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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97)화 (97/449)
  • 제97화

    장서열은 잠시 경악했지만 곧 통쾌함을 느꼈다. 상대는 권세를 주무를 줄 아는 고수였다. 아무리 자신의 앞에서 온순한 척 행동해도 결코 만만하게 얕볼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우선 풍엽 오라버니의 말대로 해.”

    “네, 아가씨.”

    말을 마친 완정이 밖으로 나갔다. 조옥언과 충왕비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침상에 앉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다른 생각이 있는 게야? 위지해어가 뛰어내려도 그만, 아니어도 그만인 일 아니냐.”

    장서열이 여전히 손 안에 놓인 침대 장식을 만지작대며 대답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누군가 제위를 두고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어요.”

    순간 깜짝 놀란 조옥언과 충왕비가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장서열은 매우 비통한 표정으로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조심하지 않으면 소용돌이의 중심에 빠질 거예요.”

    무언가를 번뜩 깨달은 조옥언이 미친 사람처럼 악을 질렀다.

    “이게 다 풍윤 그 천하의 빌어먹을 자식 때문이로구나!”

    조옥언은 뱃속에서 뜨거운 감정이 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황제에게 몇 번이고 따귀라도 날려야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충왕비가 얼른 조옥언을 붙잡고 진정시키며 조용히 말했다.

    “세월이 이리 지났는데 지난 일은 말해 뭐해요.”

    조옥언은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대체 그 자가 무엇이기에 이토록 오랜 세월 자신을 고생시킨단 말인가.

    ‘무능력하고 나약해 빠진 놈!’

    차라리 짐승이 그보다 나았다. 조옥언은 그에게 눈이 멀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장서열은 그들에게 아직 화를 낼 기력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두 어머니는 지난 세월 동안 각자 자신의 자리를 굳건히 지킨 여인들이었으며, 사랑이나 남편 따위에 매달리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다.

    판단력을 상실했던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딸 상아(裳兒)는 모친의 보호를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장서열은 새삼 어머니가 무척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전생에서 황후 자리에서 쫓겨나 냉궁에 갇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끝내 사약을 받지도, 참형에 처해지지도 않았다. 어머니가 최선을 다해 막아낸 결과였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시종일관 얼마나 멍청했던가.

    ‘내 딸 상아야.’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장서열이 비단 이불을 힘껏 움켜쥐자 조옥언이 긴장한 얼굴로 즉시 달려와 딸의 손을 펴 주었다.

    “서열아! 어디가 안 좋은 것이냐? 서열아, 이 어미가 있잖니. 의원! 어서 의원을 불러라!”

    충왕비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의원을 부르러 황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밖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큰일이야! 장서열의 상태가 안 좋다는군!”

    “열이 난대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대!”

    소문은 사람을 거칠수록 점점 사실과 멀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전원에 남은 남자들의 귀에 들어갔을 때, 이미 장서열은 죽기 직전의 상태가 되어 있었다.

    쨍그랑!

    구염락이 쥐고 있던 젓가락이 땅에 떨어졌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그가 바람처럼 달려 나갔다. 순식간에 전원에서 사라진 그는 어느새 장서열이 누워있는 침상 앞에서 온몸을 떨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을 본 그가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서풍엽을 밀어냈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구염락이 장서열의 손을 잡고 중얼거렸다.

    “서열 누님, 누님… 일어나 보세요. 아직 누님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는데. 어떻게 먼저 떠나려는 거예요…….”

    서풍엽의 눈이 날카롭게 변했다. 그가 억지로 구염락을 떼어냈다.

    “서열이는 괜찮아. 울화가 치밀어 잠시 의식을 잃은 것뿐이니 좀 쉬게 하면 곧 나아질 거야.”

    서둘러 장서열의 손을 이불 속에 넣어 준 충왕비가 거의 울기 직전인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순간 왠지 모를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으나, 그녀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서열이가 쉴 수 있도록 나가 주시지요. 방금 약을 복용했으니 한숨 자고 나면 괜찮을 겁니다.”

    조옥언은 구염락을 잠시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누군가 옹립하려 한다는 아이가 바로…….’

    구염락이 망연한 얼굴로 주변에 선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의 서열 누님이 곧 죽을 거라고 하지 않던가.

    서풍엽은 구염락을 끌어내며 최대한 침대에서 멀어지게 하려 했다. 잠시 몸부림치며 버티던 구염락이 결국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풍엽이 입을 열었다.

    “서열이는 괜찮습니다. 오늘 대접이 변변치 못해 송구스럽습니다. 실례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전하와 권 공자께서 손님 배웅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구염락은 무어라 해명하고 싶었지만 딱히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평정심을 회복한 그가 이내 뒤를 돌아 나갔다. 방금 전까지 울먹인 사람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몹시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구염락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서풍엽은 복잡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금 전 그가 방으로 들어오던 순간……. 과연 자신의 추측이 맞는 것일까.

    충왕비가 아들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이건 여인의 직감이었다. 서풍엽은 어머니께 오해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어머니께서도 여인들을 배웅하셔야지요.”

    고개를 끄덕인 충왕비는 침상에 있는 예비 며느리를 한 번 바라본 후 이내 뒤돌아 나갔다.

    한편, 조옥언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린 딸아이가 의식을 잃을 정도로 울화가 쌓일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위지해어의 일 때문에? 그럴 리 없었다. 그렇다면 왕부에서 누군가가 괴롭힌 걸까? 그건 더욱 말이 되지 않았다.

    조옥언의 시선이 자연스레 서풍엽을 향했다. 딸을 이렇게까지 화나게 만들 만한 사람.

    ‘설마 풍엽과 위지해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혹 줄곧 다른 여인이 있었던 거라면?’

