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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80)화 (80/449)
  • 제80화

    “서열이가 자네를 많이 아끼는군.”

    서풍엽이 쑥스러워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계속 ‘풍엽’하고 이름을 부르는 건 좋지 않아. 앞으로는 꼭 세자, 혹은 풍엽 오라버니라 부르거라. 이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잖니.”

    “알겠어요. 어머니는 이미 저는 뒷전이시네요. 풍엽 오라버니만 좋아하시고요.”

    “어미는 너희 둘 모두를 아낀단다.”

    서풍엽을 데리고 나온 장서열이 반운루로 향했다.

    “풍엽, 요즘 한가한가 봐요? 어떻게 시간만 나면 찾아오죠?”

    서풍엽이 정색을 했다.

    “오라버니라고 불러야지. 네가 얼마나 버릇없이 구는 줄 알아? 넌 이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애가 아니잖아.”

    “서풍엽!”

    장서열이 주먹으로 그를 치는 시늉을 하자 그가 빠르게 몸을 피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돌진하는 그녀를 와락 껴안았다.

    “알았으니까 그만해! 네게 물어볼 게 하나 있어.”

    엄격한 초 마마를 떠올리며 서풍엽이 그녀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돼?”

    그의 말에 장서열의 웃음이 옅어졌다. 그가 무슨 짓을 한대도 구염락이 태자 자리에 오르는 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생이라고 예외일 수 없었다.

    “구염락과 거리를 둬요. 혹 오라버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도와주고, 그렇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것처럼 행동하세요.”

    서풍엽도 그럴 생각이었다. 다만 그녀가 구염락과 가까운 관계였기에 물어본 것일 뿐, 사실 어떤 황자가 황위에 오르더라도 충왕부는 크게 달라질 것이 없었다. 충왕부의 세력은 이미 누가 황위에 오를 것인지 따지는 차원을 넘어서 있었다.

    “궁금한 게 있어. 그들은 말 잘 듣는 이를 황제로 옹립하려 하면서 어째서 구염락에게 문도무략(文韬武略)을 가르친 거지?”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장서열이 정신없이 웃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 격이죠. 황후가 그를 양자로 맞이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을 거예요. 하지만 그들은 구염락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성과를 보일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겠죠.”

    “호랑이 새끼를 키웠군.”

    두 사람은 마주 보고 웃었다.

    “우린 그들이 앞으로 어떤 고난을 겪게 될지 지켜보기만 하면 돼요.”

    “정말이지 난 평소 그렇게 고분고분하던 구염락이 이런 큰일에 가담할 줄은 상상도 못했어.”

    장서열은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 역시 무척이나 어리석었던 시절이 있었다. 구염락이 태자가 된 뒤에도 그녀는 여전히 그의 능력을 믿지 않았다. 신분이 비천한 구염락은 태자가 될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했다. 무지했던 시절을 떠올리자 그녀는 스스로에게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또 무슨 생각해?”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에 대해서요.’

    “혹 내가 열셋째에게 미움 받을 만한 행동을 한 적이 있을까요? 만일 그가 정말 황위에 오른다면 공주 작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나를 해치지는 않겠죠?”

    진지한 그녀의 얼굴을 보던 서풍엽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거야?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법이니, 구염락이 정말 그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면 이제는 우리도 그와 자주 접촉하지 않는 게 좋겠지.”

    장서열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는 어째서 그가 성공할 거라고 확신하는 거예요?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은 이제껏 한 번도 하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그랬나?”

    “네.”

    서풍엽의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해. 며칠 후에 호수로 뱃놀이를 하러 가자. 날이 더우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질 거야.”

    고개를 숙인 장서열이 발끝에 장식된 꽃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혼사는…….”

    비록 국상(國丧)은 아니었지만 태자에게 변고가 생긴 이상 앞으로 몇 년간 경사는 삼가는 것이 좋았다. 특히 장서열과 서풍엽의 경우는 더더욱 그러했다. 자칫 잘못하면 황제에게 미운털이 박히기 십상이었다.

    “그것도 내가 걱정할 일이야. 넌 그저 얌전히 내가 아내로 맞이하러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으면 돼.”

    웃음을 터뜨린 장서열이 발돋움하여 서풍엽의 목에 팔을 둘렀다.

    “사실 좀 늦게 가는 게 좋아요. 난 아직 열 살밖에 안 됐잖아요. 너무 일찍 혼인하는 것도 남부끄러워요.”

    “쪼그만 게 사람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구나.”

    장서열과 한 시진 정도 시간을 보낸 후 좌상부를 나오던 서풍엽은 돌연 이상한 점을 느꼈다. 그는 오늘 장서열과 조정의 대소사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그녀는 막힘없이 전부 알아듣고 대답했다. 깊이 생각할 일은 아니었지만 평소 바깥일에 조금도 관심을 갖지 않던 그녀가 어떻게 조정 일에 대하여 모든 걸 알고 있단 말인가.

