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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93)화 (93/449)
  • 제93화

    서풍엽은 잠시 넋을 잃은 채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용모가 출중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따라 그 아름다움이 더했다. 서풍엽은 그녀의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연정이 가득 담긴 시선을 던졌다.

    “이제 우리 혼례일을 정할 때가 된 것 같아.”

    “네?”

    장서열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서풍엽은 멍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다정한 웃음이었다.

    “갈수록 바보가 되는구나.”

    장서열이 눈을 흘기자마자 동시에 방으로 뛰어든 완정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아가씨, 부인께서 오고 계시답니다.”

    당황한 장서열이 되물었다.

    “어머니가 오신다고?”

    장서열은 순간 머리가 새하얘지는 걸 느꼈다. 어머니를 잊다니, 치명적인 실수였다. 복수에 눈이 멀어 뒷일을 생각지 못했다.

    딸을 끔찍할 정도로 귀히 여기는 어머니였다. 딸에게 사고가 생겼다는 소식은 평소 바깥출입을 하지 않던 어머니까지 충왕부로 달려오게 만들었다. 모두 자신의 잘못이었다. 잠깐 승리의 기쁨을 맛보자고 어머니를 걱정시키다니!

    그녀의 목적은 오직 위지해어의 명성을 추락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자신의 혼사는 원만히 진행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어머니와 집안 어른들을 놀라게 할 거라는 건 미처 생각지 못했다.

    소식을 들은 충왕비가 황급히 다가왔다.

    “지금 장 부인께서 오시는 중이라 했느냐?”

    그녀는 조옥언이 정말로 바깥출입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완정이 답했다.

    “그렇습니다, 왕비마마. 이미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완정이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충왕비는 즉시 의복을 바로 한 뒤 초조한 시선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예비 며느리는 아무 탈이 없었다. 장서열을 바라보던 그녀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만하기를 천만다행이었다.

    “이따 이 시어미를 위해 어머니께 잘 말씀 드려 주거라. 내 결코 널 일부러 홀로 둔 게 아니었단다. 잘 알고 있지?”

    서풍엽은 쓴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장서열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막 무슨 말을 하려던 충왕비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하인들을 향해 황급히 외쳤다.

    “어서 바닥을 쓸고 향을 피워라! 조 부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넋 놓고 뭣들 하는 게냐! 마당도 다시 쓸고 등롱을 달아라. 하나라도 부족하면 내 너희를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모두들 빨리 움직이거라!”

    지난번 조옥언이 방문했을 당시 예를 갖춰 맞이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던 그녀였다. 그녀는 기필코 그날의 실수를 만회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서열 아가씨에게 이불 한 채를 더 내주어라!”

    말을 마친 충왕비는 하인 무리를 거느린 채 부랴부랴 자리를 옮겼다. 방문이 닫히고 외부와 단절되자 그제야 장서열은 머리가 터질 듯한 고민에 휩싸였다.

    바깥에는 이런저런 술렁임만 있을 뿐 더 이상 위지해어의 울음소리와 항변은 들리지 않았다. 위지해어에 대한 관심을 거둔 이들은 이제 온통 조옥언을 두고 수군대기에 바빴다.

    “세상에! 정말 조옥언이 온다고?”

    “난 스무 해가 다 되도록 그녀를 보지 못했어.”

    “조옥언이 누군데요?”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소리가 장서열의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사람들은 마치 전설 속 선녀를 대하듯 어머니를 입에 올리고 있었다.

    장서열은 여전히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어떡하지? 찬바람이라도 맞아 더욱 아파 보이도록 할까?’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어머니는 반드시 끝을 볼 것이고, 이를 위해 누군가는 희생해야 했다. 자신이 불쌍한 척 연기를 하는 건 문제가 아니었다. 그녀는 자칫 위지 씨 가문이 이번 일로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할까 두려웠다.

    만약 위지 대사마가 딸을 두둔하고자 조옥언에게 대항한다면 조옥언은 다시 집요하게 반격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위지 대사마의 모든 부귀영화는 끝이었다.

