어 들어와 널 끌어안고 울려고 했었어.”

적당히 상황을 넘기려는 서풍엽의 애매모호한 대답에 장서열은 문득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한 사람은 그녀와 급히 혼례를 올리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자신을 급히 혼인시키려 하고 있었다. 이들은 무슨 문제가 생길까 두려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구염락이 그럴 리 없지 않은가.’

장서열은 두 사람이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구염락이 정말로 그녀의 혼사를 막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설령 이미 꽃가마가 충왕부에 들어갔다 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도, 상대에게 털끝만큼의 기회도 주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구염락에게는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었다. 전생에서 두 사람의 혼인은 그녀가 구염락에게 시집가겠다고 생떼를 부린 끝에 겨우 이루어진 것이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자신에게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전생에서 구염락은 언제나 서출만을 편애했으므로 오히려 장서영을 들여보내면 그녀야말로 구염락과 백년해로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재 자신과 구염락은 어떠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약간의 우정을 나눴을 뿐이었다.

그녀는 어머니와 서풍엽의 의심이 너무 지나치다 여겼다.

장서열은 더없이 진지한 조옥언과 서풍엽을 바라보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정말이지 두 사람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그에 비해 구염락은 과소평가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구염락에게 결코 자신은 보배가 아니었다. 어머니는 근거 없는 추측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와 풍엽 오라버니께 뭐라고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어찌됐든 십삼황자와 저는 서로 알고 지낸 정도 있고, 그가 울었다면 그건 타고난 성정이 그렇기 때문이에요. 두 분이 그런 추측을 하는 것은 아무래도 너무…….”

조옥언이 즉시 반박했다.

“그 애는 진심이었다. 게다가 풍윤은……!”

조옥언이 아는 풍윤은 두 사람의 혼사에 언제든 훼방을 놓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그 아이까지…….

조옥언은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지 않았다. 비록 잠시 나타나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전에 끌려 나갔지만, 조옥언이 보기에 구염락은 분명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지금은 단지 나이가 어려 야심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었다.

서풍엽이 미소 지으며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그 역시 도박은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 구염락의 태도는 확실히 느낌이 좋지 않았다. 지금은 좋게 생각해 남매의 정이 깊은 탓이라 이해한다 쳐도, 추후 그 마음이 똑같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서풍엽은 구염락이 크는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었다. 구염락에게 딱히 은혜를 베푼 적은 없었지만 나름 정이 들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구염락의 뜻대로 움직이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어쨌든 날짜를 먼저 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제 어머니께서는 이미 이 년 전부터 신방을 꾸미셨으니 준비하는 시간도 촉박하지는 않을 겁니다.”

충왕비를 떠올린 조옥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사부인은 언제나 마음이 조급하시지.”

“어머니께서는 전부터 서열이가 왕부에 들어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셨으니까요.”

장서열은 황당했다. 혼사 문제로 씨름을 할 때는 언제고 벌써 사부인이란 호칭이 나온단 말인가. 하지만 조옥언은 딸의 표정을 무시한 채 서풍엽을 향해 말했다.

“자네도 이미 장성했지. 서열이는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 내 자네에게 딸을 맡기겠네. 저 아이가 무슨 짓을 저지를까 마음이 영 놓이질 않아.”

“안심하십시오, 부인. 제 마음은 언제나 처음과 같습니다.”

듣기 좋은 말이었다.

“자네가 확실히 약속해 줘야 할 게 있어. 만약 서열이가 자네에게 불만이 있다면 당연히 서열이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있지. 자네는 결코 서열이에게 함부로 굴어서도 안 되고 미안할 짓은 더더욱 해서는 안 돼.”

“…….”

