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8화
위지 부인의 얼굴에도 침울함이 가득했다. 같은 연배인 그녀는 황제와 조옥언 사이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만회할 방법이 있습니까?”
위지 대사마가 위지해어를 바라보자 위지해어가 몸을 약간 움츠렸다. 그가 이를 꽉 깨물고 말했다.
“우선 궁에 들어가 상황을 보리다. 어쩌면 내 걱정이 지나친 것일지도 모르겠소.”
말을 마친 그는 갱생이 불가능한 두 모녀를 버려두고 자리를 떠났다.
위지 부인은 심란했다. 진작 알았다면 장서열을 골려 주려던 딸의 계획을 저지했을 것이다. 겉보기에 바보처럼 보이는 장서열이 그리도 뛰어난 금 연주 실력을 보여줄 줄 누가 알았으랴. 결국 조바심이 난 딸은 제 꾀에 스스로 넘어가 버렸다.
애초에 충왕부의 연회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 다른 이가 놓은 덫에 걸려 기어코 장서열을 망신 주려고만 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
“괜찮다. 이 어미가 있잖니. 아무 일 없을 게야.”
* * *
다음날, 조정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장서열이 물에 빠진 이유가 위지해어 때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위지 대사마가 여러 해 동안 측근이 저지른 악행을 방관했으며, 그의 만행 또한 그 정도를 넘어서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뇌물로 받은 산더미 같은 은자와 그의 호화로운 생활은 이미 황제에 버금가는 수준이었다. 환락에 빠져 관리의 위엄을 실추시킨 죄목이 낱낱이 드러나자 그는 이제 어떠한 법으로도 구제가 불가능했다.
충왕부, 이부, 예부, 서북 장군, 당 씨 가문 등이 함께 올린 상소는 이날 아침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위지 대사마가 미처 손을 쓸 틈도 없었다. 뒤를 이은 현천기의 상소문은 마치 쐐기를 박듯 그의 악행을 낱낱이 입증했다.
예상대로 황제는 조 씨 모녀의 이름 앞에서 맥을 추지 못했다. 그는 상소문 첫 줄에 적힌 ‘장 씨 가문 적녀의 생명이 위태롭다.’라는 문장을 읽자마자 그 즉시 대사마를 처형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장서열은 황제인 그조차도 단 한 번 꾸짖어본 적이 없는 착한 아이였다. 서열이가 다른 사람에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건 곧 황제인 자신을 무시한 것과 다름없었다.
“여봐라! 당장 대사마를 잡아 옥에 가두어라!”
물론 처벌 이유는 장서열이 물에 빠져서가 아니라, 그가 저지른 숱한 악행 때문이었다.
며칠간 조정은 요동쳤다. 대대적인 숙청이 이루어지며 많은 이들이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좌천당했다. 조정은 불안과 혼란에 휩싸였다.
관리들은 서둘러 집안을 단속하고 자산을 이동시키는 등 최대한 몸을 사렸다. 심지어 거느리는 첩의 수까지 줄이고자 했다. 헌원오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밖에서 낳아온 그의 유일한 아들 헌원상은 다소 불법적인 방법으로 족보에 올랐으나, 그가 재빨리 손을 쓴 덕분에 구설수에 오르는 일을 피했다.
서풍엽은 몹시 바빴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이가 그러했다. 조정의 모든 이들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여 최대한 자신의 사람들을 빈자리에 채워 넣기 위해 혈안이 되어 돌아다녔다.
그 사이 장서열은 건강을 회복했다. 그녀는 볕이 좋은 날이면 바깥에서 햇빛을 쬐며 꽃을 그리고 자수를 놓았다. 조정의 일은 아버지가 오라버니가 굳은 얼굴로 집에 돌아오는 것을 제외하면 그녀와는 눈곱만큼도 관계가 없는 일이었다.
