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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94)화 (94/449)
  • 제94화

    시간이 흘러 대주국은 평화로운 국가가 되어 있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온 집안에 곡식이 가득 찬 태평성대가 이어졌다. 그리고 황제에게는 불온한 세력을 제압할 만한 충분한 병력이 있었다.

    위지 대사마의 영향력은 점차 줄어들었다. 문치를 강조하는 황제가 이제와 전쟁을 일으킬 리 없었다. 이제 다음 대의 황제가 어떠한 길을 걸어갈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만약 새로운 황제가 호전적인 성격이라면 사방(四方) 변경의 패권이 재편성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새로운 황제 또한 지금처럼 문치를 중시 여긴다면 모든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사방 변경의 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하는 위지 대사마 역시 큰 변동 없이 지금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게 될 것이었다.

    수도는 부귀했으나 변경은 척박했다. 변경의 군대가 조정을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했다. 조정의 위지 대사마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조정에서 병권을 통솔하는 위지 대사마가 연경에서 끌어올 수 있는 모든 군량과 무한한 병마를 제공 받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방 변경의 대장군들이 모두 대사마의 자리를 노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서북에서는 바로 이 틈을 노렸다. 설령 대사마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더라도 위지 씨 가문만 끌어내린다면 변경을 구속하고 있던 많은 조치에서 해방될 것이다. 이는 그들이 십삼황자를 지지하는 까닭이기도 했다.

    현천기 역시 위지 대사마를 끌어내리면 변경의 세력이 수도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서북에서도 십삼황자에게 힘을 실어 주기에 용이할 것이다.

    현천기는 언뜻 보기에 십삼황자가 문치에 탁월한 사람으로 비춰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를 굳게 믿는 서북의 세력으로서는 십삼황자를 꼭두각시로 여기고 그가 황위에 오르도록 전력을 기울일 게 뻔했다.

    현천기는 제 손에서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일이 즐거웠다. 따라서 그는 친히 위지 대사마를 공격하고자 했다. 서북 세력에 고분고분한 느낌을 주면서 함께 가지고 놀 생쥐를 바치려는 것이었다.

    위지 대사마가 마차에서 내렸다. 함부로 웃지 않는 그에게서 사람을 주눅 들게 하는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 부패 여부를 떠나 그의 압도적인 기운은 전장에 선 장군의 전형이었다. 그는 풍요로움에 젖어 나태해지거나 주색에 빠져 나약해지지도 않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충왕부에 나타났다.

    연로한 위지 대사마에게는 수많은 자녀가 있었지만 그중 어느 하나 특출난 인재는 없었다. 그는 평소 위지해어가 무슨 짓을 저지르든 크게 개의치 않았으나, 이번 일은 달랐다.

    그가 직접 움직인 것은 충왕부의 지위가 높고 장신성이 좌상이어서가 아니었다. 하필 딸이 건드린 상대가 조옥언의 딸이기 때문이었다. 관직에 몸담은 자라면 그 누구도 소홀히 대할 수 없는 존재, 영명한 황제를 우매하게 만드는 유일한 여인. 애초에 조 씨 모녀와 옳고 그름을 따지는 건 불가능했다.

    그는 이미 연로했으나 차고 넘치는 부와 권력을 누렸으므로 남은 인생에 여한은 없었다. 오랜 세월 대사마로 지내며 친구만큼이나 많은 적을 갖게 된 그에게 도전하는 세력은 늘 있어 왔지만, 그는 결코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에 하나 패배하는 일이 생긴다 해도 이미 노쇠하였기에 사직을 청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그는 늘그막에 딸아이가 이런 골칫거리를 안겨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는 딸이 장서열과 그럭저럭 한 남편을 섬길 수 있는 사이가 될 것이며, 심지어 그녀가 멍청한 장서열을 통제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충왕부를 등에 업은 그의 권력은 최소한 스무 해는 더 거뜬할 수 있을 터였다.

    위지 대사마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위지해어 이 멍청한 것, 잘하기는커녕 오히려 일을 망쳐 놓다니!’

    위지 대사마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 모습은 흡사 딸의 일로 깊이 상심한 아버지 같았다.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

    그는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단지 신분을 따져 행동에 옮길 뿐이었다.

    “아닙니다.”

    만나고 싶지 않은 자리라도 어쩔 수 없었다. 밖에서 그를 기다리던 충왕이 사람을 데리고 나와 친히 그를 맞이했다.

    “위지 대인을 놀라게 해 드렸습니다. 제가 관리를 소홀히 한 탓입니다. 부인께서는 내원(内院)에 계시니 건너가 보시지요.”

    마치 집안의 허물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듯 위지 대사마가 탄식하며 충왕을 바라봤지만 그는 이를 못 본 척했다. 그는 위지해어를 며느리로 삼고픈 마음이 없었기에 굳이 위지 대사마와 공동으로 적개심을 불태울 이유가 없었다.

    순간 민망해진 위지 대사마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실컷 재 보거라. 후에 장서열이 아이를 낳지 못하기라도 하면 네가 아들의 첩을 들이지 않고 배길 수 있을 것 같으냐? 그때는 오히려 내 딸을 첩으로 달라 빌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선 눈앞의 일을 해결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위지 대사마가 초조한 얼굴로 걸음을 떼다가 돌연 발걸음을 멈췄다.

    “하마터면 십삼황자께서 오셨다는 걸 잊을 뻔했군요. 이 늙은이는 먼저 전하께 인사를 드린 후 어리석은 식구들을 단속하러 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곧바로 전원(前院)으로 향했다. 충왕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전원에는 십삼황자뿐만 아니라 장신성도 있었다. 그는 이런 때에 장신성과 위지 대사마가 만나는 걸 원치 않았지만 위지 대사마의 말은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충왕은 부디 장신성이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지 않기만을 바랐다.

