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4화
루 부인은 딸에 대한 부인의 기대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장서열이 뒤로 돌아서자마자 조옥언의 눈빛은 한층 부드러워졌다.
사실 그녀는 딸아이가 매우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만족을 표하지 않은 이유는 딸의 성격을 고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천성적으로 승부욕이 강했던 장서열은 자라면서 언행을 삼갈 수 있는 아이가 되었고, 사실 그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성과였다.
‘만일 정말로 딸이 어린 양처럼 순한 아이로 변한다면…….’
조옥언은 문득 딸아이가 지난 몇 년간 자신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거 활발하기 그지없던 딸의 성격을 떠올리며 조옥언은 즉시 스스로를 되돌아보았다. 그간 딸을 너무 엄하게 대한 것은 아닌지 걱정스러웠다.
‘안 돼. 여자는 콧대가 너무 낮아선 안 돼.’
혹시라도 딸이 무례한 대우에도 참고 견디는 성격이 될까 봐 그녀는 문득 불안해졌다. 그건 고생을 자초하는 일이었다.
붉은 치마가 장서열의 몸을 섬세하게 휘감았다. 부드러운 비단에 농염한 기운이 드리워졌다. 물빛 허리띠에는 붉은 염낭이 매달려 있어 마치 그녀를 갓 피어난 꽃망울처럼 보이게 했다. 아름답고 싱그러운 자태는 보는 이를 설레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장서열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익숙했다. 이러한 얼굴로 망나니 같이 살았던 전생을 떠올리자 그녀는 남들이 감탄해 마지않는 자신의 모습에도 그다지 감흥이 일지 않았다.
“고생하셨어요. 루 부인.”
기쁘게 웃은 루 부인이 정중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 인사를 했다. 조옥언은 흐뭇한 얼굴로 딸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
“춤사위가 꽤 능숙하더구나. 잘했다.”
장서열이 입술을 삐죽이며 원망 섞인 애교를 부렸다.
“드디어 칭찬해 주시네요, 어머니.”
“충왕비가 보낸 초청장은 받았지?”
“네.”
조옥언이 딸의 이마를 톡톡 두드리며 이것저것 당부했다.
“내일은 꼭 몸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함부로 경거망동해서는 안 돼. 충왕비에게 평소처럼 살갑게 굴어서도 안 되고. 충왕부에서 여는 춘연(春宴, 봄 연회)이다. 초대 받은 사람들은 모두 연경의 세도가야. 특히 전원에는 남자 손님도 있으니 조금이라도 사고가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니 반드시 충왕비 옆에 꼭 붙어서 말이 나오는 일이 없도록 해라. 어미 말 잘 알아들었느냐?”
장서열이 짐짓 가련한 얼굴로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이미 몇 번이나 신신당부한 말이었다. 이쯤 되자 그녀는 차라리 충왕비가 어머니보다 더 다정하다고 생각했다.
“뭘 그리 쳐다보느냐. 평소 집에서 버릇없이 행동하는 습관 때문에 괜히 충왕비에게 폐를 끼치지는 않을까 걱정이구나.”
“어머니, 저 내일은 꼭 붉은색 옷을 입지 않아도 되지요?”
모르는 사람이 보면 붉은 옷을 입은 자신이 마치 시집가고 싶어 안달난 사람으로 비칠 것만 같았다.
“안 돼! 무슨 생각을 하는 게야. 이 어미의 말을 귀담아 듣기는 한 게야?”
얼른 귀를 틀어막은 장서열이 혹시라도 어머니가 다시 잔소리를 쏟아 낼까 얼른 답했다.
“알아들었어요!”
장서열의 말이 끝나자마자 커다란 그림자 하나가 빠른 걸음으로 달려들었다. 곧 낭랑하고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어머니! 서열아! 목이 말라 죽겠어요. 먼저 물 좀 마시고 오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다시 빠르게 두 사람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옥언은 왠지 모를 두통을 느꼈다.
“서전아, 천천히 좀 다니거라!”
멀리서 성의 없는 대답이 들렸다.
“알았어요! 으악!”
“도련님!”