    조옥언은 드디어 이유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자고로 남자란 열 여자를 마다하지 않는 법이었다. 서풍엽은 올해 호기심 많은 열다섯 살이니, 딸아이에게 미안할 일을 저질렀대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그렇다면 통방(通房)을 들이면 될 것을. 어찌 성인군자인 척 첩도 들이지 않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단 말인가!’

    서풍엽은 조옥언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지만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하인에게 침상을 지키라고 분부한 그는 방에서 물러나와 해결해야 할 일들을 처리했다.

    *

    화가 난 현천기가 별실의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쳐 박살을 냈다. 그는 조옥언이 위지해어에게 물에 뛰어내리라고 할 줄은, 심지어 위지해어의 부친인 위지 대사마가 이에 동의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멍청한 것! 위지 가에 살길을 열어주다니!’

    궁지에서 벗어난 위지 대사마는 어떻게든 다시 입지를 다질 터였다. 누군가 빠른 걸음으로 그의 곁에 다가왔다.

    “도련님, 위지해어가 난간 위에 섰지만 끝끝내 뛰어내리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도리어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자신이야말로 서풍엽의 배필이고 장서열은 절대 안 된다고 소리쳤다고 합니다. 위지 대사마는 화가 나서 혼절했고요.”

    현천기는 잘됐다고 생각했다. 늙은 여우 같은 위지 대사마가 정말로 혼절했을 리 없었다. 조옥언의 서슬을 피하기 위한 연기였을 것이다.

    “지금은 충왕부를 나왔고?”

    “예, 위지 가는 충왕부를 나왔습니다. 상태가 위중한 장서열만 아직 충왕부에 남아 있습니다.”

    “알겠다.”

    몸을 일으켜 나오던 현천기는 채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른 아군을 마주쳤다.

    “현 공자께서 이 늙은이에게 여쭤보셨으니 답하겠습니다. 방금 세자는 위지 씨 가문의 처벌을 요청하는 상소문을 올렸습니다. 허나 늙은이가 쥔 이 문서에는 위지 대사마의 측근이 저지른 악행에 대한 증거가 담겨있습니다. 현 공자, 이 상소문의 파급력은 세자의 것과는 차원이 다를 것입니다.“

    현천기의 얼굴에 괴이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서풍엽이 이리도 발 빠르게 움직일 줄이야. 설마 미리 준비하고 있었던 것인가? 몹시도 사랑하는 정혼자를 위해서?’

    진 공공이 손에 든 상소를 쥐고 물었다.

    “공자, 이 상소를 올리시겠습니까?”

    진 공공은 현 씨 가문과 오랜 시간 교류해 온 태감이었다. 그는 현 씨 가문이 누군가에 뒤처지는 것을 이번에 처음보았다. 현천기의 안색은 몹시 좋지 않았다.

    “올려야지요. 안 올릴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현천기가 소매를 뿌리치며 자리를 떠났다.

    ‘서풍엽! 넌 장서열이 물에 빠져 죽는 게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 * *

    위지 대사마가 거칠게 방문을 닫았다. 아래쪽에 선 부인과 딸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다.

    “내가 그렇게 일렀거늘, 어째서 뛰어내리질 못해! 이제 잘 됐구나. 폐하께서 이번 일로 얼마나 사람 속을 뒤집어 놓겠느냐!”

    말을 마친 그가 혹여나 마지막 말이 새어나갔을까 긴장하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위지해어는 억울해 하며 울고 있었다. 가련하고 슬픈 표정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은 아무도 그녀를 동정하지 않았다.

    “제가 민 게 아닌데 왜 저보고 뛰어내리라고 하십니까! 사람들이 제게 뭐라고 수군대는지 아세요? 모두 저보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했습니다. 제가 민 게 아니라면 그렇게 아니라고 우기더니 뛰어내릴 이유가 뭐냐면서요! 그리고는 저보고 입만 살아서 꼴에 자존심만 세다고 입을 놀리더군요. 아버지, 어째서 제 입장은 생각지 않으세요!”

    위지 부인은 몹시도 마음이 아파 딸을 안아 주었다. 위지 대사마는 격노했다.

    “그래, 사람들이 네 흉을 봤단 말이지? 네 흉을 봤어?”

    머리끝까지 화가 치민 위지 대사마가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다가 별안간 천둥처럼 소리를 질렀다.

    “겨우 그까짓 이유로 뛰어내리지 않았단 말이냐! 그런 하찮은 이유로 가문을 파멸시키다니!”

    딸을 몰아붙이는 남편의 모습에 위지 부인이 서둘러 딸을 자신의 뒤로 숨겼다.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가문을 파멸시키다니요?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잖습니까. 그게 딸아이가 이리도 겁먹는 것보다 중요하단 말입니까!”

    위지 대사마는 당장 부인을 내치고픈 심정이었다.

    “지금 조정의 상황이 어떤지 알기나 하오? 십삼황자가 누구의 사람인지 알기는 하냔 말이오! 지금 내 존재가 눈엣가시나 마찬가진데, 이제 폐하께 자진해서 약점을 잡힌 셈이 됐소. 대체 이게 집안을 파멸시키는 게 아니면 뭐란 말이오!”

    남편의 말에 위지부인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어렸다.

    “그리도 심각합니까?”

    “이건 그나마 최선의 예측일 뿐이오. 아마 그들은 덫을 놓고 우리가 잡히기만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오.”

    아버지의 말에 위지해어는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기억이 떠올랐다. 충왕부로 향하기 전, 누군가 그녀에게 장서열은 금 연주에 능하지 못하고 성격이 소심해 애먹이기 쉽다고 귀띔해 줬던 것이다.

    불안해진 위지해어가 고개를 숙였다. 차마 부모님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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