    위지 대사마가 등장하자 전원에 있던 이들이 급히 다가와 예를 갖춰 인사했다. 그가 직접 움직인 건 놀라운 일이었다. 대사마가 친히 나섰으니 그의 성의를 봐서라도 좌상부에선 큰 소란을 일으키지 못할 터였다. 눈치 빠른 중견 관원들은 위지 대사마의 속셈을 눈치채고 여우 같은 늙은이라며 속으로 혀를 찼다.

    구염락의 표정은 여전히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소리자는 주인이 불쾌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십삼황자를 뵈옵니다. 제 여식이 철이 없어 여러분의 흥취를 깨뜨렸으니 면목이 없습니다. 소인, 이 술을 올려 여러분께 사죄를 드리고자 합니다.”

    난감한 충왕의 얼굴이 즉시 일그러졌다. 위지 대사마는 이번 사고를 사소한 일로 축소시키려 하고 있었다.

    장신성은 군중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는 대사마로부터 서둘러 달아나고 싶었다. 저런 거물급 인사까지 놀라게 할 일이었단 말인가. 연경에서 위지 대사마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인물은 많지 않았다. 허나 딸아이는 뜻밖에도 대사마의 딸과 충돌을 일으켰다.

    ‘자기가 무슨 금지옥엽이라고!’

    장신성은 이번 일로 위지 대사마가 친히 움직였다는 말에 더욱 초조해져 땀을 뻘뻘 흘렸다. 그는 혹시라도 위지 대사마에게 자식 교육을 똑바로 시키라는 훈계를 들을까 노심초사하며 오늘도 자신에게 폐를 끼친 적녀를 원망했다. 지금이라도 대사마에게 용서를 구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구염락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고작 술 한 잔으로 무마하겠다고? 이런다고 서열 누님이 물에 빠진 게 없던 일이 되느냐? 네 딸을 똑같이 물에 빠뜨릴 게 아니라면 고작 이따위 술 한 잔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위지 대사마는 십삼황자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내 장신성을 찾기 시작했다. 장신성은 출중한 능력을 지닌 자인 것만은 분명했으나 권력에 빌붙는 성격이었다. 따라서 그자를 먼저 설득할 수 있다면 생각보다 일이 쉽게 풀릴 터였다.

    위지 대사마의 꿍꿍이를 알아챈 충왕의 표정이 굳어졌다.

    “위지 대인, 어서 내원으로 가시지요. 부인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건 급하지 않소.”

    위지 대사마는 노련했다. 충왕은 교활하고 사귀기 어려운 사람이었지만 장신성은 달랐다. 마침내 장신성을 찾아낸 위지 대사마가 급한 걸음으로 다가가 괴로운 얼굴로 말했다.

    “장 대인께서 아직 계셨군요. 한 집안 식구를 몰라 뵈었습니다. 본래 같은 편과는 다투지 않는 법인데, 제 딸이 댁의 귀한 따님에게 잘못을 범했으니 이 늙은이가 동생에게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장신성이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동생? 내가 위지 대사마와 친분이 있었던가?’

    그러나 당황한 것도 잠시, 순식간에 대사마의 ‘동생’이 된 장신성은 이내 감격에 젖었다. 비록 태자와의 끈은 끊어졌으나 다시 또 기댈 언덕이 생긴 셈이었다. 그가 즉시 아부 섞인 목소리로 답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대인. 아이들끼리 장난을 치다 보면 작은 사고가 생길 수도 있는 법인데, 이렇게 친히 와 주시다니요.”

    구염락이 술잔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장신성을 걷어차 연못 물이 얼마나 차가운지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권서함 역시 고개를 들어 장신성을 바라보았다. 장난이라니. 참으로 담백한 묘사였다. 허나 초봄의 수온은 결코 어린애 장난이 아니었다.

    충왕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으나, 위지 대사마는 주변의 시선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오로지 이기적으로 자신의 살 길만을 강구했다.

    “제 여식이 철이 없는 것은 이 늙은이가 교육을 잘못시킨 탓입니다. 가시지요. 우선 아이들을 만나봅시다. 내가 따님에게 사죄를 드리지요.”

    장신성이 황급히 그를 붙잡았다.

    “연경의 어른이신 대사마께서 직접 사과를 하시다니 말도 안 됩니다. 아이들끼리 놀다 일어난 사고일 뿐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요!”

    구염락은 기가 찼다. 직접 사과하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란 말인가. 위지 대사마가 아버지인 이상, 위지해어가 정말로 장서열을 물에 빠뜨린 게 아니라 하더라도 부모로서 반드시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충왕은 몹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며 장신성을 향해 끊임없이 눈짓을 보냈다. 그는 장신성이 예의상 격식을 차리는 게 아니라 정말로 대사마에게 아부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충왕은 이미 위지해어가 자신의 아들에게 들러붙은 것만으로 충분히 골치가 아팠다. 이참에 위지해어를 단념시키지 않는다면 장서열이 물에 빠지는 수모까지 겪은 건 억울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사람의 목숨이 오간 사고였다. 그런 큰일을 저지르고도 고작 사과 한 마디로 끝낸단 말인가.

    충왕의 마음은 안중에도 없이 장신성은 가슴을 두드리며 위지 대사마에게 충심을 표했다.

    “제 여식은 제가 잘 압니다. 워낙 짓궂은 구석이 있는 아이지요. 분명 딸이 언행을 잘못하여 귀댁 아가씨의 심기를 어지럽혔을 겁니다.”

    순간 권서함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신성을 향했다. 참으로 대단한 부친이었다. 만일 누군가 자신의 누이인 여아를 물에 빠뜨렸다면 아버지는 결코 그를 살려 두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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