살구빛 긴 치마를 입은 장서열이 무성하게 자란 오동나무 아래에서 열심히 자수를 놓았다. 그녀의 몸에 내려앉은 햇살이 부드러운 빛을 발했다. 물을 마신 농교가 장서열에게 부채를 부쳐 주었다.
“아가씨, 노비가 자세히 알아봤는데요. 헌원 씨 가문의 공자께서 주 태부를 스승님으로 모신다고 합니다. 매일 주 태부의 저택으로 공부하러 간대요.”
말을 마친 농교는 다시 한번 물을 들이켰다. 그들이 어찌나 말이 많았는지 농교는 함께 대화를 나누다가 기절할 뻔했다.
“현 씨 가문은?”
농교는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야 비로소 아가씨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떠올릴 수 있었다.
“아, 현 씨 가문은 문이 닫혀 있었어요.”
장서열이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속눈썹 위에 내려앉은 햇살이 간지러운지 그녀가 눈을 살짝 비볐다.
“문이 닫혀 있어?”
농교 역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문이 닫혀 있었어요.”
언제나 같은 모습이었다. 현 씨 가문의 저택은 매번 굳게 닫혀 있었으며 사람이 없었다. 사람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 찾아 볼 수 없었으니,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그 집 하인들은 청소도 하지 않나 봐요.”
주저 없이 결론을 내린 농교가 질문했다.
“아가씨, 그 집에 정말 2품 고관이 사는 게 맞나요? 문 앞에 시위조차 없던 걸요?”
고개를 숙인 장서열은 말없이 바늘귀에 실을 끼웠다. 반쯤 수놓은 웅응격공도(雄鷹擊空圖, 매가 창공을 나는 그림)가 웅장한 기세를 자랑했다.
“헌원 씨 가문의 공자가 올해로 일곱 살이 됐지, 아마?”
“네, 아가씨.”
장서열은 전생의 기억을 되짚어 보며 손에 쥐고 있던 바늘을 비단 위에 꽂았다. 전생에서 헌원상은 첩을 들이지 않았다. 주소유를 두려워한 것이든 겁이 많은 탓이든, 어쨌든 그는 일평생 오직 주소유 한 명을 처로 두었다. 그리고 출중한 아들 다섯과 사람들이 앞 다투어 데려가려 했던 딸 한 명을 길러냈다.
‘어디서 어린 첩이라도 구해다 헌원상 곁에 붙여 놓을까?’
헌원상이 주소유를 좋아하게 된 이유는 간단했다. 높은 신분에 학식까지 뛰어났던 주소유가 그와 기꺼이 혼인했기 때문이었다.
장서열은 생각에 잠겼다. 주소유와 조건이 비슷한 여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모두 자신의 뜻대로 조종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었다. 복수를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여인을 불구덩이로 밀어넣어야 했다.
매의 날개를 응시하며 한 땀 한 땀 수를 놓는 장서열의 마음이 소용돌이쳤다. 그녀는 일단 헌원상과 주소유의 혼사는 방해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장 바람직한 일은 그들이 무리 없이 혼인을 한 뒤, 전생에서처럼 자신의 잘난 사위를 낳는 것이었다.
실이 몇 차례 꿰어지자 곧 새로운 날개가 모양을 드러냈다. 곁에 서 있던 초 마마가 끊임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수놓는 솜씨가 나날이 발전하시네요. 어릴 적에는 주머니 하나를 만드는 것도 엉성했던 게 아직도 기억나는데 말이에요.”
완정이 말했다.
“이제 아가씨의 자수 솜씨는 봉 사부님과도 막상막하예요.”
장서열은 웃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헌원상이 주소유를 아내로 맞이한들 또 어떠하랴. 어차피 그가 주소유를 사랑하고 말고는 별개의 문제였다.
“헌원가(軒轅佳)가 나를 호수 유람에 초대했던 것 같은데?”
옷을 갈아입고 온 농교가 다가왔다.
“네, 하지만 항상 가지 않으셨잖아요.”