올해 열네 살이 된 장서전은 이제 어엿한 국자감(国子监)의 학생이었다. 그는 학업 성적이 뛰어나지는 않았으나 지난해 섭궁개의 눈에 들어 금위군(禁卫军)에 소속돼 뛰어난 활약을 선보였다. 이후로는 독립적인 업무를 수행할 만큼 섭궁개의 신임을 얻고 있었다.
조옥언이 원망 섞인 눈으로 아들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어째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버릇이 없어지는구나. 혼례를 올릴 나이인데 아직도 어린 아이 같으니, 원……. 외숙께 대체 뭘 배웠는지 모르겠어.”
장서열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오라버니는 예전보다 많이 점잖아진 편이었다. 그저 집에서만 자유롭게 행동할 뿐, 서풍엽의 표현대로라면 그는 문 밖을 나서는 순간 ‘엄숙하고 힘센 소년’이었다. 게다가 서풍엽은 딸의 혼처를 위해 장서전의 근황을 묻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장서열에게 미리 귀띔해준 상태였다.
조옥언은 미적지근한 딸의 태도에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말을 떠올렸다.
“정말이지 누구 한 명 안심이 되질 않는구나.”
장서열은 개의치 않았다. 오라버니는 오랫동안 연경을 떠나 있던 탓에 알고 지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지 이제 고작 반 년이었고, 어차피 대부분의 시간을 섭궁개와 보내고 있었기에 좀처럼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따라서 장 씨 가문의 장자는 사람들에게 낯선 존재였고, 오히려 알려져 있는 건 장서양의 이름이었다.
장서열은 장서전의 거취를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금위군에 소속된 장서전은 궁에서 구염락과 마주칠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오라버니와 구염락의 관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점잖은 체하면서 무뚝뚝한 얼굴로 있으니 정말로 황자 같더라니까!”
궁에서 다시 구염락과 마주친 날, 장서전은 대경실색하여 집으로 달려왔다. 그는 ‘그 녀석’이 정말 ‘도적놈’ 구염락이 맞는지를 물었고, 그가 ‘십삼황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오래도록 믿지 못했다.
어차피 장서전은 이제 구염락을 괴롭힐 수 없었다. 그리고 이미 어린 시절처럼 유치하게 굴 나이도 아니었다.
중요한 건 장서전이 장서양보다 빠르게 우위를 점했다는 사실이었다. 전생에서 장서양이 장서전을 누를 수 있었던 건 장서전의 능력이 부족한 탓도 있었지만, 장서양이 구염락과 친분을 쌓아 온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이미 장서전은 장서양의 위에 있었고, 장서양은 그의 도움 없이 큰일을 도모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적서의 구별이 명확했으므로 장서양은 행동거지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했다.
이제 승부는 전적으로 장서열과 장서전 그들 자신에게 달려있었다. 스스로 무덤을 파지만 않는다면 아무도 그들 위에 설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라도 후에 서출에게 당하는 일이 생긴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두 사람의 책임이었다. 그 정도로 멍청하다면 배다른 오누이 때문이 아니라 다른 누구에게라도 패배하는 게 당연했다.
“오라버니도 연회에 참석하나요?”
장서열의 물음에 조옥언이 답했다.
“그래. 가서 무슨 사고라도 치지는 않을지 걱정이구나. 그래도 충왕부라 풍엽이 있으니 다행이다.”
“어머니는요?”
장서열이 어머니의 얼굴을 살폈다. 침묵을 지키던 조옥언이 대답했다.
“어미는 몸이 좋지 않아 참석할 수 없구나. 대신 네가 어진 올케감을 물색해 보렴. 내 이미 충왕비에게 말해 뒀으니 도와줄 게다.”
그녀가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다면 돌아와 내게 알려 주고. 품성만 괜찮다면 서전이와 맺어주자꾸나. 그나저나 네 오라버니는 온종일 무슨 꼴인지 모르겠다. 풍엽처럼 진중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구나.”
장서열은 어머니가 장서전의 혼처를 조용히 구하려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물론 조옥언이 아들의 혼사에 무심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며느리에 대한 기대가 높지 않아 사위를 고를 때처럼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것뿐이었다.