    장서열 역시 모르지 않았다. 황제는 평생에 걸쳐 어머니에게 지난날에 대한 보상을 해 주고 싶어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을 아내로 맞이하는 황자에게 황위를 물려줄 어리석은 마음까지 품고 있었다.

    ‘만에 하나 위지 대사마가 어머니를 괴롭힌다면…….’

    황제는 무슨 트집을 잡아서라도 위지 대사마를 내칠 것이다. 게다가 이 시기는 전생에서 무관으로는 최고 자리에 올라있던 위지 씨 가문이 문관에 의해 몰락하는 시기와도 일치했다.

    ‘안 돼! 이렇게 되면 현천기 그 비열한 작자가 다시 문무의 난(文武之乱, 문신과 무신이 서로 대립하면서 일으킨 난)을 일으켜 결국 날 무너뜨릴 거야!’

    장서열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떻게 ‘문무의 난’처럼 큰일을 잊고 있었단 말인가. 그러나 구염락은 이를 노리고 있었으며 현천기는 그보다 더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오늘 그녀가 저지른 일은 자진해서 무덤을 판 격이었다.

    과거 현천기는 폐후(废后, 황후를 폐위함)의 명분을 만들어 마치 그의 첩을 내치듯 자신을 폐위시켰다. 장서열은 미칠 것만 같았다. 만일 이번 일로 인해 현천기가 최고의 공로를 세울 기회를 잡는다면 그녀로서는 울분에 못 이겨 피를 토할 일이었다.

    ‘아직 원한을 갚지도 못했는데 원수에게 영광을 안겨 줘야 한다니, 게다가 하필이면 그런 발칙한 작자에게!’

    장서열은 도저히 화를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그녀는 생각 없이 행동한 스스로를 탓했다. 이번 일은 자칫 잘못하면 국가적인 대란의 도화선이 될 수도 있었다.

    장서열은 심지어 오늘 초대 받지 못한 위지해어가 연회에 나타난 것 역시 음흉한 현천기가 암암리에 손을 쓴 것은 아닌지, 혹 자신의 대응 역시 그자가 계산한 결과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지난번 청산에서 헌원가를 해치려 했던 것 또한 현천기였다. 그 일을 자신이 망쳤기 때문에 이번에는 역으로 그가 자신에게 반격한 것이다.

    장서열은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졌다. 그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자신이 미래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모든 게 현천기의 뜻대로 이루어졌을 때 겪게 될 고초만을 생각했다.

    그녀가 별안간 침상에서 벌떡 일어났다. 집에 돌아가야 한다. 중간에서 어머니를 저지해 함께 집으로 돌아가 이번 사고가 자신의 계략이었음을 알려야 했다. 어머니가 위지 씨 가문을 괴롭히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장서열은 차라리 또 다시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 현천기에게 이용당하고 싶지 않았다.

    서풍엽이 다시 그녀를 침대에 눕히며 걱정스레 바라보았다.

    “왜 그래? 얼굴이 너무 빨개. 함부로 움직이지 마.”

    서풍엽이 발버둥치는 그녀를 다독였다.

    “의원이 깨어난 뒤에는 함부로 움직이면 안 된다고 했어. 특히 여자아이는 물에 빠졌을 때 잘 치료하지 않으면 몸에 병이 남는대. 누워 있어.”

    그래도 장서열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서풍엽이 힘주어 그녀를 눕히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

    “침대에서 나오면 안 돼. 어머니께서 이미 부인님을 맞이하러 가셨으니 걱정 마.”

    장서열은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일부러 아픈 척했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왠지 이번 일은 득보다 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야 겨우 사랑 받는 기쁨을 누리고 있었는데……. 괘씸한 현천기! 만일 나를 이용해 득을 보려 한다면 내 반드시 배로 갚아 주마!’

