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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00)화 (100/449)
  • 제100화

    장서열은 정말로 이 혼사가 마음에 드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자신을 아끼는 남자와 좋은 시어머니, 그리고 어머니의 기대까지. 그녀는 마땅히 어떤 불만도 없어야 했다.

    하지만 이 순간 그녀는 딸 상아(裳兒)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딸에게 빚을 졌지만 이번 생에서는 갚을 도리가 없었다. 그녀는 혹 딸아이가 다시는 전과 같은 고통을 겪지 않기 위해 다른 곳에서 편히 쉬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망연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난 장서열이 문가로 걸어갔다. 그녀는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다 반운각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에 시선을 돌렸다. 자신이란 존재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전생과는 다른 사람이 되어 조용하게 새로운 생을 살고 있었다.

    물론 그녀는 이런 삶이 조금도 싫지 않았다. 어머니는 건재했고 오라버니도 무사했다. 만약 그녀가 반드시 잘못을 빌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오직 상아뿐이었다.

    ‘널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지 못하는 이 어미를 용서하렴. 만일 전생에서 어미의 본분을 다하지 못한 내가 밉지 않다면 내게 다시 만회할 기회를 주길…….’

    멀리서 문가에 서 있는 아가씨를 바라보던 홍촉은 그녀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아득한 표정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다가간 홍촉이 공손하게 몸을 숙였다.

    “아가씨, 부인께서 찾으세요.”

    그런 다음 장서열의 귓가에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부인께서 말씀하시길, 다 알아서 하실 테니 아가씨께선 아무 말씀도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말을 마친 홍촉이 장서열을 향해 활짝 웃어보였다. 뒤에서 든든히 아가씨를 뒷받침해 주겠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장서열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었다. 위지 씨 가문과 관련해 서풍엽은 어떤 것도 잘못한 게 없었으나, 자신이 어떻게 설명을 해도 어머니는 전혀 믿지 않았다. 너무 고집스러운 것이 유일한 결점인 사람답게 어머니는 스스로 생각해낸 답만 믿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풍엽은 어째서 갑자기 혼담을 꺼낸 거지? 혹 내가 다른 생각을 할까 봐 두려웠던 걸까?’

    그날, 장서열의 고백은 지난 몇 년간 그녀가 서풍엽에게 보여준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분명 그녀는 서풍엽에게 스스로 연못에 뛰어내린 게 맞다고 말했다. 사실 장서열로서는 위지해어를 발로 걷어 차 물에 빠뜨리지 못한 게 한이었지만, 위지해어가 첩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장서열은 자신의 말에 놀랐던 서풍엽의 얼굴이 아직도 생생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어진 서풍엽의 대답에서 자신이 여태껏 만들어 온 단정한 모습이 벽에 부딪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난 네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생각해. 네가 처음 초혜전에 왔을 때는 무척 거만했지. 지난 몇 년 동안 순한 양처럼 조용했던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니까. 난 네가 중간에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겪은 게 아닌가 생각했었어.”

    물론 그랬다. 같은 생을 반복하며 미칠 듯한 외로움을 기억하고, 사람을 질식시킬 듯한 황궁의 압박을 떠올리면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제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황궁과는 영원히 이별이었다.

    * * *

    서풍엽은 조옥언의 숨 막히는 침묵을 버티며 황제와 마주할 때보다도 더욱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그는 오늘 특별히 몸가짐에 신경을 쓴 채였다. 봄에 지은 새 옷을 걸친 그는 머리카락 한 올조차 튀어나오지 않게 꼼꼼히 머리를 묶고 손발을 모두 단정히 하고 있었다. 그는 지난 며칠 동안 그를 탐탁잖게 여기는 조옥언에게 행여 조그만 결점이라도 보일까 걱정스러웠다.

    상석에 앉은 조옥언은 평소와 달리 자애로운 웃음 대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감히 자신의 딸을 고생시킨 것은 아닌지 빤히 쳐다보았다. 마치 몸에 구멍이라도 뚫을 기세였다.

    그러나 사실 그녀는 서풍엽을 몹시 아꼈다. 굳이 이런 행동을 취하는 이유는 사위가 두 번 다시 같은 일을 반복하지 않도록 일부러 콧대를 꺾어놓고자 함이었다. 딸아이는 그를 무척 좋아했다. 그렇기에 더욱 그가 딸을 상처 입히지 못하게 해야 했다. 만약 이런 수모 하나 참지 못하는 사위라면 애초에 내치는 게 나을 것이다.

    서풍엽은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매우 공손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매파가 자신과 서열이 어째서 천생연분인가를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을 들으며 심장이 튀어나올 듯한 두근거림을 간신히 참았다.

    조옥언은 장신성이 첩을 들이는 것을 모두 용인한 여인이었다. 장신성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풍엽은 달랐다. 자신의 딸이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게 아니고서야 첩이란 절대 있을 수 없었다.

    조옥언이 그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서풍엽은 숨이 막힐 것만 같았다.

    그때, 홍촉이 발을 걷어 올렸다.

    “부인, 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마침 찻잔을 열던 조옥언이 그 틈을 타 딸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보냈다. 서풍엽을 위해 나서지 말라는 눈짓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올리는 매파의 들뜬 목소리가 울렸다.

    “노비, 아가씨께 인사 올립니다. 아가씨께서는 점점 더 예뻐지시는군요. 세자께서 왜 오매불망 아가씨만 찾으시는지 알 것 같습니다. 앞으로 어여쁜 아내가 집안일을 할 테니 세자께서는 참으로 복이 많으십니다.”

    말을 마친 매파가 입을 가리고 서풍엽을 향해 웃어 보였다. 그는 제자리에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조옥언이 즉시 불쾌한 얼굴을 들었다.

