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구염락은 손가락으로 술잔을 쓸어내릴 뿐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다. 장서열이 희극을 좋아하는 것, 그리고 세자가 그녀를 위해 전국 각지의 희자를 섭외했다는 건 연경 사람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당자는 서풍엽에게서 불쾌한 기색이 없자 더욱 흥이 난 듯 말을 이었다.
“서열이를 본 지도 꽤 오래 됐습니다. 초혜전을 떠난 뒤로는 대갓집 규수처럼 집 밖을 나서지 않으니까요. 전 그녀의 제자나 마찬가지이니 나중에 꼭 한 번 서열이와 함께 어울리게 해 주세요. 지금도 이렇게 숨겨 두려고만 하시니 앞으로 혼례를 올리고 나면 더욱 만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이 말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장서열과 친분이 없었으므로 당자처럼 말할 수 없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권서함은 장서열의 이름이 언급되자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장서열은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연경에는 그녀에 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떠돌았지만 대부분 유언비어일 뿐이었다.
서풍엽이 어이가 없다는 듯 당자를 흘겨보았다.
“넌 자중 좀 하거라. 며칠 전 서열이가 네 얘기를 하더군. 네가 유흥가를 들락거린 뒤에 말이지.”
당자가 즉시 화제를 바꿨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가무! 가무나 즐기시지요. 역시 연경 교방에서 배출한 무희들이라 그런지 아름답기 그지없어요.”
자연스레 화제가 바뀌었다. 더 이상 장서열의 이름을 거론하는 사람은 없었다. 많은 이들이 과거 그 어린 아가씨가 오늘날 어떤 모습으로 성장했는지 궁금해 했지만, 서풍엽이 그의 정혼자를 얼마나 보배처럼 아끼는지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더 이상 장서열이 언급되지 않자 구염락은 올해 장원급제를 한 이에게로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그가 황후의 제안을 거절한 것은 아마 장래에 원하는 관직에 오를 수 없을 거라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의 사위인 부마가 되면 관직 생활에 제약이 생기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그대로 황후의 뜻을 거스르게 둘 수는 없었다.
구염락이 옥으로 만든 술잔을 막 입가에 갖다 댔을 때였다. 어디선가 영문 모를 금을 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깔끔한 손놀림이 튕기는 도도한 연주는 맑고 깨끗한 물처럼 일순간 공기를 청아하게 만들었다.
멈칫한 서풍엽의 시선이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내원에는 그가 준비한 연주자가 있었다.
‘어째서 서열이의 금 연주 소리가 나는 거지?’
저택의 집사에게 손짓한 서풍엽이 조용히 무슨 일인지 알아보도록 지시했다.
내원 팔각정대(八角亭台) 무대에 오른 위지해어가 나비처럼 춤을 췄다. 꽃밭을 나는 듯 민첩하고 아름다운 몸놀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을 사로잡은 건 위지해어보다 더욱 다채롭고 신비한 금 연주였다. 벽옥처럼 아름다운 아가씨가 가볍게 금의 줄을 튕길 때마다 마치 정원에 가득 찬 봄의 기운이 금의 가락에 녹아 흐르는 듯했다. 현에서 흘러나온 하나하나의 음은 세상을 씻기고 만물을 적셨다. 이대로 지나가는 짧은 봄날을 한탄하게 만들 만큼 아름다운 음률이었다.
자리에 앉은 모두가 금 소리에 매료되었다. 위지해어의 춤은 금 연주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잊혔다.
한 곡이 끝나자 사람들은 위지해어의 춤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 이구동성으로 장서열에게 찬사를 보냈다. 모두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금 연주 솜씨를 칭찬했다.
“왕비마마, 예비 며느리의 뛰어난 금 솜씨를 꽁꽁 숨기고 계셨군요.”
“외모만 어여쁜 게 아니라 연주 솜씨도 일품입니다. 세자가 사람 보는 안목이 뛰어나네요. 아주 훌륭해요.”
충왕비는 어떻게 웃는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그녀 또한 몹시 놀라 아직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서열이의 금 연주 실력이 이렇게 뛰어났단 말인가!’
사실 그녀는 장서열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두려워 아예 물어볼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면 그녀는 매일같이 예비 며느리의 재능을 자랑하고 다녔을 것이다.
“왕비마마께서 복이 많으십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작은 재주인 걸요. 오히려 평소 연주보다 못한 것 같네요. 저 아이는 뭐든 열심히 배우고 남들보다 두 배는 더 노력한답니다.”
충왕비가 웃으며 겸손을 떨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낌없이 칭찬을 쏟아냈다. 심지어 어떤 이는 장서열을 딸의 스승으로 모시고 싶어 했다. 최고의 찬사나 다름없었다.
위지해어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녀는 자신의 춤을 과시하고자 장서열을 내세웠을 뿐 이토록 시선을 빼앗길 거라고는 미처 예상치 못했다. 심지어 마지막에는 북춤이 다 끝나지 않았는데도 장서열의 연주가 끝나는 바람에 엉거주춤 동작을 끝내야 했다.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위지해어는 여전히 꽃밭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 선 장서열이 그녀에게 비웃음을 보냈다.
‘내게 연주를 시키려면 먼저 준비를 잘했어야지.’
위지해어는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고의로 그런 거야! 장서열은 분명 고의였어!’
장서열이 입술에 검지손가락을 올리며 그녀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순간 분노한 위지해어가 따귀를 때릴 요량으로 장서열에게 달려들려 하자, 뒤에 선 시녀가 황급히 위지해어를 붙들고 조용히 속삭였다.
