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좋소! 아주 좋아!”
장신성은 당장이라도 장서열을 한 대 때리고픈 심정이었다. 모두 그녀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러나 황제께서 그녀를 태자비로 염두에 두고 있다는 말을 떠올리며 그는 가까스로 화를 억눌렀다.
“이게 다 무슨 궤변이란 말인가!”
혹여라도 조옥언이 먼저 이혼을 신청할까 두려운 듯 장신성은 말을 마치자마자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가 나가자 조옥언은 일단 홍촉을 불러 어질러진 방을 정리하게 했다.
“서열아, 왜 아버지와 입씨름을 한 것이냐? 마음에 안 들면 내가 내치면 그만인 것을.”
장서열은 어머니의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는 걸 두고 볼 수 없으니까요. 어머니는 인자하고 마음씨 좋은 분인데, 어째서 그런 오해를 받으려 하세요.”
평정을 되찾은 조옥언이 딸을 끌어당겨 자리에 앉혔다. 평소 밝게 웃을 줄만 알던 딸이 자신을 위해 아버지에게 맞서는 모습을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다 이 어미의 잘못이다.”
“아니요, 어머니는 최고세요.”
조옥언은 장서열에게 지극한 사랑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기본적으로 모든 이들에게 베풀 줄 알았다. 상부의 여인들은 특별히 배은망덕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가 조옥언을 존경했다. 단지 그녀가 스스로 얼마나 공평한 사람인지 모를 뿐이었다.
“어머니도 바깥 구경을 좀 하셔야 해요. 종일 집에만 계시면 답답하잖아요.”
조옥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장신성과 혼인한 뒤로 외출을 삼갔고, 몇 년 전 잠시 충왕부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면 자신을 비웃는 말 많은 사람들을 피해 줄곧 집안에 숨어 있었다. 아직 그녀는 남들 앞에 설 자신이 없었다.
장신성에게 떳떳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장신성에게 높은 지위와 여인을 안겨 주었다. 후원에 거처하는 수많은 자녀들이 바로 그 증거였다. 그에게 시집온 여인들과 다를 바 없이 그녀 역시 결백했다. 그런데 장신성이 무슨 자격으로 자신에게 불만을 품는단 말인가.
이혼은 그가 꺼낸 단어를 한 번 더 되풀이해 준 것일뿐 그의 진심은 아니었다. 어차피 장신성과의 관계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틀어져 있었다. 그러니 즐거우면 얼굴 정도는 마주하고, 아니면 장식품처럼 여기면 그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신성은 심하게 억지를 부렸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생트집에 그녀 역시 화가 치밀었다.
‘아무리 사랑해 마지않는 서출이라지만 고작 초혜전 일이 어긋났다고 모든 게 무너진 것처럼 굴다니!’
조옥언은 곧 위안을 얻은 눈빛으로 딸을 바라보았다.
“우리 서열이가 다 컸구나. 어미를 보호할 줄도, 시비를 분별할 줄도 알게 되었어. 허나 어쨌든 그는 네 아버지이니 다음부터는 조심하거라. 네가 불효를 저지른다고 그가 나무라기라도 한다면 괜히 네 평판만…….”
장서열이 고개를 들었다.
“세자가 저를 내치기라도 할까 봐요?”
조옥언이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서풍엽이 딸을 끔찍하게 위하는 것을 떠올리자 다시 한번 위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딸에게 당부하는 걸 잊지 않았다.
“가끔 남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우리 여자들은 알 수 없단다. 아무리 풍엽이 너를 사랑한다 해도 정도를 지켜야 한다. 게다가 남자의 사랑은 일관적이지 못하지. 그들은 네 마음도 모르면서 할 만큼 했으니 더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할 게야. 네가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걸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어.”
“…….”
“서열아, 풍엽은 물론 좋은 아이지만 이 어미는 네가 항상 이성적이고 똑똑하게 굴었으면 한다. 네 자신을 잃지 않도록 말이야.”
장서열은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구염락과 혼인할 때 들었던 바로 그 말이었다.
“그럴게요.”
