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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83)화 (83/449)
  • 제83화

    황후는 양자가 자신에게 충성과 효를 다하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녀의 바람은 오로지 그가 구염단신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를 도와준 자신의 은혜를 생각해서라도 아들이 평안한 노년을 보낼 수 있도록 돌봐 주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구염락은 그녀의 바람을 이뤄주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친정의 오라버니와 이야기를 나누던 황후는 구염락이 들어오자 서둘러 눈물 자국을 닦았다.

    “왔구나. 폐하께서 오늘 너희에게 시험을 치르게 하셨다고 들었다.”

    비단 도포를 몸에 걸친 구염락은 뒤로 머리를 묶고 있었다. 아이 같던 예전의 모습은 사라지고 어느새 날렵한 윤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공손하게 황후에게 절을 올린 뒤, 권 노야에게도 인사를 올렸다. 권 노야가 황급히 맞절을 하며 연달아 황송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곁에 있던 권서함 역시 차분하게 예를 갖춰 인사했다. 올해 열두 살이 된 그는 소년 특유의 활발함은 없었지만 침착하고 여유로웠다. 구염락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마치 본래부터 공경해야 할 대상을 만난 듯한 느낌을 주었다. 초혜전에서의 과거는 이제 먼 옛날의 일이었다.

    황후가 자랑스럽게 권서함을 소개했다.

    “락아, 이 아이는 서함이란다. 네 사촌인 셈이지. 얼마 전 전시(殿试, 과거제도 중 최고의 시험)에 합격하여 지금은 한림원 편수(编修, 기록을 맡은 관리)를 맡고 있단다. 오늘은 황제 폐하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입궁한 김에 본궁에게도 들렀단다. 서함은 학식이 매우 뛰어나니 앞으로 모르는 게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거라.”

    권서함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과찬이십니다, 황후마마. 조카는 감히 그럴 수 없습니다.”

    구염락이 공수(拱手, 두 손을 마주잡고 가슴 위로 올리는 것)하며 말했다.

    “권 공자는 박식하고 재능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공자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면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권서함은 구염락을 향해 조용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를 본 구염락도 웃는 얼굴이 되었다. 은연중에 퍽 친해진 모습이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황후가 기분 좋은 웃음을 터뜨렸다. 일순간 우울한 기운이 걷히고 마음에서 우러나온 기쁨의 빛이 어렸다. 그녀의 조카는 성품과 학식이 뛰어나 몇 년 후에는 황제나 태자에게 강의를 하는 시강(侍讲)이 되는 데에도 문제가 없을 터였다. 그녀는 조카가 구염락과 가깝게 지내길 바랐다. 어차피 그녀는 이미 구염락을 태자로 지지하기로 마음먹은 상태였고, 오라버니가 아무리 설득해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락과 서함은 함께 나가 놀거라. 나는 권 대인과 상의할 일이 있다.”

    “예.”

    예의 바르게 물러가는 두 아이를 바라보며 문득 황후의 눈에 속상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우리 태자가 멀쩡했더라면…….’

    권 노야는 그녀만큼 상심하지 않았다. 누이동생의 아픔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었으나 계속해 아파하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가 미간을 찌푸린 채 말했다.

    “결심하셨습니까.”

    황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권 노야는 예상했던 일이라는 듯 탄식을 내뱉은 뒤 한참을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마음을 정하셨다면 행여나 약점이 잡히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사람을 얻고자 할 때는 반드시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그의 생모가 아직 살아있으니 필요하다면 그녀를 도와주십시오. 혹시라도 어리석은 자들에게 휘둘려 그의 생모에게 손을 대는 실수를 하셔서는 안 됩니다. 황후마마의 손을 더럽히기 전에 반드시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거듭 생각하십시오.”

    권 노야가 다시 한번 힘을 실어 말했다.

    “절대로 원한을 사면 안 됩니다.”

