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81)화 (81/449)
  • 제81화

    만 대인이 장신성의 어깨를 두드렸다.

    “깊게 생각 마시지요. 폐하께서 서열이를 많이 아끼셨지만 그렇다고 그 아이 때문에 문을 닫은 것은 아닐 겁니다. 일전에 헌원 씨 가문의 여식에게 사고가 있던 날에도 폐하께서는 초혜전 수업에 우려를 표하셨으니, 이번 결정은 결국 순리대로 일어난 일입니다.”

    장신성은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만 대인을 쳐다보았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서열이가 초혜전에 나오지 않는 것이 초혜전이 문을 닫는 이유가 되는 모양이었다. 장신성의 표정을 본 만 대인이 조금 더 솔직하게 말을 이었다.

    “물론 서열이의 부재가 영향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만, 벌써 몇 해 전부터 초혜전의 문제점이 수차례 거론돼 왔습니다. 그러나 황제 폐하께서는 대인의 딸과 태자 전하께서 서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었기에… 어쨌든 초혜전이 문을 닫는 건 시간문제였으니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지요.”

    장신성은 완전히 얼빠진 얼굴이 되었다.

    ‘황제 폐하께서 그리도 서열이를 마음에 두고 계셨단 말인가?’

    그것도 모르고 태자의 꽁무니만 졸졸 쫓아다닌 셈이었다. 그가 장서영을 위에 발 벗고 뛰었던 것처럼, 황제가 장서열을 태자비로 삼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았다는 걸 이미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등잔 밑이 어두웠던 장신성만이 오직 장서영에게 기대를 걸었을 뿐이었다. 그는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조옥언,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느냐? 서열이가 태자와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손을 쓴 것도 이미 네가 진작부터 폐하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지!’

    분노에 찬 장신성의 원망이 모조리 조옥언에게로 향했다. 그는 조옥언이 재차 자신의 체면을 구겼다고 생각했다. 오로지 자신에게 망신을 주기 위해!

    * * *

    장서열은 봉 사부에게 자수를 배우고 있었다. 가느다란 실이 조금도 흠잡을 데 없는 그녀의 손을 거쳐 하얀 비단 위에 수놓아졌다. 그 모습은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아 보는 이를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올해 마흔다섯인 봉이(凤姨)는 예전만큼 눈과 손이 영민하지 않자 상부에 들어와 큰아가씨의 사부 노릇을 하게 되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그녀는 미리 상부 적녀에 대한 소문을 들은 바 있었다. 성격이 좋지 않아 통제가 어렵다는 그 소문은 정말로 사실이었다. 다섯 살 장서열은 이파리가 마음처럼 잘 되지 않자 그 즉시 탁자를 뒤엎고 실을 내던졌다.

    그로부터 수년이 흐른 후, 큰아가씨의 변화는 놀라웠다. 아가씨는 몇 년 전보다 훨씬 조용해진 모습으로 수도 그럴듯하게 잘 놓았으며, 인내심 있게 바느질을 했다. 거기다 본래부터 고운 외모를 갖고 있어 차분하게 앉아 수를 놓는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절로 흐뭇했다. 그녀는 과연 다 큰 처녀답게 철이 들어 있었다.

    봉이는 앞으로 다가가 장서열이 수복(寿蝠) 문양을 매듭짓는 것을 보았다. 자연스럽고 세심한 손길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좋습니다. 이 쌍복(双福) 도안을 외조모께 생신 선물로 드리면 분명 아가씨의 재주를 칭찬하실 거예요.”

    미소 지은 장서열이 마지막 한 땀까지 수를 놓은 뒤 실을 자르고 수틀을 내려놓았다. 박쥐 두 마리가 복숭아를 들고 날아가는 문양은 곧 있을 조 노부인의 생일 선물이었다.

    봉이는 오늘 장서열의 자수 솜씨를 칭찬해 마지않았지만 그녀에게 쌍수자화(双绣刺花) 기술까지 가르칠 생각은 없었다. 장서열은 장서영과 달랐다. 봉이가 장서영에게 쌍수자화 기술을 가르치려 했던 건 신분이 낮은 그녀가 혼인 후 써먹을 수 있는 기술을 익히게 하고픈 마음에서였다.