“비록 사랑하지 않는 남자라 할지라도, 오랜 시간 사랑 받고 지내다 보면 이성을 잃고 결국 모든 걸 내어 주는 법이다. 풍엽이 아무리 널 끔찍이 아낀대도 항상 조심해야 한다.”
장서열은 자신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걱정 마세요, 어머니. 만약 절 소홀히 대한다면 저는 바로 그를 내칠 거예요.”
조옥언이 참지 못하고 크게 웃었다.
“못된 것, 나쁜 것만 배웠구나! 그러기만 해 보거라. 집에 돌아오지도 못하게 할 테니.”
“불공평해요, 어머니.”
“불공평하기는.”
조옥언이 딸의 귀여운 코를 살짝 꼬집었다.
“네 아버지가 꽁무니가 빠지게 도망가는 걸 보았느냐? 이 어미는 내게 착하고 똑똑한 딸이 있다는 걸 오늘에서야 알게 되었구나.”
* * *
세월은 물 흐르듯 흘렀다. 촉촉이 젖은 봄의 기운은 겨울의 두터움을 감추고 가을의 쾌적함을 가로질러 이글거리는 여름날이 되어서야 그 기세를 떨쳤다. 시간은 흐르는 긴 강물처럼 한데 모여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세상사 모든 일이 강물처럼 유유히 흘러가는 가운데, 아무리 중차대한 일도 시간 앞에서는 점점 희석되어 평온을 찾아 갔다.
구염단신은 지난 이 년간 백방으로 명의와 약을 찾았다. 이미 권력의 중심에서 물러난 그는 현재 왕야조차 아닌 평범한 황자의 신분으로 황궁을 나와 군왕부(郡王府) 저택으로 거처를 옮긴 상태였다. 과거 그의 처소 앞에 문전성시를 이루던 이들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군왕부의 대문은 이따금씩 황후가 하사한 물품이 왔을 때만 잠시 열릴 뿐, 대부분 굳게 닫혀 있었다.
범억아는 저택에서 가장 목소리가 큰 사람이 되었다. 과거 말을 삼키고 분을 억눌러야 했던 그녀는 이제 짜증이 나면 침대에 누워 있는 남자에게 소리를 지르곤 했다. 그녀를 향해 도발을 일삼던 아름다운 첩실들 또한 얌전하게 그녀의 말을 들었다.
범억아는 가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같은 생활이 편한가? 물론 편했다. 남자를 장악했으며 첩실들은 고분고분했고, 특히 얄미운 장서열이 완전히 떨어져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범억아의 마음은 그 다음 말을 덧붙이곤 했다. 이 편한 날들이 미칠 정도로, 정말 몸서리치게 싫다고! 차라리 부군을 일 년에 한두 번 볼지언정, 화려하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매일같이 맞설지언정, 심지어 장서열이 부인으로서의 권리를 모두 빼앗아 간대도 지금처럼 조용히, 그저 한낱 군왕의 측부인으로 있는 사는 것은 싫었다. 애초에 태자에게 시집가고자 했던 것도 이런 평안한 나날에 안주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범억아는 다시는 갈 수 없을 황궁 쪽을 바라보며 마음에 남은 미련을 꾹꾹 눌렀다. 현재 그녀와 남편이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일은, 앞으로 새로 즉위할 태자의 동정심을 얻어 미래의 안위를 보장 받는 것이었다.
지난 일 년간 나라 안팎으로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이는 단연코 열셋째 황자 구염락이었다.
이름에 돌림자인 ‘단(端)’자조차 쓰지 못한 비천한 황자가 갑자기 뭇사람들의 눈앞에 등장했다. 영리하고 너그러우며 사리분별이 뛰어난 그는 완벽한 황자의 모습으로 황후의 눈에 들었다. 그리고 그는 황후의 양자이자 가장 촉망 받는 황자가 되었다.
신하들 중 구염락이 군기(军妓, 군대에서 일하는 기녀)의 핏줄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누구도 이처럼 비천한 출신의 황자가 사람들 앞에 서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가 아무리 뛰어나고 영민하다 해도 그의 생모는 국사에 갇혀 있는 죄인이었다. 동시에 그가 황제의 피가 섞인 황자라는 것 또한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명실공히 당대의 제왕이었다.