    ‘집안일이라니? 지금 세도가의 중매를 서는 것인가, 시정잡배의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어머니의 안색을 살핀 장서열이 막 한 걸음 앞으로 나서려 할 때였다. 조옥언이 즉시 딸을 저지했다.

    “끝에 앉거라.”

    조옥언은 딸이 자신을 방해하게 내버려 둘 생각이 없었다. 남자란 초장에 버릇을 잡아 놓지 못하면 반드시 두 번 세 번 일을 벌이기 마련이었다. 특히 딸아이의 여린 성격을 생각하면 자신이라도 나서서 반드시 단속을 해야 했다. 이번 일은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었다.

    서풍엽을 힐끗 바라본 장서열이 쓴웃음을 지은 뒤 홍촉에게 매파를 밖으로 내보내라고 눈짓했다. 눈치 빠른 매파가 얼른 대답했다.

    “아차, 제 기억력이 이렇습니다. 예단을 마차에 두고 왔으니 가서 가져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매파는 발바닥에 기름칠이라도 한 듯 종종걸음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그녀는 밖에 나가서야 비로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장 부인과 같은 장모 자리는 처음이었다. 자신이 입이 닳도록 떠들어 대는 동안 장 부인은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과연 소문대로 어려운 사람이었다. 매파의 머릿속에 어쩌면 이번 중매는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렇게 되면 아무 것도 얻어낼 수 없으니 그야말로 재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석양이 부드럽게 붉은빛을 발하기 시작하자 하늘 가장자리에 걸린 황금빛 햇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저녁답지 않게 따스한 기운이 감돌았다.

    외부인이 사라진 후 서풍엽은 앉은 자세를 더욱 단정하게 고쳐 앉았다. 자신의 혼사가 지금 이 순간에 달려 있었다. 그런 그를 마치 위로하듯 바라보던 장서열은 자신을 노려보는 어머니를 향해 미소를 머금고 앞으로 나아갔다.

    “어머니, 그렇게 화를 내시면 건강에 좋지 않아요. 무엇 때문에 그렇게 화를 내시는 거예요? 풍엽 오라버니가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 차도 한 잔 내주지 않으시다니요.”

    “아직도 그를 두둔하는 게냐?”

    딸이 안쓰러운 얼굴로 서풍엽을 옹호하자 조옥언은 자신도 모르게 다시 서풍엽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장서열이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보세요, 화를 내시니까 고운 얼굴이 다 망가지잖아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앉아있던 서풍엽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말했다.

    “장 부인, 저는 진심으로 서열이와 혼인을 바라오니 원컨대 허락해 주십시오. 부인께서는 제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셨지요. 저는 서열이를 두고 절대로 딴 마음을 품지 않을 것입니다.”

    “…….”

    “부인께서 서열이를 얼마나 아끼시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혼인 후 부인만 괜찮으시다면 제가 매달 서열이와 함께 상부에 와서 잠시나마 묵고 가겠습니다.”

    듣기에는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정말로 약조한 내용이 지켜질지는 알 수 없었다. 만약 때가 되어 그의 말이 지켜지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이 뭘 어찌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혼인을 청하는 것으로 딸아이에게 준 상처를 메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서풍엽은 필시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것이 분명했다.

    한편 장서열은 괜히 자신 때문에 서풍엽이 고생한다고 생각했다.

    “어머니, 그날은 정말 풍엽 오라버니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었어요. 보세요, 오라버니가 어딜 봐서 여인이나 밝히는 사람 같아 보이나요? 그리고 정말로 풍엽 오라버니가 바람이 난다면 어머니가 나설 필요도 없이 저부터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하지만 조옥언은 믿지 않았다.

    “넌 성격이 너무 물러서 탈이다. 난 동의할 수 없구나. 나를 납득시키기 전까지 혼사를 논할 수는 없다.”

    그 말에 깜짝 놀란 서풍엽이 황급히 말했다.

    “부인, 진심으로 간청 드립니다. 정 마음이 안 놓이신다면 우선 제가 상부에서 일 년 정도 지내는 건 어떨는지요? 부인께서 만족하시는 날에 서열이를 데리고 왕부로 돌아가겠습니다.”

    서풍엽은 반드시 그녀와 혼인을 올려야만 했다. 그는 구염락이 준 홍목 상자를 예단에 포함시켜 놓은 참이었다. 그렇다면 구염락은 이를 서열이에게 직접 전해 주지 않았다고 자신을 감히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서풍엽의 말에 순간 조옥언의 눈이 반짝였다.

    ‘데릴사위를 하겠다? 들어오는 건 네 맘이지만 나가는 건 네 뜻대로 되지 않을 텐데? 네가 내 마음을 알기는 하는구나.’

    그러나 곧 조옥언은 슬픈 마음이 들었다. 결국은 딸을 데려가겠다는 말이었다. 여느 모친과 마찬가지로 조옥언 역시 딸을 혼인시키기가 아쉬웠다. 딸은 이제 겨우 열두 살로 혼인하기에 이른 나이였다.

    하지만 조옥언은 그 소년이 울먹이던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딸이 걱정스러웠다. 풍윤은 도망치기 바쁜 겁쟁이였고 결국 자신에게 상처를 입혔다.

    어쩌면 이리 된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딸아이가 조금만 달리 생각한다면 그런 남자아이쯤은 한두 번쯤 재미 삼아 갖고 놀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구염 씨 가문의 사람은 자신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은 아직 어렸고, 조옥언은 그런 딸을 시집보내는 게 못내 아쉬웠다.

    “서열아, 풍엽이 정말 네게 미안해하지 않아도 되는 게냐?”

    장서열은 어머니를 꼭 끌어안았다.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어머니는 그녀보다 더 슬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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