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화
어느 날, 장서열을 대신해 서풍엽이 그를 찾아온 일이 있었다. 서풍엽은 그에게 대체 얼마나 큰일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냐 물었다.
역시나 자신의 서열 누님은 생각만큼 미련한 사람이 아니었다. 구염락은 큰일이 아니면 굳이 깊이 생각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그녀를 떠올리며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이번 일이 마무리가 되는 대로 위지해어를 처리할 생각이었다. 그녀는 하루 종일 장서열이 스스로 뛰어내린 거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 불쌍한 모습에 누군가는 정말로 그 말을 믿을지 모를 일이었다.
“금용.”
금용이 아름다운 자태로 방에 들어왔다. 그녀는 구염락을 쳐다보다가 다시 황급히 눈길을 거두고 얼굴을 붉혔다. 그녀는 오늘 노 마마(嬤嬤)로부터 황후가 구염락을 위해 여인을 고르고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금용 역시 황후에게 불려가 몇 가지 질문을 듣고 오는 길이었다.
금용이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그녀의 가슴이 갑자기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전하, 무슨 일로 부르셨나요?”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서 있는 그녀의 모습에 구염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가서 세자를 불러 와라.”
말을 마친 그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배어나왔다. 구염락은 세자에게 자신을 대신해 서열 누님께 감사 인사를 전해 달라 말할 작정이었다. 서열 누님이 그리도 똑똑하다는 걸 세자 역시 모를 리 없었다.
그리고 구염락은 그날 서풍엽이 짓던 무거운 표정을 철저히 무시했었다.
* * *
궁에서 나온 서풍엽의 손에는 홍목(紅木)으로 만든 긴 상자 하나가 들려 있었다. 용과 봉황의 상서로운 무늬가 어지럽게 수놓아진 것으로, 외부인이 볼 수 없게 자물쇠가 채워진 상자였다. 그는 손에 든 열쇠로 상자를 열어보고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십삼황자가 그의 서열 누님에게 보낸 선물을 어찌 건드릴 수 있겠는가.
서풍엽은 쓴웃음을 금치 못하며 방금 전 제자전에서 본 구염락의 진지한 얼굴을 떠올렸다. 구염락은 장서열이야말로 품행이 고결하고 책략에 뛰어날 뿐만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총명해 언제나 범상치 않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장서열이 자신을 돕기 위해 몸을 아끼지 않고 연못에 빠지기까지 한 일을 몹시 감사하게 생각하며, 여전히 자신을 많이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서풍엽은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는 숨기지도 않고 선전 포고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구염락의 진지하고 온화한 얼굴을 떠올릴수록 마음이 점점 더 가라앉는 걸 느꼈다.
‘구염락은 지금 잔머리를 굴리고 있는 건가. 서열이와 내 사이를 멀어지게 하려고? 아니면 자신이 한 수 위라고 과시하기 위해?’
서풍엽 역시 장서열이 그토록 신중하게 생각을 거듭한 것에 대해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구염락은 이번 일로 자신과 장서열의 사이가 소원해질 거라 믿고 있었다.
서열이가 정말로 위지 씨 가문을 겨냥했다 한들 뭐가 어떻단 말인가. 설령 그녀가 정말로 구염락을 위해 연못에 뛰어든 거라 해도 그는 상관없었다. 그녀의 계책은 완벽했으며, 어차피 그녀가 구염락에게 잘해주는 것도 익숙한 일이었다. 예전에도 그러했듯이.
‘이제 서열이가 열두 살이 되었으니 혼례를 올릴 수 있겠지.’
서풍엽은 경멸스러운 듯 홍목 상자를 마차 한편에 던져 넣었다.
* * *
한편, 제자전에 남은 구염락의 안색은 매우 좋지 않았다. 그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새로 구운 도자기 그릇 한 벌을 박살내 버렸다.
과연 서풍엽은 아홉 살 때부터 직무를 수행한 왕부의 세자답게 조금도 빈틈을 찾아볼 수 없었다. 서풍엽은 부부는 일심동체이기에 자신과 장서열의 마음이 같다고 말했다.
‘혼인이 하고 싶다?’
구염락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준수하고 우아한 얼굴에 끝도 없는 폭발력이 서렸다. 그의 머릿속에 문득 사공주(四公主)가 혼처를 구하고 있다는 내용이 떠올랐다.
* * *
장신성은 조정이 미쳐 돌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며칠 사이 제대로 된 논의도 거치지 않은 채 위지 대사마의 죄목이 결정되었고, 관원들은 허겁지겁 비어 있는 관직을 나눠 가지기에 바빴다.
장신성은 자신이 또 한 차례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허나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단 말인가. 위지 대사마 같은 거물의 딸이 장서열을 물에 한 번 빠뜨렸다고 관직에서 물러나다니, 그렇다고 자신이 위지 대사마를 위해 주청을 드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차피 조정에서 장신성의 영향력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보처럼 각 세력의 다툼을 그저 멀뚱히 지켜보고 있었다. 조정의 외곽에 선 그를 누구도 자신의 패거리에 끼워주려 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움을 사는 사람도, 그에게 정무에 참여하기를 권하는 사람도 없었다. 장신성은 오로지 지켜보는 것 외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걸, 심지어는 무엇이든 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그조차도 한 가지 알아낸 사실이 있었다. 이번 사건에서 서풍엽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심지어 서풍엽은 위지 대사마를 향해 첫 번째로 칼을 휘두른 사람이었다. 그리고 단 이틀 만에 조정을 혼란 속에 몰아넣었다.
