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소문의 두 아가씨가 동시에 나타난 자리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둘을 비교하기 시작했다.
용모로는 두말할 것 없이 장서열이 한 수 위였다. 기품을 논한다면 위지해어 역시 크게 뒤지지 않았다. 그녀의 예의 바른 언행은 누가 보아도 대갓집 규수의 모범이라 할 만했다. 남편을 내조하고 자녀를 교육시키는 데 모자람이 없는 현모양처의 전형이었다.
지나치게 예쁜 여인은 경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법이다. 여러 여인들은 품행과 학식이 모두 훌륭한 위지해어가 용모만 갖춘 장서열보다 아내가 되기에 더 적합하다 생각했다. 위지해어는 자신을 향한 부인들이 호의를 느꼈지만 결코 득의양양한 기색 없이 예의 바르게 장서열에게 싱긋 웃어 보였다.
장서열은 황당했다. 대체 무슨 자신감이란 말인가. 장서열은 바보가 아니었고, 특히 자신의 정혼자와 함께 하기 위해 싱글거리는 여인과 잘 지내고픈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녀는 담담하게 웃고 있는 충왕비의 곁에서 굳이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조용히 서있었다. 웃음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살짝 미간을 찌푸린 위지해어는 이내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장서열의 태도가 불쾌했다. 저런 도량을 가진 여인이 세자의 아내가 된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다.
‘아무리 내가 널 괴롭힌다 해도 이럴 땐 남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서라도 웃어야지.’
장서열은 시선을 돌렸다. 굳이 위지해어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해어는 또 키가 컸구나.”
충왕비가 위지해어의 인사에 정중하게 화답했다. 그러나 예쁘다는 칭찬은 빠져 있었다. 누구나 알 수 있듯 장서열을 의식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충왕비의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녀는 평소 기세등등하고 매서운 성격이었으며, 신분과 지위에서도 결코 누군가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일개 좌상부의 아가씨를 이토록 조심스럽게 대한단 말인가.
웃으며 앞으로 나온 위지 부인이 충왕비의 손을 잡았다.
“많이 컸지요. 예뻐졌고요. 귀댁 아드님과 어울릴 자격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순간 충왕비의 미소가 옅어졌다. 이곳은 예비 며느리가 있는 자리였다.
“예쁘긴 하지만 제 며느리에 비할 바는 아니군요. 걱정 마세요, 위지 부인. 부인께서 잘 키우셨으니 분명 어울리는 시댁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비꼬는 게 명백한 충왕비의 말에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위지 부인은 완전히 기분이 상해 버렸다.
‘내 딸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됐는데! 너희 충왕부가 내 딸을 홀렸다고 해서 우리 가문을 업신여겨도 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네 아들이 끝까지 내 딸에게 눈길 한 번 안 줄 성싶으냐?’
“어울리는 시댁이라니요. 저희는 그저 누군가 우리 해어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죠.”
물론 위지 부인은 딸을 위해서라도 화를 삼켜야 했다. 그녀는 충왕부가 자신들을 업신여겼기에 춘연에도 초청하지 않은 것이라 여겼다. 그러나 오해였다. 충왕비는 그저 위지해어가 충왕부에서 멀리 떨어져 연회를 방해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랐다.
충왕비는 자신의 아들이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심한 부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위지해어와 사랑싸움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기에 이 점에 대해서는 딱히 염려하지 않았다.
“이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것 같으니 괜찮으시다면 후원으로 자리를 옮길까 합니다. 제가 기른 꽃을 감상하시겠어요?”
“그럼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얼른 보고 싶어 마음이 다 근질거리네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화답했다. 위지 부인은 여우 같은 충왕비가 자신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더욱 화가 났다.
‘내 딸이 네 아들을 좋아하니 막 대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게냐? 해어가 너희 가문에 시집가는 날 본때를 보여주마!’
“네, 가죠. 우리 해어도 화초 기르는 걸 좋아합니다. 사실 화초라는 건 너무 화려하면 오래 가지 못하는 법이에요. 손도 많이 가고요. 그에 비해 난초나 국화는 품행이 고결하고 오랫동안 피어 있죠.”
충왕비가 곧바로 받아쳤다.
“위지 부인 댁의 하인들은 화초를 다룰 줄 모르는군요. 어서 하인을 바꾸는 게 좋겠어요. 좋은 꽃을 볼 수 없다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에요?”
두 사람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계속해 반격을 시도했다.
미간을 찌푸린 위지해어가 충왕비 뒤에 선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의 만남이었다. 사실 그녀는 이미 장서열을 인정하고 있었다. 청산에서의 사건 이후로 그녀는 서풍엽이 결코 장서열을 포기하지 못할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한발 양보해 첩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장서열은 위지해어를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서풍엽이 위지해어를 얼마나 매몰차게 거절했는지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지해어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굴었다. 대체 어느 정도로 자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인지 장서열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전생에서도 그랬다. 위지해어는 아무리 서풍엽이 밀어내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반면 장서열은 구염락의 눈에서 증오를 보았을 때, 온몸이 굳어 도저히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었다. 어떻게든 숨기려 했지만 황망한 마음은 끝끝내 감춰지지 않았다.
그러나 위지해어는 달랐다. 그녀는 지난 몇 년간 한결같이 서풍엽만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자기 자신조차 잊어 버렸거나, 혹은 그를 사랑하는 스스로에 집착해 정말로 중요한 게 무엇인지 잊었는지도 모른다.