    황후 또한 모르지 않았다. 만약 구염락의 생모가 귀족 가문의 여인이었다면 황후는 그녀에게 높은 품계를 주고자 했을 것이다. 하물며 그렇게 한미한 출신의 여인 따위야 대주국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인 황후에게는 털끝만치도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고작 그런 여인과 싸움을 벌인다는 건 곧 황후의 체면이 바닥까지 떨어진다는 걸 의미했다.

    “안심하세요, 오라버니. 전 올해 그 아이를 데리고 기도를 드리러 갈 겁니다. 가는 김에 그들 모자를 만나게 해 줄 생각이에요. 제가 주는 선물인 셈이지요.”

    권 노야는 누이동생의 계획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염락은 훌륭한 황자였다. 그는 출신이나 능력 면에서 황후가 양자로 들이기에 안성맞춤인 후보였다. 그의 생모는 세력이랄 게 없으므로 앞으로 황후가 본분을 지키고 그를 살뜰히 보살펴 주기만 한다면, 세간의 여론 또한 그녀가 죽을 때까지 황후, 그리고 태후 자리까지 지킬 수 있게 도와줄 터였다.

    “마마께서는 언제나 생각이 깊으시지요. 태자… 아니, 일황자의 일로 고생이 많으십니다.”

    누이동생의 힘든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권 노야가 위로의 말을 건네자 황후가 쓴웃음을 지었다.

    “다 제 팔자인 게지죠. 허나 제 팔자가 아무리 사나워도 결코 다른 이가 제 머리꼭대기 위에 앉게 하지는 않을 겁니다.”

    권 노야는 누이동생의 집착을 굳이 짚고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십삼황자도 안심할 수 없다는 걸 아시겠지요. 그는 좌상부 여식과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황제께서는 분명 그 아이를 염두에 두고 계실 겁니다.”

    황제가 장서열에게 집착하는 것은 황후가 태후 자리를 원하는 것만큼이나 집요했다. 황후가 돌연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 전 그 아이를 여아(如儿)와 정혼시키고 싶어요.”

    그녀는 과거 구염단신이 여아를 마음에 두지 않았던 게 천운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구염락과 여아가 서로 맺어진다면 그녀는 더욱 안심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권 노야는 불쾌했다. 여아는 자신의 귀한 딸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곁에 두고 키운 탓인지 누이동생은 계속해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황후가 말했다.

    “설령 그가 여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해도 우선 측비로 들일 수 있으면 문제가 없을 겁니다. 혹 여아를 고생시키는 게 걱정 되신다면 십삼황자가 태자로 봉해진 후 맺어주는 게 어떨는지요.”

    권 노야가 황후를 바라보았다. 황후는 구염락의 후궁에 자신의 사람이 없는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만약 조카를 측비로 들인다면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즉, 그녀가 구염락을 완전히 믿고 있지 않다는 것을 뜻했다.

    “마마,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셔도 늦지 않습니다. 새로 태자가 즉위하면 어차피 우리 권 씨 가문은 태자비 후보를 내놓아야 합니다. 허나 여아는 십삼황자보다 나이가 많아 적당하지 않은 듯하니, 우선은 저와 함께 집에 돌아가도록 해 주시지요.”

    “오라버니, 여아는 십삼황자보다 겨우 두 살 위입니다. 보아하니 아이들은 가끔 마주치는 듯한데, 그 아이는 여아에게 공손하게 잘하고 있어요. 여아는 본궁의 친조카입니다. 여아 말고는 아무도 믿을 수가 없어 그렇습니다.”

    말을 마친 황후가 오라버니가 반박할 수 없도록 뚫어져라 그를 쳐다보았다. 권 노야는 공연한 일로 누이동생과 다투고 싶지 않았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시지요. 먼저 십삼황자를 태자로 봉하는 게 우선입니다.”

    두 사람의 화제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심각하게 대화를 나누던 그들은 주렴 뒤에 있던 그림자가 뒤돌아 떠나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권여아는 궁중의 어떤 여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황후 곁에서 자라 교양과 기품이 있었으며, 여러 방면에 다재다능한 보기 드문 미녀였다.

