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6화
순식간에 뜰을 지나친 조옥언은 사람들에게 보랏빛 뒷모습만 남긴 채 빠르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 자리에 선 채 궁금한 소식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방금 그 여인이 조 부인이야?”
확실히 장신성은 조옥언에게 한참 부족한 상대였다.
“맞아. 과거에 연경 최고의 미인이었는데 지금도 그 명성 그대로인 것 같군.”
“하지만 성격이 사나운 것 같은데?”
그와 비슷한 나이대의 사람들이 말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냥 사나운 정도가 아니었다. 과거 그녀는 쫓아다니며 황제를 때릴 만큼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럴 때면 황제는 그저 숨기 바빴다.
오랫동안 외출을 하지 않은 그녀였다. 그녀가 바깥출입을 했다는 건 사안의 중요성을 떠나 이미 황제의 귀에 이 모든 사실이 들어갔을 거라는 걸 의미했다. 대사마는 그야말로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셈이었으며, 이미 장신성을 이용하려던 계획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침상에 앉은 장서열은 붉은 옷을 입고 긴 머리를 늘어뜨린 채 침대 휘장에 드리워진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차분하게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소란을 멈춘 위지해어는 이내 모퉁이를 돌아 걸어오는 조옥언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녀를 놀라게 한 것은 조옥언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 뒤를 쫓고 있는 부친의 모습이었다. 이 모습을 본 위지 부인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노야께서 오고 계신단 말인가. 게다가 지금 조옥언에게 사죄를 하고 있지 않은가! 좌상부는 우리 위지 가에 비하면 하찮은 1품 관원일 뿐인데, 어찌!’
조옥언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위지해어를 물에 빠뜨리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합의는 없었다.
조옥언은 자신의 뒤를 따르는 이들을 무시한 채 방으로 들어서며 홍촉에게 문을 닫으라고 지시했다. 그나마 충왕비가 비집고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다른 이들은 모두 문 밖에 그대로 서 있어야 했다. 막 의원을 데리고 도착한 서풍엽 역시 홍촉에게 저지당했다.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는 위지 대사마의 얼굴이 다시 흙빛으로 변했다. 국가의 병권을 장악한 그에게 이런 굴욕은 난생 처음이었다. 심지어 직접 사죄까지 했으나 그야말로 철저히 무시당했다.
‘속 좁은 계집 같으니라고! 전혀 굽힐 줄을 모르는군. 그러니 황후가 못 된 게지!’
화가 난 위지 대사마는 코에서 불이라도 뿜을 듯 씩씩거렸다. 뒤를 따라 온 충왕은 하인에게 부인들을 후원으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한 뒤 예의상 그를 위로했다.
“대사마께서 이해하십시오. 장 부인께서 워낙 딸을 사랑하는 마음이 깊습니다. 대인을 멸시하는 뜻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그는 충왕의 말을 믿지 않았다.
‘이게 멸시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조옥언은 조정을 멸시한 것이다!’
충왕은 조금도 위지 대사마를 동정하지 않았다.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영악하게 머리를 굴린 자였다. 이제 와 조옥언이 무자비한 태도를 취한대도 할 말이 없을 터였다.
그제야 뒤따라 온 장신성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자 위지 대사마가 그를 노려보았다. 아내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하는 작자였다.
장신성은 일이 틀어졌음을 알았다. 대사마의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던 조옥언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쳐 들어가 그녀를 질책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의 뒤에는 조국공부가 있었고, 그는 지난 이 년간 무엇 하나 이룬 것이 없었다. 그는 말없이 구석으로 물러나 자신의 출셋길을 막은 조옥언을 저주했다.
* * *
충왕부 밖으로 눈에 띄지 않는 그림자 하나가 유유히 지나갔다. 그러다 돌연 뒤를 돌아본 그가 충왕부 저택으로 시선을 던지며 무언가를 조용히 기다렸다.
