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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86)화 (86/449)

제86화

“마마께서 복이 많으십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여인들은 마치 칭찬을 위해 참석한 사람처럼 충왕비를 향하여 끊임없는 찬사를 쏟아냈다. 이를 조용히 경청하던 충왕비가 얼굴 가득 미소를 보였다. 그녀는 가끔씩 겸손한 대답을 건넸으나 이것이 마음에도 없는 겉치레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부인들은 독특한 성격을 지닌 충왕비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그녀를 치켜세웠다.

충왕비의 시선이 문득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우측에는 웃는 얼굴로 줄곧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인이 있었다.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이제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걸었다.

“권 소부인(少夫人)께서 와 주셨군요. 우리 충왕부의 영광입니다.”

여인은 충왕비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듯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황송합니다, 왕비마마. 영광이라니요. 이 연아(研儿),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어디 남인가요. 권 소부인을 보고 있으니 제 신혼 시절이 떠오르는군요. 어디를 가나 조용히 있었지요. 혹여나 말실수를 해서 어른들께 혼날까 봐요.”

부인들이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권 소부인은 더욱 부끄러워졌다. 그녀는 권 씨 가문의 서출 중 큰아들과 혼인한 새색시였다. 그녀는 권서함의 큰 형수이자 본분에 충실한 권 씨 가문의 작은 부인으로, 아직 권서함이 혼례를 올리지 않은 탓에 행사가 있을 때면 어김없이 가문을 대표해 참석해야 했다.

그녀는 성격상, 보통 연회에서 사람들과 말을 잘 섞지 못했다. 특히 오늘은 노부인의 곁에서 시중을 드는 마마까지 함께였기 때문에 실수가 없도록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숫기 없는 성격에 부인들에게 놀림까지 받게 된 권 소부인은 안절부절 못하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장서열이 그녀에게 격려하듯 미소를 보냈다. 권 소부인 역시 어색하게 장서열을 향해 웃어 보였다. 혼인 전 그녀는 장서열에 대해 들은 바가 있었다.

장 씨 가문의 큰딸은 연경에서 제일가는 미녀지만 아쉽게도 이미 정혼자가 있다고 했다. 규방에서 지낼 때만 해도 소문을 듣고 아니꼬운 마음이 들었지만, 오늘 직접 만나본 그녀는 과연 연경 제일의 미녀가 분명했다. 심지어 그녀의 작은 시누이인 권여아조차도 장서열의 미모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충왕비께 초청을 받은 것은 저의 영광입니다. 오기 전에 시어머니께서 제게 당부하셨습니다. 왕비마마께 많이 배우고 오라셨어요.”

권 소부인의 말에 충왕비가 웃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나 다름없는 내게 배울 게 뭐가 있겠어요. 권 소부인은 한창 꽃다운 나이고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지요. 혼인 후 머리를 틀어 올리니 여성스러움이 더해져 보는 내가 다 반할 정도군요.”

권 소부인의 얼굴이 더욱 빨개졌다.

“왕비마마께서 저를 놀리십니다. 왕비마마야말로 정말 아름다우신걸요. 왕야께서 잘해 주시고, 또 효도하는 세자가 있는데다 이제는 예비 며느리까지 왕비마마를 공경하니 누군들 마마를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충왕비의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녀는 듣기 좋은 말을 하는 사람을 좋아했다.

“권 소부인도 언젠가는 다 얻게 될 거예요.”

이어서 여인들은 권 소부인을 둘러싸고 한바탕 칭찬을 쏟아냈다. 그녀에게 새색시의 태도와 시어머니를 대하는 법을 일러주며 그들은 또 한 차례 화기애애한 웃음꽃을 피웠다.

비록 서출과 혼인했지만 권 소부인이 권 씨 가문을 대표하여 연회에 참석한 이상, 누구든 그녀를 치켜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람들의 아부 세례가 어색해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충왕비의 곁에서 여인들을 훑어보던 장서열은 곧 나이 어린 여자 아이들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초혜전에서 낯이 익은 아이도, 그렇지 않은 아이도 있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그들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충왕부 연회에 참석할 정도로 신분이 높은 그들은 전생에서 대부분 구염락의 후궁이었다.

과거 장서열은 지금처럼 그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차이가 있다면 그때는 그녀들이 장서열 앞에 꿇어앉아 문안인사를 드려야 했다는 점이었다. 눈 깜짝할 새에 아이들은 익숙한 모습으로 자라나 어느덧 눈부신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아이들 무리 속에 섞여 있던 만정은 장서열을 바라보다 눈이 마주치자 괜스레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충왕비의 곁에서 점잖은 척하는 그녀를 놀리는 것이었다. 이에 장서열 역시 동감을 표하며 자신도 어쩔 수 없다는 듯 장난스런 눈짓을 보냈다.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만정은 웃음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황급히 자신의 입을 막았다.

모친을 따라 연회에 참석하는 건 재미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빠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일한 즐거움은 어른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틈을 타 이렇듯 서로 몰래 눈빛을 교환하는 것뿐이었다.

장서열은 꾸짖듯 만정에게 시선을 던진 뒤 다시 고개를 돌려 재빨리 여인들을 훑어보았다. 예상대로 전생에서 장서전의 아내였던 올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장서열의 눈에 씁쓸함이 스쳐지나갔다. 전생에서 장서전이 혼인을 할 때 장서열은 최고 신분으로 인생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덕분에 장서전은 평판이 좋지 않고 무능했음에도 불구하고 일품(一品) 고위 관리의 여식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었다.

다만 이 일품 고위 관리의 여식은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었다. 올케는 말주변이 없어 집안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아버지가 애지중지하는 딸이었지만 어리숙하고 귀가 얇다는 평판 때문에, 마찬가지로 평판이 좋지 않은 장서전과 혼인하게 되었다.

