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위지 대사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 됐다. 장신성의 마지막 말이면 충분했다. 아무렴 자신의 딸이 이유 없이 장서열을 물에 빠뜨렸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 아비가 직접 딸의 과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은가.
‘내 그 모친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여인이 낳은 딸이니 변변할 리 없겠지!’
위지 대사마는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이제 자신이 친히 장서열에게 사과한다면 바깥출입조차 않는 조옥언이 더 이상 뭘 할 수 있겠는가. 뒤늦게 소란을 피우고 싶어 봤자 이미 남편이 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일개 부녀자의 몸으로 그 말을 거역할 순 없을 터였다. 결국 이번 사고는 흐지부지 되어 황제의 귀에 전해지지도 않은 채 이대로 조용히 묻히게 될 것이다.
대사마가 사뭇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아닙니다. 모두 이 늙은이가 잘못 가르친 탓이지요. 따님에게 폐를 끼쳐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자, 그럼 이렇게 합시다! 제 못난 여식에게 어떤 벌을 내릴지는 장 부인께 맡기는 게 어떻습니까?”
장신성은 그의 제안에 감히 응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그는 하마터면 대사마의 다리를 부여잡을 뻔했다. 이미 조정에서 모든 연줄이 끊기다시피 한 그에게 다만 한 사람이라도 동아줄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지금 이 순간 장신성은 딸을 물에 빠뜨려준 위지해어가 몹시도 고마웠다.
“위지 아가씨는 총명하고 철이 든, 실로 괜찮은 규수입니다.”
그래도 차마 ‘모범적인 규수’라는 말까지는 입 밖에 나오지 않았다.
“의원이 말하길, 딸아이의 건강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합니다. 그저 가벼운 사고였을 뿐입니다. 앞으로 두 아이가 자주 어울려 서로 오해가 풀렸으면 좋겠군요. 아이들은 모름지기 싸우면서 친해지는 법이지요.”
말을 마친 장신성이 웃었다. 충왕은 진심으로 그를 쥐어박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품격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인간이었다.
‘암, 자주 어울려야 하고 말고. 어서 친해져야 사이좋게 한 남편도 섬길 수 있겠지.’
위지 대사마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만약 황제가 구염단신을 그토록 장서열과 맺어주려 하지 않았다면, 그는 가문의 부귀영화를 위해 장서열을 며느리로 맞이하려 했을 것이다. 처가의 힘을 빌어 출세가도를 달리는 건 이미 좌상 장신성이 몸소 증명한 일이었다.
“장 대인, 과연 인품이 뛰어나십니다. 이 늙은이가 진심으로 탄복했습니다.”
위지 대사마는 문득 황제와 조옥언의 관계를 장신성 또한 알고 있는지 몹시 궁금했다. 아마 모를 것이다. 그런 일은 누구도 함부로 입 밖에 낼 수 없었고, 특히 남편에게는 더더욱 알릴 수 없는 일이었다. 황제가 네 부인을 연모하니 당장 그녀 곁에서 물러나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더는 참지 못한 충왕이 장신성을 향해 이를 꽉 깨문 채 말했다.
“우선 아이들을 만나는 게 좋겠습니다. 두 분의 친목은 나중에 다지시지요.”
충왕이 특히 ‘친목’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장신성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장신성은 이를 못 본 체했다. 잘난 충왕이 자신의 고충을 알 리 없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왕야. 후원에는 모두 여인들뿐인데 저희가 가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어차피 의원도 이상이 없다 하였고, 제 딸아이는 본래 몸이 건강하니 이번 일은 그냥 이렇게…….”
“왕야!”
언제나 차분하기 그지없던 충왕부의 집사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왕야, 조 부인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문 앞으로 왕비마마께서 친히 맞이하러 가셨습니다!”
일순간 전원의 공기가 멎었다. 충왕이 멍하니 집사를 바라보았다.
‘옥언이… 옥언이 왔다!’
위지 대사마는 할 말을 잃었다. 장신성이 가장 중요한 말을 끝내려던 참이었다. 그는 빨리 하던 말을 마저 하라고 다그치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조옥언이 어떻게 온 거지? 황후가 되려다 궁상맞은 서생의 아내로 전락한 여인이 아니던가. 이제껏 상부 밖으로 나온 적이 없었는데……. 이제 남들이 손가락질 하는 건 두렵지 않은 게야?’
위지 대사마는 더는 쓸모가 없어진 장신성을 힐끗 바라본 뒤 서둘러 정신을 가다듬었다. 조옥언에게 맞서기 위해서는 잠깐이라도 준비가 필요했다. 그는 부디 그녀가 세월에 마모되어 서슬 퍼런 성격을 죽이고 보통의 부인네가 되어있기만을 바랐다.
손에 든 가락지를 만지작대는 구염락의 눈빛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이제 서열 누님의 억울함이 풀리겠군.’
입구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후원을 나온 여인들은 전원에 모인 남자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모조리 문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 기세에 관원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조 부인? 그게 대체 누구길래 다들 이러는 거지?’
많은 이들이 조옥언이 누구인지 떠올리려는 가운데, 기억력이 좋은 몇몇 이들은 머지않아 그녀를 기억해 냈다. 호기심에 고개를 길게 뺀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장신성에게로 향했다. 그가 방금 내뱉은 호언장담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억울한 일을 당한 딸아이의 모친이 남편의 생각에 동조할 리 만무했다.
장신성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부인의 행차가 가장 불만인 사람은 바로 그였다. 조옥언은 절대로 그의 관직 생활을 고려해 주지도, 이번 일을 쉽게 넘어가지도 않을 것이다.
군중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조옥언이라니!