조용히 한발 앞으로 걸어 나온 위지해어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생, 혹시 내가 싫어?”
“그걸 꼭 말로 해야 아나요?”
놀란 위지해어가 멈칫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보통의 경우 내키지 않아도 친절히 대답하거나 남편의 첩 정도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했다. 심지어 남편이 원치 않는다 해도 오히려 아내로서 직접 첩을 데려와 남편을 위해 현명한 내조를 보여야 마땅했다.
즉시 태도를 바꾼 위지해어가 애처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나와 풍엽 오라버니는 말야…….”
“미안하지만 들을 이유가 없군요. 비켜 줄래요? 길을 막고 있잖아요.”
장서열은 어이가 없을 따름이었다.
‘동정심을 자극하기 위한 표정인가? 사람을 잘못 봤군.’
돌연 눈시울을 붉힌 위지해어가 마치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듯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가련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다 이내 아픈 마음을 추스르듯 다시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알겠어.”
장서열은 순간 당황했다.
‘뭐지? 이러면 꼭 내가 괴롭힌 꼴이잖아.’
두 사람을 주시하던 눈치 빠른 부인이 옆에 있던 부인을 콕콕 찌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세상에나, 장 씨 아가씨는 어린 나이에 사람을 괴롭히는 데 능숙하네요. 충왕비가 이미 망신을 줬는데 기어코 나서서 또 밟는군요.”
“그러게요. 위지해어가 딱히 뭘 한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저 아이가 정말 철이 들었다면 세자에게 위지해어를 첩으로 들이라고 권해야 하지 않겠어요?”
“맞아요. 세자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닌데 통방이며 첩이 한 명도 없잖아요. 혼인 전부터 이렇게 단속을 하니 혼인 후에는 더 말할 것도 없겠어요.”
“조옥언을 생각해 봐요. 얼마나 대하기 어려운 사람인데, 그 딸이라고 만만할 까닭이 있겠어요?”
“하지만 조옥언은 최소한 상야 대인에게 적지 않은 첩을 들여 줬잖아요. 헌데 그녀의 딸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이네요.”
위지해어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모친의 곁으로 돌아간 그녀의 모습은 가련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위지해어는 이것이 체통을 잊은 행동이라는 걸 알고 있었으나 서풍엽과 혼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장서열부터 길들여야 했다. 여론의 뭇매를 이기지 못한 장서열은 결국 자신을 첩으로 들이게 될 것이다.
그녀는 절대로 서풍엽을 포기할 수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흠모해 온 남자였다. 위지해어는 고작 첩실 한 명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장서열의 태도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먼저 혼인하면 행여라도 그의 마음을 잃을까 두려운 것일까. 위지해어는 궁금했다.
장서열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다음 순간, 그녀가 순진무구한 얼굴로 눈을 깜박였다. 눈처럼 희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초승달처럼 예쁜 눈에 순수한 궁금증을 담았다.
“위지 부인, 언니는 어째서 우는 걸까요? 혹시 제가 방금 말을 잘못했나요? 세자 오라버니가 그런 장신구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에요……. 좋은 마음에서 알려준 것인데…….”
장서열은 억울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저와 언니가 앞으로 자매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귀띔을 해준 것입니다. 결코 고의가 아니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힘없이 충왕비의 뒤에 섰다. 행여라도 위지 부인에게 혼날까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본 사람들이 다시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기 시작했다.
“그런 거였군요.”
“서열이가 어린 나이에 그런 나쁜 마음을 품었을 리 없죠. 당장 자기 집안의 첩실들이 모두 평화롭게 지내는 걸 보고 자랐는데, 질투를 알겠어요?”
“맞아요. 듣자하니 좌상부의 첩실들도 모두 저 아이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예의를 아는 착한 아이라고요.”
“그러고 보니 저도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요. 저희 이랑이 일전에 말하길, 좌상부의 육 이랑이 항상 차고 다니는 팔찌는 아들을 낳았을 때 장 씨 아가씨가 선물한 거라더군요.”
“어머, 그럼 위지 씨 아가씨는 단순히 지적을 당한 것이 불쾌했던 거군요?”
“그런가 봐요. 사실 위지해어가 달고 온 장신구는 나이 들어 보이고 예쁘지도 않잖아요. 한창 외모에 신경 쓸 나이에 지적을 당했으니 기분이 안 좋았겠죠.”
위지 부인이 딸을 향해 눈을 흘긴 후, 다시 장서열을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다, 괜찮아. 서열이는 참 말도 예쁘게 잘하는구나. 그래, 앞으로 자매가 될 테니 충고해 주는 건 당연하지. 그런데 언제쯤이나 자매 사이가 될지 모르겠구나.”
말을 마친 위지 부인이 득의양양한 얼굴로 충왕비를 바라보았다.
“예비 며느리까지 승낙을 했으니, 이제 왕비마마께서 해어를 업어 가시는 일만 남았습니다.”
장서열이 충왕비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충왕비가 즉시 환한 웃음을 지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위지 부인도 참, 업어 가다니요. 데려올 거면 아주 성대하게 혼례부터 올려야지요! 해어만 괜찮다면 우리 둘째 아이와 맺어줄까 합니다. 작년에 과거 시험에서 해원(解元, 수석 합격)까지 한 아주 유망한 인재랍니다!”
결국 위지 부인이 격노했다.
“장소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