그동안의 생활이 너무 편안했던 탓에 그 못된 부부와 음흉한 현천기를 잊고 있었다. 괘씸한 두 남녀가 혼인을 올릴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장서열은 혼인 전까지 헌원상에게 많은 관심을 기울여줄 생각이었다. 그도 세상에 매력적인 여자들이 많다는 걸 충분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는가.
장서열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번졌다. 그녀의 손에서 참매가 거의 모양을 갖춰가고 있었다.
* * *
현천기는 며칠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화를 참느라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처럼 치밀한 사람조차 뜻밖에 이용을 당한 탓이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총력을 기울였으나 예상치 못하게 타인의 계략에 넘어갔다. 십삼황자에게 신임을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빼앗겼으니 분노하는 것도 당연했다.
‘서풍엽!’
현천기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가 얼굴에 쓴 면피(面皮)를 홱 잡아 벗자 순간 매혹적인 얼굴이 드러났다. 그는 조금도 아까운 기색 없이 얼굴을 벅벅 긁은 뒤, 약을 꺼내 얼굴에 바르고 다시 거칠게 면피를 붙였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없는 외모 따위는 필요 없다. 정말로 손에 쥐어야 할 건 권력이야!’
현천기는 돌연 침대를 박차고 일어났다. 며칠 동안 병을 앓던 기색도 없이 그는 곧바로 마차를 준비해 황궁으로 향했다.
* * *
구염락은 서재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바깥의 소란은 그의 평온을 조금도 방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이번 기회를 틈타 굳이 자신의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거나 조급하게 황후에게 존재감을 드러내려 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달라질 것은 없었다. 누군가 그를 지지하면 권력을 얻을 것이고,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면 티끌처럼 하찮은 황자로 몰락할 것이다.
소리자가 불진(拂塵, 태감이 들고 다니는 먼지떨이 모양의 의장)을 한 번 휘두르고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전하, 현 공자가 왔습니다.”
초승달처럼 하얀 장포를 걸친 구염락은 한 손에는 낡은 서책 한 권, 다른 손에는 바둑돌 한 알을 쥐고 있었다. 세상사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 아득하고 고결한 모습이었다.
“들라 하라.”
안내를 받은 현천기가 들어왔다. 그는 서재와 똑같은 적갈색 비단 도포를 걸친 채로 서 있었다. 신분에 꼭 맞는 차림새였다. 뿐만 아니라 현천기는 일부러 겸손해 보이려 하거나 눈에 띄려 하지 않아서 없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십삼황자를 뵈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바둑돌을 둔 구염락이 다시 새로운 돌을 집어 들었다.
“물러가라.”
허리를 굽힌 소리자가 나머지 하인들을 데리고 방에서 나갔다. 구염락의 입가가 조소로 일그러졌다.
“난 네가 영영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해 송장이라도 치워야 하는 줄 알았구나.”
어색하게 서 있던 현천기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부끄럽습니다. 소인, 하나의 일에서 두 번이나 좌절을 겪은 후 잠시 울화증에 걸린 것뿐입니다. 지금은 다 나았으니 이제 전하를 위해 좋은 바둑돌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울화증?”
퍽 대단한 성격이었다. 잠시 그를 쳐다본 구염락이 다시 바둑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부끄럽습니다.”
“아니다. 떨쳐냈으면 됐다.”
“소인, 반드시 전하를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구염락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현천기의 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현천기 역시 그의 반응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과 십삼황자는 권력을 추구한다는 데에서 매우 닮아 있었고, 납작 엎드리는 건 늦어서 좋을 게 없었다.
“그럼 결과를 기다려 주십시오. 소인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현천기는 언행이 민첩한 자였다. 구염락 역시 꾸물대는 성격이 아니었기에 곧 그에게 물러가라 명했다.
문이 닫히자 구염락은 바둑돌을 놓던 손을 멈췄다. 현천기가 했던 말을 곱씹던 그에게 평소 외출을 꺼리는 장서열이 떠올랐다. 그는 현천기가 말한 두 번의 좌절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청산에서의 일은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일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