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5화
“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서열이가 한눈에 여인들을 볼 수 있도록 좋은 자리를 맡아줘야 하거든요. 그래야 마음에 드는 올케를 고를 수 있겠지요. 안 그러면 제 신세가 고달파질 겁니다.”
구염락은 여전히 대답 없이 소리자를 불러 그를 배웅하도록 했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서풍엽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구염락이 장서열과 함께한 과거를 잊은 거라 생각하며 그의 앞에서 되도록 지난날을 언급하지 않았다. 어차피 십삼황자에게는 그리 영광스러운 과거도 아닐 터였다.
서풍엽은 태평한 생각을 버리고 구염락을 지지하는 황후 편에 섰다. 결과를 알 수 없는 태자 다툼에 뛰어든 셈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풍엽이 정말로 관심이 없다 해도 사람들은 그의 정혼자를 이유로 자연스레 그와 구염락 역시 막역한 사이일 거라 추측했다. 그렇다면 차라리 사람들의 추측을 현실로 만들어 주는 게 나았다. 그래야 최소한 호사가들이 그의 속내를 캐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일만큼은 막을 수 있을 터였다.
문이 닫히자 구염락의 시선이 다시 화선지로 향했다.
‘그녀도 내일 연회에 참석하겠지. 하지만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군.’
구염락은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는 건 두렵지 않았다. 하지만 계획이 실패할 경우 혹시라도 그녀에게 불똥이 튀지 않을까 그것이 두려웠다. 서열 누님은 언제나 평온한 생활을 원했다. 그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그 여파가 서열 누님에게 미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허나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구염락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이미 주도권을 장악한 그에게 목표 달성은 시간문제였다. 모든 것이 마무리되면 서열 누님은 다시 자신의 누님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는 여전히 붓을 들고 있었다. 이제는 매우 익숙해 그 이상 익숙할 수 없는 글자를 응시하던 구염락이 마치 필체의 움직임까지 팔에 새긴 듯 막힘없이 글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과거의 일이 떠오르자 그의 굳은 입가에 한 줄기 미소가 피어났다. 벌써 오랫동안 서열 누님을 보지 못했다. 그는 그녀가 여전히 게으른지 궁금했다.
어렸을 때 벌어진 일들은 제법 유치했다. 그리고 몹시 재미있었다. 타인과의 대화를 꺼렸던 서열 누님, 그리고 언제나 누님의 꼬투리를 잡아 물고 늘어지던 아이들. 돌이켜 보면 그들은 누님을 미워한 게 아니라 오히려 바람대로 친해지지 못해 분풀이를 했던 거였다.
사실 서열 누님의 아름다운 얼굴을 떠올리면 그녀를 공격해서라도 주의를 끌고자 노력하던 아이들을 마냥 탓할 수만은 없었다. 허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다.
구염락이 붓으로 그녀의 이름을 써내려갔다.
「장서열」
세자는 그녀를 다정하게 ‘서열’이라 부르리라.
밤이 되자 궁에 한기가 돌았다. 그러나 제자전의 따스함은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마치 어제일 같았던 열악한 날들을 지나 이제 그들은 안락한 곳에서 다가올 미래를 위해 승부수를 던지는 중이었다.
문을 열고 금용이 들어왔다. 늘씬한 몸매의 분홍색 그림자가 구염락 앞에 다소곳이 섰다.
“전하, 저녁 식사가 준비됐습니다.”
세자의 배웅을 마치고 들어오던 소리자가 금용을 향해 미소 지었다.
“전하, 세자는 곧바로 관청으로 갔습니다.”
“알았다.”
금용은 아이처럼 토라진 얼굴로 소리자를 무시했다. 소리자는 그녀에게 어화원에서 그녀의 손톱에 바를 춘향(春香)을 꺾어다 주마 약속했으나, 어화원은 고사하고 제자전의 꽃송이조차 갖다 주지 않았다.
‘거짓말쟁이 같으니!’