게다가 구염락은 황자들과 세 차례의 논쟁을 통해 자신의 실력을 입증했으며, 모든 형제를 제압하여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게 만들었다. 황제는 구염락에 대해 말을 아꼈고, 그와 황후가 맺은 모자 관계를 묵인해 주었다.
지난 이 년 사이 구염락은 남소원을 나와 제자전(帝子殿)으로 들어가 다른 황자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황후는 고통스러운 소년 시절을 보낸 그를 가엾게 여겨 남다른 모성애를 발휘해 그를 살뜰히 보살폈다. 자애로운 국모의 모습이었다.
구염락은 예전의 열셋째가 아니었다. 엉망이었던 과거의 모습을 탈피한 그는 어느덧 준수하고 품위 있는 십삼황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형제들과 동등한 권리를 획득한 후 날개를 단 용처럼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네 명의 시위와 여덟 명의 궁녀, 그리고 태감이 새로 배정되었다. 어두웠던 그의 과거는 자연스레 누구도 언급해서는 안 될 궁의 금기가 되었다.
“깨지지 않게 조심해!”
열 살이 된 금용은 어느덧 처녀가 되어 있었다. 분홍색 삼등 궁녀의 품복을 입은 그녀는 여전히 풋풋하고 늘씬한 자태를 뽐내는 중이었다. 그녀는 여유로운 태도로 아랫사람을 부리며 하사 받은 물품들을 정리시켰다.
“모두 조심해서 창고로 옮기도록 해. 하나라도 빠뜨리면 안 돼.”
“창고가 가득 찼는데 어쩔까요?
금용이 잠시 생각하다가 대꾸했다.
“가서 총관 공공께 동쪽 창고를 비울 수 있는지 물어 봐. 열셋째 전하께서 사용하실 거라고 해.”
“네.”
제자전에는 총 여섯 명의 황자가 있었다. 그중 구염락의 거처는 가장 남쪽에 있는 뜰이었다. 그의 처소는 남소원과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윤택해졌다. 정원이 딸린 멋진 경관을 자랑했으며 모든 가구가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었다. 매일 태감이 청소를 하는 방 안에는 장식 외에도 팔뚝만큼 굵은 촛대가 있어 밤새도록 켜 놓아도 모자람이 없었다.
“빨리 움직이지 못 해! 금수(锦绣), 너는 이 공공을 찾아가 석분(石粉 돌가루)을 좀 얻어 와. 이 물건들은 모두 방충 처리를 해야 해.”
“네, 언니.”
금수는 구염락이 황후의 양자가 된 후 들어온 궁녀로 금용과 동갑이었다. 본래는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었으나, 구염락은 궁녀들의 이름에 동일하게 금(锦)자를 붙였다. 여덟 명의 궁녀 중 막일을 담당하는 네 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명은 금용의 이름을 따라 금(锦)자 돌림으로 이름을 지었다. 금용은 궁녀들 사이에서 명실상부한 우두머리였다.
금용의 가장 큰 변화는 성격이었다. 윤택한 생활과 승승장구하는 주인의 지위는 그녀를 물 만난 고기처럼 신나게 만들었다. 예전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얻을 수 없었던 물건들을 지금은 각 궁의 공공들이 알아서 보내 왔다. 급료를 받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굳이 움직이지 않아도 그녀에게 아부하려는 자가 직접 갖다 주었다.
십삼황자 곁에서 일하는 그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사람들은 온갖 방법으로 그녀에게 아부했다. 금용은 처음에는 이러한 변화를 불안하게 여겼지만 지금은 능숙히 대처할 만한 여유도 있었다.
점심 무렵, 구염락은 오전 일과를 마치고 조로전(朝露殿)에 들러 황후께 문안을 드렸다.
지난 이 년 사이 많이 연로해진 황후는 과거 침착하고 여유롭던 얼굴은 온데간데없이 피로한 기색이 가득했다. 현재 그녀를 버티게 하는 건 가슴 속에 서린 한과 원망, 그리고 아들에 대한 염려였다.
그녀가 직접 선택한 구염락은 여러모로 마음에 쏙 드는 양자였다. 그의 생모는 비천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황후는 대의명분을 내세워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구염락이 자신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는다면 그녀로서는 더 바랄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