    그러나 그녀의 혼사는 번번이 좌절되었다. 황후는 그녀를 당시 태자였던 구염단신과 혼인시키려 했으나 매번 그의 강경한 거부로 무산되었다. 그런데 이제 황후는 자신을 두 살이나 어린 구염락과 맺어 주려 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그런데 어떻게 그와 혼인을 한단 말인가.

    “아가씨, 아가씨! 드디어 찾았네요. 십삼황자와 권 공자께서 아가씨를 찾으십니다.”

    노란색 긴 치마를 입은 권여아의 자태는 아름다웠다.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는 소녀 특유의 온화함이 배어 있었다. 시녀의 말에 그녀가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풍경을 감상하느라 정신을 놓고 있었어. 가자, 길을 안내하렴.”

    * * *

    열둘이란 나이는 장서열에게 단순한 숫자에 불과했다. 그러나 어른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들은 십이간지를 돌아 다시 출생한 해가 돌아오는 첫해를 본명년(本命年), 혹은 부귀년(富贵年)으로 칭하며 일 년 내내 여자 아이에게 붉은 옷을 입혔다. 가장 풋풋하고 순수하며 아무 것도 모르는 나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타오를 듯 붉은 비단 치마는 아름다운 그녀의 미색을 한층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용모에 요염한 기운이 더해진 얼굴은 서서히 굴곡이 드러나기 시작한 몸매와 어우러져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를 연상케 했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된 장서열의 미모는 나날이 출중해져 굳이 장신구로 꾸미지 않아도 세기의 명화(名画)처럼 뭇 여인들을 압도했다.

    그녀의 외모는 이미 어떠한 재능도 필요치 않은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그녀에게는 학식도, 수예 기술도, 심지어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성격도 필요 없었다. 장서열은 이미 연경 제일의 여인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미모가 다른 장점을 모두 가릴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이었다. 그 탓에 장서열은 오직 ‘미녀’라는 수식어만 붙었을 뿐, 다른 진면목이 모두 감춰지고 말았다.

    반운루 무방(舞房, 춤추는 곳) 안, 일곱 빛깔 비단 끈을 손에 쥔 장서열은 나비와 같은 자태로 춤을 추고 있었다. 비단의 화려한 색채는 마치 생명을 가진 것처럼 그녀 주변에 오색 꽃망울을 만들어 냈다. 눈부신 광경이었다. 빠르게 움직이는 팔은 술법이라도 부린 듯 찬란한 빛을 만들어 내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그 몸짓에 완벽히 빠져들게 만들었다.

    곡이 끝나자 장서열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사뿐히 앉았다. 오랜 세월 잘 숙성된 포도주의 입구에서 그윽한 향이 피어오르듯 깊은 여운을 남긴 자태였다.

    금 연주를 마친 루 부인은 감탄해 마지않으며 애제자에게서 간신히 시선을 뗐다. 가히 천하를 무너뜨릴 정도로 아리따운 미녀였다.

    여인은 반드시 청순해야 한다고 누가 말했던가. 루 부인은 장서열을 보며 춤과 혼연일체가 된 아름다운 자태야말로 진실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는 걸 깨달았다. 저토록 붉은 옷을 입고도 기품을 잃지 않는 건 오로지 서열 아가씨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려한 춤을 선보이는 절세가인에게 그 누가 감동받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방 안은 조용했다. 루 부인이 옆에 있던 조옥언을 바라보았다. 미간을 찡그린 조옥언은 자신의 평을 기다리는 딸을 바라본 뒤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전히 여성미가 부족하다는 뜻이었다.

    순간 풀이 죽은 장서열이 고개를 떨군 채 옷을 갈아입으러 뒤돌아섰다. 어쩔 수 없지. 그녀는 만약 서풍엽이 같은 반응을 보인다면 그를 실컷 때려 주리라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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