조옥언과 대사마에게 소식을 알린 건 최고의 한 수였다. 이제 그는 가만히 앉아 쌍방이 서로 싸우기를 기다리다 떨어지는 이득만 취하면 그만이었다.
게다가 장서열이 마침내 자신을 위해 큰일을 해냈다. 그간 십삼황자가 그녀를 비호해 온 것이 헛되지 않은 셈이었다.
현천기는 마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어떠한 기척도 없이 자리를 떴다.
* * *
문이 닫히자 장서열은 어머니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 단호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어머니, 우선 아무 것도 묻지 마세요. 기다리던 소식이 오면 그때 다시 상의하기로 해요.”
충왕비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말이니?”
조옥언은 말없이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평소와 다름없는 딸의 안색을 확인한 후 마침내 놀란 마음을 추슬렀다. 누군가 기회를 틈타 자신의 딸을 해한 줄로만 알았다. 그녀는 딸아이가 분별 있는 아이임을 믿었다. 딸이 괜찮다면 분명 괜찮은 것이다.
문 밖에는 잠시 자리를 비웠던 서풍엽이 다시 돌아와 있었다. 완정이 문을 밀고 들어와 공손하게 절을 하며 고했다.
“세자께서 말씀하시길, 모두 아가씨의 뜻대로 하라고 하십니다.”
고개를 끄덕인 장서열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웃었다. 여리고 부드러운 미소였다.
“어머니, 어째서 아직도 위지해어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가요? 계속 기다리다 마음에 병이 생길 것 같습니다.”
장서열의 말에 충왕비가 놀란 얼굴을 했다. 조옥언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즉시 문을 열고 나가 옥석으로 조각된 난간 앞에 섰다. 그녀의 냉담한 목소리가 울렸다.
“보아하니 위지 대사마께선 사죄를 하고 싶지 않은 모양입니다.”
위지 대사마의 이마에서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역시나 조옥언은 쉽게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녀가 평판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부인, 제 딸이 잘못했습니다. 어린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런 것이니…….”
“대사마의 딸은 살인미수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종인부(宗人府, 왕족, 귀족을 감독하던 관청)와 대리시(大理寺, 재판, 규탄, 형벌을 맡아보던 관청), 둘 중 하나를 택하시지요. 혹여나 나중에 제가 대인께 사죄할 기회를 드리지 않았다고 탓할 생각은 마십시오!”
조옥언이 냉랭한 기세로 곧바로 그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위지 부인이 분노를 터뜨렸다.
“조옥언! 살인미수라니! 네 딸이 죽기라도 했느냐? 어째서 내 딸을 살인자 취급하는 것이냐!”
“닥치시오!”
대사마가 즉시 눈을 부라렸다. 부인은 일을 성사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고 있었다. 두 모녀에게 충왕부와 연을 맺기 위해 어떻게든 장서열을 구슬러 친해지라 일렀거늘, 결국 일을 이렇게 망쳐 놓았다. 멍청한 장서열 하나 다루지 못하는 딸자식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장 부인, 진정하시고 이 늙은이의 말도 좀 들어 주시지요. 당연히 제 여식이 잘못한 일입니다. 허나…….”
조옥언은 대꾸하기도 귀찮았다. 그녀는 어서 돌아가 딸을 돌봐야 했다.
“홍촉, 향을 피우거라. 향이 다 탈 때까지 위지 가의 여식이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그 즉시 대리시에 고발할 것이다.”
말을 마친 그녀는 위지 대사마의 말을 무시한 채 그대로 몸을 돌려 다시 방으로 돌아갔다. 분노한 위지 부인이 대성통곡했다.
“조옥언, 이 막돼먹은 것! 필시 곱게 죽지 못할 것이다! 네가 장신성 같은 형편없는 인간에게 시집간 것도 다 천벌을 받은 것이다!”
동시에 남편에게 뺨을 얻어맞은 위지 부인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한 채 곧장 바닥으로 쓰러졌다. 위지해어가 황급히 달려 나와 어머니를 끌어안았다.