“아가씨, 함부로 굴면 안 돼요! 여긴 충왕부라고요.”
정신을 차린 위지해어는 사방을 둘러보며 자신을 본 사람이 있었는지 살펴보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충왕비에게 아첨하거나 장서열에게 그녀를 가르친 스승이 누구인지 묻느라 바빴다. 위지해어는 억울했다.
‘그렇게 열심히 노력했는데…….’
텅 빈 무대에 홀로 선 딸을 서둘러 끌고 나온 위지 부인이 원망 섞인 시선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과소평가했다. 장서열은 계략에 능한 아이였다. 금 연주 하나로 딸이 심혈을 기울인 무대를 모두 망쳐 놓았다.
“울지 마! 울면 네가 패배했다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는 게야!”
위지해어는 눈물을 꾹 참았지만 억울한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오랫동안 연습하고 익힌 춤이었다. 충왕비에게 자신의 노력을 보여주고, 최대한 잘 보여 아들의 첩으로 받아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 모든 걸 장서열이 전부 망쳐 버렸다.
‘장서열만 아니었다면! 장서열만!’
위지해어는 자신이 먼저 장서열을 지목해 도발했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었다.
* * *
전원에 앉아있던 권서함은 과실주를 입에 털어 넣은 후 오래도록 삼키지 않았다. 이를 본 류소경이 이상하다는 듯 그를 툭 쳤다.
“서함, 왜 그래?”
권서함은 자기도 모르게 그의 말을 제지했지만 이미 금 연주 소리는 사라진 후였다.
‘누가 연주한 거지?’
그는 이처럼 최고의 경지에 오른 금 연주를 이제껏 들어본 적이 없었다. 권서함은 실례를 무릅쓰고 서풍엽에게 연주자가 누구인지 물어보기로 했다. 그때, 누군가 서풍엽의 곁으로 다가가 귀엣말을 속삭였다. 서풍엽의 안색이 검게 변했다.
‘위지해어? 초대도 받지 못한 주제에 몇 번이나 서열이를 도발하다니, 살고 싶지 않은가 보군.’
지켜보던 구염락이 집사를 불러 무슨 일인지를 물었다. 서풍엽을 한 번 바라본 집사가 곧 사실대로 대답했다. 구염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십황자 구염단영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서풍엽은 위지해어에게 어떻게 화를 낼지 고민 중이었다. 정말 사람을 짜증나게 하는 여자였다. 여인에게는 조신함이 미덕이었으나 이는 위지해어에게 해당이 되지 않는 말인 듯했다.
누군가는 그에게 제인지복(齐人之福, 처와 첩을 각각 한 명씩 거느리는 복)을 타고 났다 말했지만 터무니없는 소리였다. 그는 차라리 위지해어와 모르는 사이이기를 바랐으며, 당연히 그녀의 애정도 원하지 않았다.
권서함이 인파를 헤치고 걸어왔다. 이를 본 서풍엽이 예의를 갖춰 정중하게 그를 맞이했다. 그는 사람을 시켜 자신의 옆에 자리 하나를 더 만들게 했다. 작은 배려였지만 연경을 통틀어 서풍엽에게 이렇듯 정중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는 당자 또한 마찬가지였으며, 장서전 역시 누이동생과의 관계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리에 앉은 권서함은 주저하지 않고 궁금한 바를 물었다.
“후원의 흥취를 돋우기 위한 금 연주자는 세자께서 부르신 것입니까?”
서풍엽이 눈 한 번 깜작이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틀린 대답은 아니었으니 결례는 아닌 셈이었다. 권서함이 예의 바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너무 무례한 질문을 했습니다.”
화제를 돌린 권서함은 더는 같은 내용을 묻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나가며 서풍엽은 속으로 권서함의 인품에 감탄했다. 어린 나이에도 범상치 않은 지성을 보여 주는 그였다. 그가 장래에 권 노야의 뒤를 이어 조정에서 큰 활약을 하게 되리라는 건 분명했다.
장신성은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구염단신에게 변고가 생긴 후로 그는 모든 일에 지지부진했다. 심지어 지금 한창 주목 받고 있는 십삼황자조차 큰딸과 절교한 듯하자 그는 하는 일마다 족족 틀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장신성은 아비에게 폐를 끼치는 재주가 있는 적출들을 극도로 원망했다. 하지만 하필 그 적녀가 충왕부의 예비 며느리였으므로 어떻게든 화를 삼켜야 했고, 집안에서도 그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생길이었다.
장신성은 고뇌에 잠겨 술을 들이켰다. 그는 자신에게 알은 체를 하는 사람에게 낯빛을 흐렸다.
장서열을 둘러싼 뭇 부인들의 탄성이 점차 잦아들었다. 장서열에게 다정한 호의를 보인 그녀들은 다시 화제를 충왕비에게로 돌렸다.
그 사이 많은 부인들은 알게 모르게 만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장서열에게 감탄한 후, 부인들은 그녀와 가까운 관계인 만정 또한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겸손하고 예의 바른 아이일 거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이에 만 부인(万夫人, 만정의 어머니) 역시 많은 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게 되었다. 적지 않은 이들이 그녀에게 딸의 혼처를 정했는지 은근히 떠보았다. 그러나 만 부인은 애매하게 말을 돌리며 확실히 답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남편처럼 궁에서 소식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 부인은 다른 부인들에게 집안에 나이가 엇비슷한 아이들이 모두 혼인하길 기다리고 있지만 구염단신을 위해 교육시켜 놓았던 적녀들은 모두 시집을 갔다고만 설명했다. 그 말이 있은 후 비로소 부인들의 열기가 식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