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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92)화 (92/449)
  • 제92화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방 밖으로 울려 퍼졌다.

    “네가 장서열을 미는 걸 내 눈으로 똑똑히 봤어.”

    “나도 봤어. 비록 선명하지는 않았지만 네가 민 건 확실히 봤어.”

    위지해어는 사방에서 쏘아 대는 곱지 않은 시선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녀는 장서열을 밀지 않았다. 정말로 밀지 않았다. 정말로 장서열 혼자서 뛰어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녀가 장서열을 미는 듯한 장면을 확실히 본 사람들이 있었다.

    서풍엽이 인파를 헤치고 뛰어들었다. 구염락이 그 뒤를 바짝 따랐다. 충왕은 남녀가 내외해야 한다는 것도 잊은 채 황급히 달려왔다.

    이미 깨어난 장서열은 수척해진 얼굴로 침상에 기대어 탕약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는 이제껏 가여운 소녀가 되어본 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런 척하는 법을 모르지는 않았다.

    침상에 들이닥친 서풍엽이 장서열을 정신없이 살펴보았다.

    “괜찮아? 어디가 아파? 춥지는 않고?”

    서풍엽은 말을 잇는 것과 동시에 장서열의 떨리는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 역시 긴장한 탓에 손발이 차갑게 식어있었다.

    긴장한 서풍엽의 모습에 장서열은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의기양양함이 차오르는 걸 느꼈다. 그녀는 여인들이 왜 걸핏하면 아픈 척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군가에게 이렇듯 애틋한 보살핌을 받는다는 건 설령 거짓말로 얻은 관심일지라도 마음을 기쁘게 했다.

    “머리가 아파요…….”

    의술에 대한 지식과 관계없이 서풍엽은 직접 만져 봐야 안심할 수 있다는 듯 즉시 그녀의 이마에 손을 짚었다. 감히 나의 서열이를 괴롭히다니, 당장이라도 위지해어를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장서열은 따뜻한 시선으로 서풍엽을 바라보며 한껏 어리광을 부렸다. 사랑하는 이가 보여 주는 관심은 어린 소녀의 마음을 수줍음과 부드러움으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여전히 젖은 모습으로 응석을 부리는 그녀의 모습은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구염락은 서풍엽에게 지나치게 달라붙어 응석을 부리는 장서열의 모습에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입으로는 아프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이미 작은 얼굴에는 혈색이 돌아와 있었다. 틀어 올리지 않고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은 기억 속에서의 모습처럼 부드럽고 윤이 났다. 구염락은 앞으로 나가지 못한 채 살짝 뒤로 물러섰다.

    ‘나를 보지 못한 걸까?’

    뜻밖에도 그녀는 정말로 구염락이 들어온 걸 발견하지 못했다. 예전에 그는 그녀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존재이자 절대로 눈을 떼지 않는 존재였다. 어째서 지금은 자신을 보지 않는 걸까.

    구염락은 문득 아무리 높은 권력이라도 지금 느끼는 공포를 메울 수는 없다는 걸 알았다. 무언가 확실히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그의 마음을 두드렸다. 그는 당장 장서열에게 돌진해 내가 여기 있다고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서열 누님이 서풍엽을 향해 연약한 모습으로 한껏 어리광을 부리는 게 두려웠다.

    인파를 밀치며 구염락을 따라온 소리자는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보고 황급히 입을 열었다.

    “전하… 전하……!”

    그러나 정신을 차린 후에도 구염락의 눈은 여전히 단념하지 않은 채 장서열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열 누님은 내가 잘 지내는지 관심이 없는 걸까? 어째서 누님은 나를 쳐다보지 않는 걸까.’

    그의 눈빛이 너무 강렬해서였을까, 혹은 장서열이 그 시선에 너무 익숙해서였을까. 마침내 그녀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순간 구염락의 눈에서 사람을 녹일 듯한 광채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하마터면 그리운 이름을 외치며 자신의 서열 누님을 향해 달려들 뻔했지만, 다행히도 그의 뛰어난 자제력이 이를 막았다. 그는 제자리에 선 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당사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애틋함만큼은 감출 수 없었다.

    그를 향해 살짝 고개를 끄덕인 장서열은 다시 가여운 눈빛으로 서풍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풍엽은 그녀에게 어디가 아프냐 물었고, 그녀는 모든 곳이 다 아프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물에 빠진 자가 누릴 수 있는 모든 행복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정신이 온통 멍해진 구염락이 순간 휘청거리며 문에 기댔다. 소리자가 걱정스런 얼굴로 즉시 구염락을 부축했다.

    “전하…….”

    그녀가 마땅히 어리광을 부려야 할 사람은 자신이었다. 그녀를 위로해줄 사람도, 그녀가 억울함을 토로해야 할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용하고 온화한 서열 누님,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결코 드러내지 않는 서열 누님.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걸까. 어떻게 저리도 예쁜 얼굴로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걸까.

    조용히 목소리를 낮춘 소리자가 힘겹게 주인의 무게를 견디며 속삭였다.

    “전하, 이곳은 저희가 있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주변이 온통 여인으로 가득합니다.”

    구염락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돌변했다. 바로 그 여인들이 자신의 서열 누님을 물에 떨어뜨렸다. 그 계집들 때문에 자신의 서열 누님이 다른 사람의 응석받이가 된 것이다.