“아버지! 어째서 어머니를 때리시는 거예요! 제 잘못이 아닙니다. 장서열이 스스로 뛰어내린 거라고요!”
튀어 나올 듯 두 눈을 부릅뜬 위지 대사마가 씩씩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럼 너도 뒤따랐어야 할 게 아니냐! 어린 것이 그리 못된 짓을 저지르다니, 내 어찌 너 같은 딸을 두었단 말인가!”
딸은 이미 물에 뛰어내렸어야 했다. 그걸 못해 이토록 상황을 악화시킨 것이다. 위지해어가 연못에 뛰어내리기만 한다면 그는 즉시 상황을 반전시키고 이 치욕을 반드시 되갚아 줄 참이었다. 딸은 그간 서풍엽에게 들인 공을 허공에 날리고 있었다.
“아버지…….”
한 손으로 딸을 끌어당긴 위지 대사마가 남들이 지켜보지 않는 틈을 타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뛰어내리기만 한다면 이 아비가 오늘 장서열에게 당한 수모를 반드시 갚아 줄 것이다. 세자의 첩이 되고 싶지 않으냐?”
이 일로 위지해어의 건강이 상하기라도 한다면 충왕부에서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했다. 놀란 위지해어가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불효자식 같으니라고! 내 평소에 널 너무 오냐오냐 키운 것이로구나. 감히 장 씨 가문의 여식을 건드리다니!”
곁에서 지켜보던 부인들은 애석한 심정이었다. 조옥언에게는 오히려 위지 부인의 악다구니가 뜨끔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모두가 궁금해 하지만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그 이야기는 황제가 연관되어 있어 어디에서도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장신성은 수치심에 목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순결하지 못한 여인을 받아주었으니 오히려 그녀의 복이 아닌가! 자신이 아니면 혼인조차 할 수 없었을 여자였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녀가 대단히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것처럼 지껄이고 있었다. 정말 억울한 건 장신성 자신이었다.
충왕이 불쾌한 얼굴로 위지 대사마를 바라보았다. 그가 딸에게 무언가 속삭이는 모습을 보았던 것이다.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충왕이 돌연 아들을 바라보았다. 완정에게 무어라 얘기를 끝낸 그가 부친을 향해 걱정하지 말라는 눈짓을 보냈다. 충왕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 지경이 된 이상 장서열 역시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명성을 지키면서 자신이 벌인 일 역시 스스로 헤쳐 나가야 했다. 장서열은 이 상황을 조종하기로 마음먹었다.
조옥언이 걱정스레 딸을 바라보았다.
“괜찮은 것이냐? 대수롭지 않은 일에 어찌 그리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게야. 너무 걱정 말거라. 무슨 일이 생기든 이 어미가 있단다.”
충왕비도 얼른 거들었다.
“암, 그렇고말고. 이 시어미도 있잖니. 나도 위지해어를 가만 두지 않을 생각이다.”
감동에 젖은 장서열은 그대로 울고 싶어졌다. 두 생애에 거쳐 어머니의 지극한 보살핌을 받고 있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단 말인가. 또다시 적의 등을 떠밀어주다니!
그녀는 규방에 숨어 있는 여인까지 장기판의 말로 이용하려는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여인의 작은 심술까지 조종하여 어머니를 상부 밖으로 나오게 만든 자였다.
‘네가 먼저 날 건드렸으니 나도 더 이상 가만히 앉아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내 어머니를 겨냥했으니 너도 대가를 치러야겠지.’
그녀는 더 이상 조용히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설령 지나친 계략으로 서풍엽의 마음이 떠난다 해도 이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서열이 표정 변화 없는 얼굴로 완정을 불렀다.
“만약 정말로 위지해어가 뛰어내린다면 너는 곧바로…….”
장서열은 완정의 귀에 오랫동안 속삭였다. 완정이 놀란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세자께서 이미 분부하셨어요, 아가씨. 아가씨가 말씀하신 것과 거의 똑같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