소리자는 어쩔 수 없었다는 눈짓으로 미안함을 표시했다. 어화원의 꽃을 꺾어도 되는지 알 수 없었을 뿐더러 때마침 권여아가 꽃을 따고 있어 감히 접근조차 할 수 없었다. 화가 난 금용은 소리자를 무시하며 구염락의 식사 시중을 들었다.
소리자가 소매 속에 든 진주 비녀를 어루만졌다. 조금 전 세자가 내린 상이었다. 이 비녀라도 안겨준다면 금용도 더 이상 화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상을 받아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 * *
천지를 뒤덮은 봄 햇살이 대지를 덥히자 태양을 향해 꽃망울을 피운 꽃들이 저마다의 향기를 토해 내기 시작했다. 번성한 연경의 모습은 활기차기 이를 데 없었다.
정오가 가까워지자 큰길을 오가는 마차와 귀족 행렬이 점점 더 늘어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끌벅적해지는 풍경에 사람들은 무슨 일인지 궁금한 마음에 목을 빼고 쳐다보았다.
충왕부 대문 앞으로 호화로운 마차들이 줄지어 섰다. 시종들은 마차 사이를 분주히 뛰어다녔다. 도착한 이들은 서로 반가워하며 예를 갖춰 인사했다. 아직 비어있는 태자 자리로 인해 민감한 시기였다. 이런 때 춘연을 감행한 충왕부의 자신감은 가히 백 년 가문의 위세를 짐작케 했다.
남자들은 저마다의 장래를 위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많은 이들이 십삼황자를 주목했다. 그가 지난 이 년 동안 여러 방면에 두각을 드러냈으며, 황제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는 인물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은 황후가 십삼황자를 택하기로 마음을 굳힌 것인지 궁금해 했다. 춘연에 참석한 이들은 짝을 찾는 것 못지않게 구염락과의 친분을 희망했다. 이처럼 ‘구염락’이라는 이름은 많은 이들에게 알려져 있었지만 정작 실제로 그를 만나본 사람은 드물었다.
요란하지 않은 마차 한 대가 대문 앞에 멈춰 섰다. 소리자가 황급히 마차 휘장을 걷자 구염락이 마차에서 내렸다. 오가는 마차와 가마에 향해있던 시선은 곧 모여든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도착했을까?’
“전하, 세자께서 밖에 계시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습니다.”
구염락은 주저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안다.”
장서열은 일찍이 도착해 있었다. 그녀는 충왕비를 도와 정원에 꽃을 장식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붉은 옷과 일곱 빛깔 깃발을 두른 그녀의 모습은 하늘거리는 나비처럼 아름다웠다.
충왕비는 화려한 흑적색 옷을 차려 입어 한층 성숙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가 장서열의 손을 잡으며 행복감에 도취되어 말을 이었다.
“우리 서열이 다 컸구나. 점점 예뻐지니 보고 있는 내가 다 주머니 속에 감춰두고 싶구나. 풍엽이가 이 모습을 보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를 게다.”
장서열이 수줍게 웃었다.
“과찬이세요. 왕비마마. 제가 풍엽 오라버니의 눈에 든 것은 큰 복이에요. 외모는 중요한 게 아니지만 풍엽 오라버니를 기쁘게 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됐습니다.”
그 말에 충왕비는 다시 한번 온몸이 행복으로 가득 차는 걸 느꼈다. 그녀는 가식 없는 장서열의 성격을 좋아했고, 그러한 서열이 자신의 아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좋아했다.
“하여간 넌 내 환심을 사는 데 선수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아이였다. 처음에 충왕비는 장서열에게 큰 기대가 없었다. 조옥언의 딸을 며느리로 들이는 건 곧 자신이 보통의 시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러나 의외로 장서열은 차분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갖고 있어 천천히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충왕비는 아들이 예비 며느리를 위해 무엇이든 해주는 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첩을 들이지 않는 것도 큰 문제로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아내가 진심을 다하여 함께 해 주는데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이따 피곤하면 가서 쉬려무나.”