“남자들이 바깥에서 받는 유혹이 많다는 걸 나도 모르지 않아. 자네가 끝까지 순결을 지킬 거라고도 생각지 않고. 허나, 어떠한 일이든 반드시 서열이에게 알려야 하네. 첩실의 일도 마찬가지야. 나야 당연히 자네가 첩실을 들이지 않았으면 하지만… 자네 신분을 고려한다면 그건 비현실적인 이야기지. 하지만 만에 하나 첩실을 들이고자 한다면 반드시 서열이의 동의를 구해야 하네.”

서풍엽이 엄숙하게 공수를 하며 말했다.

“지나친 걱정이십니다, 부인. 저는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입니다. 서열이 한 사람을 부인으로 맞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장서열이 서풍엽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녀는 그의 말을 믿었다. 때문에 그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조옥언이 그를 매섭게 쏘아보았다.

“되었다. 행여 맹세를 지키지 못할까 두렵지도 않나 보군.”

예전에 같은 말을 들었을 땐 기분 좋은 소리로 느껴졌지만 혼인이 결정된 마당에 같은 이야기를 들으니 이제는 입에 발린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다. 자신의 딸은 모자란 것이 하나도 없는 아이였다. 만약 자신이 직접 느끼고 경험한 바가 없었다면 그녀는 서풍엽이야말로 딸에게 꼭 맞는 배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서풍엽은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역시 장모님의 비위를 맞추는 건 어려웠다.

장서열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어머니의 손길에서 담담한 슬픔을 느꼈다. 문득 마음이 시큰해진 그녀가 돌연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어머니…….”

“착하지. 이 어미가 있으니 앞으로 세자의 부인이 되어 잘 살거라. 만에 하나 풍엽이 네게 못되게 굴면 이 어미가 혼을 내 주마.”

말을 마친 조옥언은 고개를 떨구었다. 눈물이 떨어질 것 같았다. 세월이 흘러 자신이 늙고 황제가 죽어 누구도 기세등등한 충왕부의 세자를 저지할 수 없는 때가 오면 딸아이의 신세는 어찌 될 것인가. 그나마 딸이 제멋대로 횡포를 부리는 성격이 아니라는 게 다행이었다. 오늘 그녀가 서풍엽에게 받아낸 다짐은 먼 훗날 딸이 천수를 다할 때까지 정실의 자리를 지키도록 해줄 것이다.

조옥언의 손을 꼭 움켜쥔 장서열은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마음은 고요한 샘물처럼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장서열은 자신이 누구와 혼인하더라도 어머니의 염려는 다르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구염락과 혼인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어머니의 슬픔은 전생의 그날보다 깊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녀의 고집에 못 이겨 혼인이 결정되었을 때, 조옥언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녀를 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당시 장서열은 어머니가 자신의 체면을 세워주지 않는다며 원망하기에 바빠 딸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진심 어린 마음은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께 못되게 굴었던 전생에서의 모습을 떠올리자 장서열은 그대로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당시 그녀는 희대의 불효녀였다.

“어머니, 걱정 마세요. 만약 제가 혼인하는 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전 영원히 어머니 곁에 있을 거예요. 언제나 절 보실 수 있도록 말이에요.”

“바보 같은 소리를 하는 구나. 널 데리고 있어서 무엇 하겠니. 이 어미도 이젠 네가 귀찮다.”

서풍엽은 장서열의 곁에 선 채 가만히 두 모녀를 바라보며 자신의 진심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어 밖에서 활달한 목소리가 들렸다.

“홍촉, 여기 서서 뭐해? 세자는 갔어?”

“도련님께 아룁니다. 세자께선 방에 계십니다.”

“아직 안 갔다니 다행이군. 내가 좀 들어가서 봐야겠어……. 왜 막는 거야? 그가 내 여동생을 데려가겠다는데, 오라버니인 내가 좀 만나 봐야 하지 않겠어?”

장서전은 서풍엽에게 기가 죽지 않기 위해 특별히 옷까지 갈아입고 와 있었다. 바깥의 소란을 들은 조옥언이 이내 슬픈 기색을 지우고 기쁨과 위안이 담긴 자랑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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