    허나 상부의 적녀인 장서열에게 쌍수자화 기술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재주였다. 물론 알고 있다면야 금상첨화겠지만, 만에 하나 기술을 잘못 익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대갓댁 아가씨에게 자수를 잘못 가르친 벌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울 터였다. 그렇기에 봉이는 장서열이 쌍수자화를 전수해 달라고 강력히 요구하지 않는 한 먼저 나서서 가르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전 내내 저와 함께 계시느라 힘드셨지요. 농교에게 스승님의 시중을 들게 할 테니 잠시 쉬십시오. 전 이따 오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봉이가 정중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가씨.”

    장서열은 완성된 자수를 들고 어머니를 뵈러 갔다. 그러나 대청에 들어서기 전, 장신성이 언성을 높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초 마마의 안색이 굳어졌다.

    “아가씨, 이따가 다시 오는 게 좋겠어요.”

    “아니. 완정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나는 초 마마와 들어갈 테니.”

    장서열이 불쾌한 얼굴로 정원에 들어섰다.

    * * *

    그 시각, 홍촉은 초조하게 문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방 안에서 물건을 내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부인이 걱정돼 견딜 수가 없었다.

    “제가 뭘 알겠습니까? 매일 그 애를 위해 분주했던 건 노야십니다. 무슨 체면으로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체면이 뭐가 어떻단 말이오! 다 내 딸이오! 서영이는 서열이가 내팽개친 것도 주우면 안 된다는 거요?”

    “안 되지요! 노야께선 서열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제가 서영이에게 먹을 걸 부족하게 했습니까, 입을 걸 부족하게 했습니까? 누가 보면 노야께서 그 애만 딸인 양 이리 뛰고 저리 뛴 것이 제가 서영이를 박대하였기 때문이라 할 것입니다! 지금 큰소리를 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창피한 일을 벌일 때는 먼저 스스로의 행동이 적절한 것인지부터 따져 보셨어야 할 게 아닙니까!”

    분노한 장신성의 얼굴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지금 당신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오?”

    조금도 두렵지 않은 기색으로 대청에 우뚝 선 조옥언은 잡초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차갑게 말했다.

    “당연하지요! 저야말로 모든 아이들을 차별 없이 공평히 대하지 않았습니까! 노야의 성화에 가장 좋은 스승을 골라 모두 모자람 없이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노야께서 분수도 모르고 도를 지나치니 남에게 비웃음거리나 된 게 아닙니까!”

    정곡을 찔린 장신성의 화가 폭발했다.

    “분수를 몰라? 당신이 서영이를 서열이처럼 대했다면 내가 나섰을 것 같소? 서영이가 초혜전에서 하찮은 반독 한 번 하겠다는데, 대체 당신은 왜 돕지 않는 게요! 뛰어난 서영이가 당신 딸의 자리를 빼앗을까 두렵소?”

    순간 조옥언의 가슴에 분노가 솟구쳤다.

    “지금 ‘당신 딸’이라 했습니까? 예, 서열이는 내 딸이니 모든 걸 다 누려야지요! 딸이 아닌데도 내 그간 인정으로 서영 그 아이를 잘 먹이고 잘 입혔거늘, 이제 감히 적녀의 자리까지 넘보려 하다니! 그리 억울하면 재주껏 환생이라도 하여 본처의 뱃속에서 태어나라 하시지요! 아니면 얌전히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별수 있습니까? 애초에 자기 것이 아닌 것에 눈독을 들이니 그리 망신을 당하는 게지!”

    “드디어 음흉한 속내를 드러내는구려! 당신은 악처(惡妻)요! 그것도 아주 지독한 악처! 제 핏줄 말고는 아무에게도 관심 없는 위선자! 내 당신을 필히 내칠 것이오, 당장 내칠……!”

    방문이 벌컥 열렸다. 장서열이 서슬 퍼런 얼굴로 문 앞에 서있었다.