    구염락이 군중 속에서 발악하는 여자아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는 뻔뻔하게도 서열 누님을 밀지 않았다고 우기는 중이었다. 설령 그녀가 누님을 밀지 않았다 해도, 그녀는 자신의 서열 누님을 짜증나게 만든 사람이었다. 만약 실제로 누님이 스스로 연못에 뛰어내렸다면 그 역시 그녀가 몰아붙인 결과이리라.

    ‘세상에 남자가 그리 많은데 하필 서열 누님이 좋아하는 사람을 탐내다니.’

    구염락은 가슴을 파고드는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사람들을 마주한 그는 이내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장서열에게서 받은 충격을 떨쳐 내고 평정심을 회복했다.

    구염락은 그제서야 많은 이들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으며, 자신의 등장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뜻밖의 일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과거 그와 장서열의 관계는 지금 이 시각 많은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았다. 그는 이미 절대적인 우위에 놓여 있었으며 더는 남에게 버려지는 바둑돌이 아니었다. 십삼황자가 자신의 누이를 보러 온 것이다. 누가 뭘 어쩌겠는가.

    ‘오히려 이들이 나의 서열 누님에게 아첨하고 비위를 맞춰야 한다.’

    즉시 정신을 차린 구염락이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겨 앞으로 나아갔다.

    “괜찮으십니까?”

    구염락이 차분하게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마치 공무를 처리하는 사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고개를 든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오히려 달라진 그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그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한 치의 어색함도 없었다.

    서풍엽에게 붙잡힌 손을 거둔 장서열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열셋째 전하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미 많이 나았습니다.”

    구염락은 지난 몇 년간 출궁에 집착하지 않았다. 지금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황위임이 분명했다. 그녀는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낯선 사람처럼 공손하고 예의 바르게 행동했다.

    구염락은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하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았으면 됐습니다. 세자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전 이만 전원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분명 소란스러울 겁니다.”

    “감사합니다. 열셋째 전하께 심려를 끼쳐드렸습니다.”

    서풍엽이 긴장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을 잡고 있는 지금, 그는 방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다. 구염락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자리를 떠났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떠나자 다시 나긋나긋한 시선으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엔 온갖 교만한 생각들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서풍엽은 자신을 위해 손님을 내팽개치고 달려왔다. 장서열은 속으로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 그녀는 남자들이 관직과 정무를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부인을 총애하고 두려워하는 건 남자답지 못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녀는 남자들이 애처가로 소문이 나는 걸 극도로 꺼려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구염락이 그러했다. 그는 그녀가 아무리 아프다고 어리광을 부려도 조정에서 단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그녀가 아파서 침대에서 나오지 못할 때에도 그는 흠천감에서 거듭 상소를 올려야만 마지못해 기도를 허락할 정도였다.

    그때와 비교하여 지금 그녀는 단지 물에 빠졌을 뿐, 심지어 제때 구조를 받아 다친 곳도 없고 혈색도 좋았다. 그러나 서풍엽은 여전히 손님들을 제쳐 두고 자신과 함께하고 있었다. 사소한 일이었지만 전생의 그녀는 얻을 수 없었던 소중한 순간이었다.

    “왜 그래? 얼굴이 빨개졌어. 감기라도 든 거 아니야?”

    서풍엽이 즉시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짚었다. 장서열은 그의 손을 잡고 감동하며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의원이 괜찮다고 했어요.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요. 왕비마마께서 제 곁에 있어주시니 아무 일도 없을 거예요. 이제 밖에 좀 나가 봐요. 사고가 있었으니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을 거예요.”

    “…….”

    “방금 농교가 위지 대인이 오고 있다고 말해 줬어요. 얼른 나가서 대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죠. 해어 아가씨도 분명 잘못을 뉘우쳤을 테니 너무 따지지 않기로 해요.”

    서풍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밖에는 아버지가 계셔. 난 여기서 너와 함께 있을 거야.”

    장서열의 뺨이 살짝 물들었다. 고개를 숙이고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밖에는 여인들밖에 없어요. 오라버니가 저와 함께 있다는 게 소문이라도 나면…….”

    그녀를 바라보는 서풍엽의 얼굴에 자신의 정혼자를 어여삐 여기는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참지 못하고 손을 뻗어 그녀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보야, 넌 내 아내야. 소문이 나면 어때. 게다가 너 때문에 곤란해진대도 난 기꺼이 감수할 거야. 그들이 멋대로 떠들게 내버려 둬. 어차피 사실인 걸.”

    서풍엽이 안쓰러워하며 장서열을 품에 끌어안으려 하자 그녀의 얼굴에 홍조가 더욱 짙어졌다. 전생에서 그녀는 구염락보다 두 살이 더 많았기에 총애 받는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잘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남자에게 듬뿍 사랑 받는 느낌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었다. 보호받고 정성껏 떠받들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앞으로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행동하고 실컷 질투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녀가 원하는 건 남편이 모두 해 줄 것이며, 그녀가 싫어하는 건 남편 역시 싫어해 줄 것이다.

    장서열은 의원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충왕비를 힐끗 바라본 뒤 손을 뻗어 서풍엽을 살짝 안았다가 얼른 놓아주었다. 멈칫한 서풍엽이 그녀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고 투명한 피부는 윤기 나는 사과 같았다. 그녀의 어깨 위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은 붉은 비단과 어우러져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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