“감사합니다. 왕비마마.”
“아직도 왕비마마라 부르느냐. 일 년 후에는 꼭 어머니라고 불러야 한다.”
장서열이 쑥스럽게 웃었다. 수줍어하던 그녀는 문득 떠나기 전 서풍엽이 귓가에 속삭인 장난이 떠올라 미소를 머금었다. 충왕비 장소접은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예비 며느리를 데리고 연회장에 나타났다.
‘이렇게 완벽한 며느리라니, 모두들 부러워하겠지!’
대청에는 일찍부터 화려하게 차려입은 부인들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이들은 함께 모여 자수나 금(琴)에 대한 잡담을 나누었다. 명문가에서 자란 귀족 아이들답게 아무리 아둔한 아이라도 기본적인 행동거지는 조신하고 단정했다.
여인들이 하는 일은 단순했다. 함께 수다를 떨거나 풍경을 감상했고, 아들이 있는 집은 은밀히 며느릿감을 물색했다. 이들은 지인을 동원해 마음에 둔 여식의 품성을 알아보며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 가지 유감스러운 일은 연회를 개최한 충왕부의 세자비 자리가 이미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었다. 훌륭한 사위 자리 하나가 줄어든 것에 대해 부인들은 몹시 아쉬워했다. 그러나 세자의 측부인 자리는 아직까지 공석이므로 아직은 기대할 게 남아 있는 셈이었다.
물론 충왕부에서는 일찍부터 세자의 첩을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한 상황이었지만 누구도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세상에 어느 남자가 여자를 마다하겠는가.
세자는 올해 열다섯으로 이미 장성한 남자였다. 그러나 그의 정혼자는 올해 겨우 열두 살로, 어여쁘지만 아직은 아이에 불과했다. 그녀가 삼 년 뒤 성년이 되면 세자는 이미 성년이 한참 지난 열여덟이었다. 그때까지 세자가 정말로 다른 여인을 마음에 두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충왕비 납시오!”
대청의 모든 여인들이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소를 머금은 여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충왕비를 향해 절을 올렸다.
“왕비마마, 홍복을 누리세요.”
“모두 일어나세요.”
충왕비가 자상한 얼굴로 온화하게 말했다. 곧 아들의 혼사가 예정된 탓인지 아이 같았던 이전과 달리 중후한 매력이 더해진 모습이었다. 그녀는 이 어여쁜 소녀들 중 자신의 예비 며느리보다 출중한 아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욱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들 편히 앉으세요. 어렵게 한 자리에 모였으니 제게 격식을 차릴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껏 놀다 가세요. 이따가 여러분께 제가 키운 울금향(郁金香, 튤립)를 보여 드리도록 하지요. 정말 예쁘답니다. 너무 부러워하시면 안 돼요.”
부인들이 즉시 웃음을 터뜨렸다.
“왕비마마께서는 취미가 고상하세요. 덕분에 저희가 눈 호강을 하겠군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그녀의 좌측에 앉아있던 부인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왕비마마, 이 분이 곧 세자비가 될 아가씨인가요? 과연 소문대로 천하절색이군요. 마마께서 줄곧 숨기신 이유를 알겠어요. 이제 보니 저희에게 빼앗길까 두려워서 그러셨군요.”
장서열에 대한 칭찬에 미소가 더욱 부드러워진 충왕비가 아까보다 더욱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그럼요. 서열이는 제가 힘들게 데려온 최고의 며느리인걸요. 꼭 제 곁에만 두어야 마음이 놓인답니다.”
미소를 머금은 장서열이 부인을 향해 살짝 절을 올렸다. 멈칫하던 부인의 눈에 이내 웃음꽃이 피었다.
‘누가 장 씨 가문의 큰딸이 고약한 성격을 지녔다 했을까? 이렇게 착하고 예의 바른데.’
다만 장서열은 용모가 지나치게 아름다워 보는 이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걱정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