전생에서 장서열은 올케에 대해 생각할 겨를이 별로 없었다. 올케는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거나 그녀와 친하게 지내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서전이 몰락하고 어머니가 정부인 자리에서 물러났을 때, 올케는 체면도 불사하고 홀로 집안의 무거운 짐을 짊어졌다. 또한 가족을 보살피면서도 쓴소리 한 번을 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가능하다면 이번 생에서도 올케가 가족이 되어주기를 바랐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반드시 집안을 평안케 할 것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고생이 아로새겨진 올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순수한 올케의 얼굴을 지켜주마 맹세했지만 아쉽게도 올케는 오늘 연회에 참석하지 않은 듯했다.

장서열은 시선을 거두었다. 아마도 사돈 어르신은 숫기가 없는 올케에게 나쁜 평판이 생길까 일부러 연회에 데려오지 않았을 것이다.

만정은 어리둥절해하며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서열 언니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어째서 기분이 안 좋아 보이는 거지?’

돌연 명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늦게 왔다고 혼내지 마세요, 왕비마마. 일찍 오지는 못했지만 선물을 두둑이 가져왔답니다.”

충왕비 못지않게 귀한 신분을 뽐내며 한 귀족 부인이 딸을 데리고 걸어왔다.

“많이들 오셨군요! 이따 벌주 세 잔을 마실 테니 저는 그만 쳐다보시지요.”

충왕비가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위지 부인?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어째서 온 거지?’

도착한 이는 위지 대사마(大司马, 고대의 여섯 행정기관 중에서 군사와 운수를 관장하던 관직명)의 부인과 딸이었다.

위지 대사마는 대주국 병마권의 절반을 손에 쥐고 있으며, 국의원(国议院, 의회)에서 입김을 행사할 수 있는 실권자였다. 위지 부인은 충왕비와 같은 일품고명(一品诰命, 황제가 부녀에게 내리던 봉호)으로 누구나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세도가의 부인이었다. 그리고 한때 충왕비와 위지 부인은 절친한 친구였다.

그러나, 위지 씨 가문의 적녀 위지해어는 서풍엽을 좋아했지만 서풍엽은 위지해어를 싫어했다. 그리고 이 자리엔 세자의 정식 약혼자가 있었다. 뜻밖에 위지해어가 나타나자 대청 안이 순식간에 술렁거렸다.

‘설마 위지 씨 가문과 충왕부가 화해한 건가?’

‘마음을 바꿔 첩을 들이기로 한 건가? 위지해어를 측부인으로 들이는 거야?’

재미있는 광경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장서열과 위지해어에게 향했다. 이들은 앞으로 벌어질 일을 추측하며 서로 수군거리기 바빴다.

충왕비는 난감했다. 만약 그녀의 곁에서 서열이가 억울한 일을 당했다는 사실을 풍엽이 알게 된다면 십중팔구 난리를 칠 것이 뻔했다. 허나 이는 자신의 탓이 아니었다. 초대하지 않은 손님이라고 그대로 쫓아 보내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 않은가.

아무리 제멋대로인 충왕비라도 타인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때, 충왕비의 팔에 손을 올린 장서열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또 한 차례 예비 며느리의 배려에 반한 충왕비가 한층 유쾌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괜찮습니다. 아직 꽃구경을 시작하지 않았으니 늦은 거라고 볼 수도 없지요.”

“그럼 다행이네요.”

사람들은 즉시 충왕비의 옆자리를 비워 주었다. 권 소부인도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아무리 권 씨 가문을 대표해 참석했더라도, 서출의 아내인 이상 감히 위지 부인의 심기를 건드릴 수는 없었다.

연보라색 얇은 면사 치마를 차려입은 위지해어는 고상하고 우아했다. 비록 장서열보다 아름답지는 못했으나 학자 가문 특유의 온화한 멋이 있었다. 그녀는 장서열의 용모에 기가 죽지도, 자신의 총명함을 과시하지도 않으며 차분하게 인파 사이를 지나갔다. 마치 남의 남편이 될 사람에겐 전혀 관심이 없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무리 속에 있던 만정은 장서열이 걱정스러웠다. 위지해어는 맞서기 곤란한 상대였다.

‘일부러 서열 언니를 도발하면 어쩌지? 만약 언니에게 시 짓기 대결이라도 하자고 하면 서열 언니는 망신을 당할 텐데!’

“해어가 왕비마마를 뵈옵니다. 홍복을 누리세요.”

위지해어는 장서열만큼이나 연경에서 유명했다. 위지 대사마의 금지옥엽으로 신분과 지위가 공주에 가까운 그녀라면 나이가 찼을 때 청혼하는 사람 또한 줄을 서야 마땅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로지 서풍엽만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녀는 장서열이 자신보다 뛰어난 여인이라면 첩으로 들어가도 괜찮다고 선언해 모두를 기함시켰다.

과거 서풍엽은 위지해어로 인해 한동안 골머리를 앓았다. 그러나 아무리 거절을 거듭해도 단념하지 않자 이후에는 아예 그녀를 상대하지 않게 되었다.

위지해어는 올해 한창인 열다섯 살이었다. 끝끝내 서풍엽에 목을 매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학식과 품성만큼은 연경에서 으뜸으로 꼽혔기에 단점을 찾기 어려웠다. 그러나 단 하나의 단점이 너무 치명적이었다.

물론 이렇듯 괜찮은 여인의 순애보를 동경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았다. 특히 남자들에게 위지해어의 존재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많은 남자들이 서풍엽에게 미인은 아내로, 친구는 첩으로 들이라고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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