장신성은 넝쿨째 굴러든 예비 사위의 능력을 다시 한번 가늠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서풍엽을 등에 업고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게 즉시 딸을 시집보내고 싶었다.
장신성은 행동이 빠르고 결단력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그는 며칠간 서풍엽이 상부에 들를 때마다 몹시 성의를 보였고, 딸을 불러 서풍엽과 함께 하도록 해 주었다. 또한 그는 조옥언 몰래 서풍엽에게 소식을 전해 주거나, 조옥언이 그에게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흘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서풍엽은 장신성의 말에도 아랑곳없이 여전히 조옥언을 위해 끊임없이 선물을 바쳤다. 장신성으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만 세상에서 홀로 동떨어진 듯했다.
한편, 장서전은 더욱 바빠졌다. 조정이 혼란한 시기에도 그는 황궁의 안전을 유지해야 했다. 그러나 그 역시 최근 상서방(上書房)에서 나오는 상소문이 어느 때보다 많아진 탓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리고 최근 그는 자신의 신분을 모르는 사람의 입을 통해 동생과 관련한 놀라운 소문을 전해 들은 터였다.
장서전은 지난 며칠 동안 줄곧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머니와 황제가 과거 특별한 관계였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심지어 그의 가문에는 조정을 좌지우지할 만한 큰 힘이 있었다니!
임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장서전은 누이동생의 뜰에 눌러 앉아 하루 종일 들은 이야기를 풀어 놓으며 말했다.
“믿겨져? 상대는 황제 폐하야. 원하면 어떤 여인이든 얻을 수 있는. 그런데 넌 어째서 하나도 놀라는 기색이 없지?”
미소를 머금은 장서열이 금을 타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본디 얻지 못한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것이니까요. 게다가 어머니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죠.”
장서전은 금세 수긍했다. 맞는 말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아름다운 용모에 좋은 품성을 지닌 데다 조국공의 적녀였다. 그러한 어머니가 궁에 들어가 비(妃)가 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머니는 황후가 되지 못했다.
장서열이 애석함에 주먹을 불끈 쥔 장서전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아버지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요.”
장서열은 장서전이 아버지를 매우 따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버지 역시 오라버니를 예뻐했다. 물론 지극정성은 아니었지만, 허위로 포장된 마음일지라도 실컷 예뻐하는 시늉을 해주는 것만으로 족했다.
장서전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생각만 해본 거야.”
장서열이 화제를 바꿔 물었다.
“듣자 하니 서양이가 전시(殿試, 황제가 황궁에서 친히 주관하는 과거 시험)에 응시한다던데, 혹 진사(進士)에 합격할지도 모르겠어요.”
“헛소리. 걔가 겨우 몇 살이라고. 설령 그런 능력이 있다고 해도 권 공자처럼 귀한 신분도 아니잖아. 권 공자는 유일하게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한림(翰林)에 들어갔지. 물론 학문이 뛰어나기 때문이지만 그보다도 그의 신분이 결정적이었어.”
장서전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서양이는 안 돼. 이틀 전에 폐하께서 국자감 학생이 곧바로 전시에 응시할 수 있는 규정을 없애 버리셨거든. 이제 그 애도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복수 시험을 치러야 해.”
장서열이 의미가 불분명한 미소를 지으며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장서전이 자신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왜 그렇게 쳐다봐?”
“제법이네요. 그동안 업신여겼던 사람을 견제할 줄도 알게 되고 말이에요.”
누이의 말에 장서전이 어색함을 금치 못했다. 어느덧 성숙함이 깃든 얼굴에 부자연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구염… 아니, 열셋째가 황자가 된 마당에 불가능한 일이 또 뭐가 있겠어.”
그가 감개무량한 얼굴로 계속 말했다.
“인생은 정말 불가사의하지. 어떻게 그가 황후가 밀어주는 강력한 태자 후보가 된 걸까? 과거에 그에게 원한을 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야.”
장서전은 몹시 부끄러워하며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그는 과거 호되게 구염락을 괴롭힌 전력이 있었고, 나중에는 그저 도망친 것뿐이었다.
“난 지금 그에게 엄청 잘해. 절도 꼭 빼놓지 않고.”
장서열이 흐뭇한 얼굴로 답했다.
“잘했어요.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해요.”
허리를 굽힌 농교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웃으며 방에 들어왔다.
“아가씨, 이렇게 늦은 시간에 누가 아가씨를 만나러 왔는지 맞혀 보세요.”
장서전이 코웃음을 쳤다.
“사람 성가시게 하는 매부말고 또 누가 있겠어.”
“역시 도련님께서는 영명하세요. 세자께서 매파(媒婆, 혼인을 중매하는 자)를 데리고 혼담을 건네러 오셨어요. 하지만 노비가 듣기로는 오늘은 그냥 형식적인 거고, 앞으로 세 번은 더 오셔야 구체적인 혼인 날짜를 논의할 수 있을 거래요.”
농교가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가씨, 이제 혼수를 준비하셔야겠어요.”
그 말에 장서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며 말했다.
“내가 가서 만나 보겠어. 감히 내 누이를 데려가려 하다니!”
장서열은 굳이 그를 잡지 않은 채 멀어지는 오라버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마음이 쓰리고 아팠다.
‘이제 정말 혼사가 정해지는 걸까.’
이번 생에서 그녀가 놓치는 거라곤 겉만 번지르르했던 전생에서의 혼사뿐이었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의 딸 상아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