과거 연경 최고의 미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혼인 후 좀처럼 바깥출입을 하지 않아 오랜 세월 사람들에게서 잊혀졌던 그녀는 등장하자마자 모든 이들에게 초유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제 스무 살 남짓인 이들에게 조옥언은 이름만 들어본 여인이었다. 그들은 그저 좌상부에 외출을 싫어하는 부인이 있으며, 장 대인이 그런 부인을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들은 그녀가 아마도 어딘가 몸이 아프거나, 아니면 박색이라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충왕의 얼굴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으나 그녀의 이름만으로도 눈 깜짝할 새에 과거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오 년 전, 그녀는 아이들의 혼담을 위해 충왕부에 온 적이 있었으나 충왕은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그는 지금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충왕은 소년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벌써 다 큰 어른이 된 지 오래인데, 아직도 과거의 유약한 모습에서 벗어나질 못 하다니.
한편, 위지 대사마는 뒷짐을 지고 서 있었다. 자신이 적절하게 대처한다면 아무리 조옥언이라도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결코 억지를 부릴 수는 없을 거라고 그는 굳게 믿었다.
대문 앞으로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일순간 긴장한 부인들이 한껏 고개를 치켜들며 대문 밖을 응시했다.
꽃으로 수놓아진 보랏빛 치맛자락이 나타났다. 물결치는 긴 치마는 맑게 갠 하늘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며 순식간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이어 마치 까마득한 하늘에서 내려온 듯 조그만 세월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는 그녀의 얼굴이 등장하자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는 보련계(宝莲髻)로 틀어 올린 머리에 단정한 비녀 장식을 꽂고 연보라색 겉옷을 걸친 채였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용모에는 약간의 노기가 서려 있었다.
장서열의 용모는 이미 그 어머니의 아름다움을 짐작케 했지만 실제로 부인을 만나본 이들은 많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은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세월마저 비켜간 그녀의 자태는 여인들로 하여금 괜스레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녕 마흔이 다 되어가는 여인이 맞단 말인가! 무능한 남편을 만난 게 안타깝구나. 저렇게 매혹적이라니!’
일찌감치 마중을 나와 있던 충왕비는 서둘러 조옥언에게 다가가려다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자 곧장 움츠러들었다. 큰일이었다. 어찌 되었든 서열이가 억울한 일을 당한 건 자신이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까닭이었다.
조옥언이 주변의 시선을 무시한 채 곧장 걸어 들어왔다.
“네 변명 따위는 듣고 싶지 않다. 이번 일은 위지 가의 딸을 걷어차 물에 빠뜨린 후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이 광경을 지켜본 이들은 감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조옥언의 성격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예전보다 더욱 공포스러워진 듯했다. 노여움에 휩싸인 조옥언의 얼굴은 다시 없을 아름다운 용모에 서릿발 같은 단호함이 더해져 누구도 감히 그녀를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게 만들었다.
조옥언은 자신이 억지를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무슨 이유에서든 자신의 딸을 괴롭혔다면 그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했다. 먼저 딸이 겪은 수모를 상대 역시 그대로 당하는 것이 순서였다. 함께 앉아 시시비비를 따지는 건 그 다음의 일이었다. 그래야만 비로소 사죄며 보상 따위를 논할 수 있을 것이다.
충왕비는 빠르게 조옥언의 뒤를 따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드디어 위지해어를 내쫓을 수 있게 되었다. 위지해어를 물에 빠뜨려 단단히 혼을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비단 조옥언뿐만이 아니었다.
전원에 머물던 남자들 역시 그녀를 맞이하러 나오는 중이었다. 위지 대사마는 때마침 걸어오는 조옥언과 마주쳤다.
그동안 미인이라면 질리도록 봐 온 위지 대사마 역시 조옥언을 마주한 후 깜짝 놀랐다. 그는 그제야 황제께서 아직까지 그녀를 잊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장 부인, 이 늙은이는…….”
그러나 조옥언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그의 곁을 지나쳤다. 위지 대사마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조옥언, 감히 내게 망신을 주다니! 폐하께서 평생 네 부적이 되어줄 성싶으냐?’
차마 입 밖에 낼 수 없는 욕지거리를 홀로 삼킨 그가 이내 황급히 조옥언의 뒤를 쫓았다. 어쨌든 현재 황제는 정말로 그녀의 부적을 자처하고 있으므로 체면을 구겨서라도 반드시 사죄를 해야 했다.
조옥언을 다시 본 충격에서 벗어난 충왕 역시 서둘러 정신을 차린 후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사나운 성격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대사마는 이번에 큰 곤욕을 치를 것이 분명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충왕은 순간 더할 나위 없는 통쾌함을 느꼈다. 이번에야말로 위지 대사마가 어떻게 머리를 굴릴지 기대가 됐다. 장신성을 조종해 대충 사건을 무마하려던 그는 이제 혹을 떼러 왔다가 되려 혹을 붙인 셈이었다.
구염락은 조옥언을 한 번 쳐다본 뒤 곧 시선을 거뒀다. 그는 서열 누님이 훗날 모친의 나이가 되었을 때는 지금보다 훨씬 더 매력적일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님은 분명 저렇듯 안하무인으로 굴지는 않을 것이다.
권서함은 조옥언의 미모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딸 장서열의 용모가 그만큼 출중한 탓이었다. 다만 그는 장 부인의 성격에는 제법 놀랐다. 방금 전 위지 대사마가 예의 바르게 공수를 보이며 말을 건넸지만 장 부인은 그를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설령 대사마가 누구인지 몰랐다 하더라도 뜰에 가득한 관원들, 심지어 충왕까지 그녀의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