* * *
연경의 중앙으로 우뚝 솟은 황궁이 모습을 드러냈다. 까마득한 성벽은 그 모습이 제법 엄숙해 황실과 귀족의 경계를 분명히 드러냈다.
제자전에서 나온 소리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공손하게 말했다.
“세자, 황후마마께서 여아 아가씨를 통해 전하께 물건을 보내시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전하께서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관복을 차려 입은 서풍엽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를 곧게 세운 그의 이목구비는 빼어났다. 작년부터 한층 성숙해진 그의 용모는 선이 뚜렷한 얼굴 위에 호수처럼 깊고 고요한 눈빛이 더해져 냉랭하고 여유로운 느낌을 주었다. 차가운 봄바람을 맞으며 그는 별다른 내색 없이 조용히 뜰에 서서 기다렸다.
서풍엽은 구염락에게 내일 열리는 연회에 대한 참석 여부를 묻고자 했다. 이각(两刻, 30분)을 더 기다린 뒤, 다시 소리자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정중하게 말했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전하께서 들라 하십니다.”
소리자가 길을 안내하며 낮은 목소리로 설명했다.
“여아 아가씨께서 이제야 떠나셨습니다. 아시겠지만 황후마마께서 일부러 보내신 터라 전하께서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부디 언짢게 생각지 말아주십시오.”
서풍엽의 목소리는 몹시 냉담했다.
“마땅히 그래야지요.”
소리자는 할 말을 잃었다.
구염락은 제자전 남원의 서재에서 서풍엽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가 앞 책상에 선 그가 화선지 위로 붓을 움직였다. 붓 아래 백화쟁춘도(百花争春图)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서재의 문이 열렸다. 소리자가 서재를 나가며 살그머니 문을 닫자 붓을 내려놓은 구염락이 서풍엽을 맞이했다. 이미 서풍엽을 능가한 황자의 자태는 인상적이었다. 앳된 모습을 완전히 벗은 구염락은 마치 날이 선 보검처럼 날카로운 후광을 발하고 있었다.
“형님,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서풍엽은 다른 사람이 없을 때면 구염락에게 절을 올리지 않았다. 구염락 역시 절을 요구하지 않았다. 일부러 거만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구염락이 정말로 그러한 격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여겼을 뿐이다.
그동안 구염락의 성장을 지켜봐 온 서풍엽은 가끔 차가운 구염락의 모습이 매우 낯설게 느껴졌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또 어떠한 모습으로 변화한대도 그리 놀랍지 않을 듯했다.
지난 이 년 동안 구염락은 궁 밖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한 번 장서열과 마주친 적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우연이었을 뿐, 별다른 대화조차 오가지 않아 마치 예전의 친밀한 감정은 모두 잊은 사람들처럼 보였다.
서풍엽은 이전에 갖고 있던 비현실적인 의심을 거둔 채 군신의 도리로 구염락을 대했다. 대신 주변에 다른 사람이 없을 때면 가끔 장난 섞인 조롱을 건네곤 했다.
“황후마마께서 행동이 빠르시군요. 미인을 얻게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전하.”
구염락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의 말에 답하지 않고 물었다.
“또 어느 황자를 초대했지요?”
서풍엽도 더는 구염락을 놀리지 못했다. 그가 정색하며 말했다.
“전하께서 황후마마를 대표하여 오기로 하셨으니 당연히 황후마마와 가까운 황자를 초대했지요. 관례대로 춘연은 귀족 자녀들의 혼처를 물색하기 위한 자리가 될 겁니다. 서열이 역시 이번 연회에서 오라버니 장서전의 신붓감을 찾을 예정이고요.”
“…….”
“황후마마께서 관여하시니 심한 경쟁도, 저희가 나설 일도 없을 겁니다. 다만 저희는 권 대인이 어떤 행동을 하시든 방해만 하지 않으면 됩니다.”
“연회가 평온하기를 바라야겠군요.”
서풍엽은 이번에도 구염락이 장서열의 안부를 묻지 않자 속으로 세월의 무정함을 한탄했다. 물론 그러한 구염락의 태도는 당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