    놀란 조옥언의 곁에서 장신성은 말을 잃었다. 눈 한번 깜작이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딸의 시선에 그는 제발이 저려 어쩔 줄을 몰랐다.

    “서… 서열이 왔느냐.”

    천천히 방에 들어온 장서열이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냉담한 얼굴로 덤덤하게 입을 여는 그녀에게서 영문 모를 위협이 느껴졌다.

    “아버지, 어머니께 질타가 너무 심하십니다. 전 어머니를 내치실 정도로 큰 문제라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만.”

    조옥언은 딸에게 이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딸은 더 이상 깔깔대며 장난을 좋아하던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아버지, 어머니께서 서영 동생에게 무얼 그리 잘못하셨는지 말씀해 주시지요. 서영 동생은 거처가 너무 넓어 무서운 것입니까? 아니면 너무 잘 먹은 탓에 살이 찐 게 싫은 것입니까? 그것도 아니라면 가르치는 사부가 너무 많아 학업이 힘든 걸까요? 아니면 귀한 비단옷이 피부에 맞지 않으니 넝마 조각으로 바꿔야 합니까?”

    장신성은 예상치 못한 딸의 날카로운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정말로 이 아이가 응석받이에, 조금이라도 성에 차지 않으면 무작정 화부터 내던 그의 ‘착한’ 딸이 맞단 말인가.

    장서열이 한 발 앞으로 나가며 말했다.

    “제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아버지, 서영 동생은 얼마 전부터 줄곧 외출을 했지요. 고급 비단을 걸치고 화려한 가마에도 올랐습니다. 그 아이가 먹는 음식은 모두 최고의 음식이고, 사용하는 찻잔은 모두 고급 찻잔입니다.”

    “…….”

    “그건 전부 어머니께서 친히, 심사숙고하여 고르신 것들이지요. 전부 서영 동생의 뜻을 이뤄주기 위함입니다. 게다가 어머니는 루 부인이 금방주(琴坊主)의 금 연주 솜씨가 좋다는 걸 아시곤, 그 길로 서영 동생과 만날 기회까지 만들어 주셨습니다.”

    “…….”

    “그래도 어머니가 부족했다고 생각하신다면 아버지, 어서 이혼장을 쓰십시오. 이 딸이 서명하는 것을 돕겠습니다. 어머니 같은 악처가 감히 아버지의 뜻을 그르치면 아니 될 테니까요!”

    말을 마친 장서열이 서릿발처럼 냉랭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위엄 넘치는 딸의 눈빛에 순간 장신성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그 역시 지금껏 자신이 내뱉은 말이 모두 억지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옥언은 변명을 싫어하는 성격인데다 화를 낼 때 맹렬한 구석이 있어 아무리 그 말이 옳다 해도 무작정 사람을 반박하게 만들곤 했다.

    그리고 장서열은 줄곧 가장 말을 잘 듣는 자식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어째서…….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냐! 넌 아직 어려 세상 물정을 모른다. 그만 나가 놀거라. 초 마마는 아가씨를 데리고…….”

    그러나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싱긋 웃으며 평소처럼 천진난만하고 예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께서 제게 세상 물정을 모른다 하시니 세상 물정을 아는 이를 데려오는 건 어떨는지요. 당장 외조모님께 기별을 넣을까요, 아니면 대리시경(大理寺卿, 재판, 형벌을 관장하던 관청의 관리)을 데려올까요? 그들도 하찮게 느껴지시면 차라리 어머니께서 친히 입궁하시어 황후마마를 뵙고 말씀드리는 건 어떨까 합니다.”

    장신성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상상만 해도 체면이 남아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장서열!”

    장신성이 소리치자 조옥언이 즉시 제지했다.

    “장신성! 내 딸에게 큰소리를 내면 가만 두지 않을 게야! 괜한 종이 낭비할 것 없이 내가 먼저 당신을 내칠 것이오!”

    장신성은 분노로 거의 혼절할 지경이었다. 감히 자신을 내치겠다니! 하지만 그는 조옥언이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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