    장서열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당겼다. 생각을 달리 해보기로 했다. 현천기가 구염락 앞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려 한다면 일단은 내버려 둬야 했다. 하지만 현천기의 머리에서 나왔던 성지(圣旨)를 떠올리자 장서열은 치미는 분노로 인해 오장육부가 다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무능하고 덕이 없는 장서열이 악독한 살인을 저질렀으니, 모의천하(母仪天下, 어머니의 사랑으로 만백성을 보살피는 황후)에 어울리지 않아 폐위함이 마땅하다고?’

    서풍엽이 장서열이 뒤집어쓴 이불을 잡아당겼다.

    “서열아, 어서 이 손 놔. 그러다 숨 막히면 어떡해.”

    “…….”

    “서열아, 우리 서열이는 세상에서 제일 착하잖아. 응? 제발 손을 좀 놔 봐.”

    어르고 달래는 서풍엽의 말에 쑥스러워진 장서열이 이불에서 손을 뗐다. 그녀가 돌연 그렁그렁한 눈으로 손을 뻗어 서풍엽을 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어찌 이리 박복할 수가 있단 말인가. 물에 빠져 스스로 화를 자초하다니!

    하지만 그렇다고 밖으로 달려 나가 실은 제 스스로 물에 뛰어내린 거라고 소리칠 수도 없었다. 이대로 어머니를 적의 계략에 말려들게 해야 하는가.

    서풍엽이 안타까워하며 그녀의 등을 쓰다듬었다. 조금 전까지 멀쩡하던 그녀가 왜 갑자기 우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열아, 왜 그래? 울지 마. 어디가 아픈 거야? 아까 의원이 발견하지 못한 부분이 있는 거야? 서열아, 어디가 아픈지 말해 봐.”

    “마음이 아파요.”

    만약 위지해어가 먼저 뛰어내렸다면 장서열은 위지해어가 첩으로 들어오는 걸 참아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에 동의할 리 없었다. 결국 어머니는 위지 씨 가문과 척을 졌을 것이고, 황제는 자연히 어머니의 편에서 위지 씨 가문을 공격했을 터였다.

    이 경우에도 결국 승자는 현천기였다. 그는 어떤 식으로든 최고 병권을 손에 쥔 가문을 무너뜨리고자 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그녀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난 이 년간 집에 머물며 바보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어떻게 어머니를 간과했단 말인가.

    ‘현천기, 난 너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운명이로구나!’

    서풍엽은 계속해 그녀의 등을 쓰다듬다가 문득 남녀가 유별함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뗐다.

    “가서 의원을 불러올게.”

    말을 마친 그가 빠른 걸음으로 뛰어나갔다.

    농교와 완정은 바닥을 바라보며 아무 것도 못 본 사람처럼 굴었다. 장서열은 잠시 후 다시 기운을 차렸다.

    “완정, 넌 어머니를 마중 나가도록 해. 어머니가 도착하시거든 곧장 이쪽으로 모셔 와.”

    “네.”

    올해 예순을 훌쩍 넘은 위지 대사마는 소년 시절부터 전쟁터에서 맹활약을 펼친 인물이었다. 그는 용맹한 기세로 만 리 사막을 누비며 백전백승의 성과를 이뤄냈고, 이후 마흔 살이 되자 갑옷을 벗고 연경으로 돌아와 대사마(大司马)가 되어 천하의 병권을 장악했다.

    누구도 그가 세운 공로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의 혁혁한 전공(戰功)은 대주국 최고의 병권을 지휘하기에 결코 모자람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지나치게 욕심을 부려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의 저택에 문객이 넘쳐났으며 군에서의 영향력 또한 너무 막강했던 탓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황제는 ‘무위(无为, 자연에 맡기고 작위를 가하지 않는 정치 사상)’와 ‘휴양생식(休养生息,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키며 나라의 회복기를 갖는 것)’을 중시 여겼고, 때문에 변경을 제압할 수 있는 대장군을 필요로 했다. 그는 중앙으로 집중된 위지 대사마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지켜 주며 대주국이 순조롭게 발전하는 데 박차를 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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