    서풍엽은 다시 한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어린 정혼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처럼 바보가 아니었다.

    * * *

    태자의 변고는 바로 공개되지 않았다. 황후가 처소에 누구도 들이지 않는 것을 제외하면 궁의 모든 것은 평소와 같았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만약 태자에게 병세가 있다면 가벼운 감기일 뿐이라는 듯 조용한 날들이 지나갔다. 그러나 궁에 연줄이 닿아 있는 이들은 무서울 정도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권 씨 가문에 소식이 닿은 시각은 황후가 변고를 알게 된 시각과 다르지 않았다. 이제 그들 앞에 놓인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권 노야는 황후보다 더욱 이성적이었다. 그는 태의가 한참을 우물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자 바로 사태의 심각성을 눈치챘다. 당장 해야 할 일은 황후를 보호하는 일이었다. 문제는 장애를 얻게 된 태자가 오히려 목숨을 부지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그가 장차 누군가 휘두르는 검 아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의미했다.

    권 노야가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이미 이틀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아내를 입궁시켜 황후를 위로하는 것 말고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때 행동에 나서는 건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서재 밖을 서성이던 권서함은 결국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사촌 형님의 일을 거론하는 건 십중팔구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할 것이다.

    문에 닿아 있던 손을 거둔 그가 창문에 비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가문을 위해 헌신하는 아버지께 감사한 마음이 드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가 보잘 것 없이 느껴졌다. 현재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께 걱정을 끼치지 않도록 묵묵히 주어진 일을 하는 것뿐이었다.

    한편, 현 씨 가문에서는 이번 사고가 필시 서북 장군에게서 비롯된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은밀히 서북 지방으로 파견한 정탐꾼은 아무 것도 찾아내지 못했고, 황제는 격노했다.

    황궁을 나서던 현 노야는 서북 장군이 어떻게 이토록 빈틈없이 일을 꾸몄는지 납득이 되지 않았다. 자신의 추측이 틀렸을 리 없었다. 그자 외에 황제에게 불만을 품을 만한 인물은 없었다. 만일 이번 일이 누군가의 음모라면 태자에게 손을 뻗을 만큼 대담한 자도 서북 장군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아무 증거도 찾아내지 못하는가.

    서재에 든 현천기가 재차 일깨우듯 부친에게 말했다.

    “서북 장군이 아닙니다.”

    현 노야가 벼루를 집어 현천기의 이마를 향해 던졌다.

    “네가 뭘 아느냐! 분명 그자의 소행이라니까!”

    현 노야가 궁에서 벌어진 일의 기록을 미친 듯이 들추어 보며 쉬지 않고 중얼거렸다.

    “그자가 틀림없어… 확실해…….”

    태연하게 이마를 어루만진 현천기는 부친을 힐끗 쳐다본 후 뒤돌아 서재를 나왔다. 이번 사건의 희생양이 서북 장군의 측근이 되리라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한편 장신성은 초조해했다. 태자를 만나려다 문 앞에서 거절당한 그는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하지만… 서영이의 일은 이미 다 이야기가 되었는데? 설마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겠지.’

    장신성은 침통한 얼굴로 궁에서 돌아왔다. 대문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장서양의 모습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그처럼 설 자리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하는 건 이 집안에서 오로지 장서양뿐이었다.

    장서양은 아버지의 안색이 좋지 않자 일이 순조롭게 풀리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아버지, 안 된다고 하던가요?”

    장신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태자 전하께서 이미 모든 연줄을 대 놓았으니 아마 문제는 없을 게다. 다만 요 며칠 전하께서 출궁하지 않는 까닭을 모르겠구나. 좀 더 기다려보자. 이렇게 오랜 세월을 기다렸는데 며칠이야 더 못 하겠느냐.”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서영이도 최근 금음방(琴坊主)에게서 금을 배우게 되었으니 곧 좋은 날이 오지 않겠습니까?”

    “그래, 내일 다시 입궁해보마.”

    다음날, 태양이 대지 위를 환히 비췄다. 아침부터 시작된 무더위가 곧 이어질 폭염을 예상케 했다. 각 가문의 가마가 골목을 통과해 궁 앞으로 모여들었다. 성문이 열렸고, 관원들이 차례로 안으로 들어갔다.

    장신성은 앞으로 장서영이 초혜전에서 받게 될 처우를 논하기 위해 예부의 몇몇 관리들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예부상서가 의아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황제 폐하께서 초혜전의 모든 수업을 중단하라는 성지를 내리셨습니다. 어제 이미 모든 가문에 소식을 전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모르셨습니까?”

    장신성은 순간 멍해졌다. 처음 듣는 얘기였다.

    ‘어째서 초혜전의 수업을 중단한다는 것인가. 그럼 서영이는 어쩌란 말인가!’

    지금까지 해 온 모든 노력이 수포가 되었다. 장신성은 누군가 자신을 비웃는 소리를 들은 것만 같았다. 다들 이 사실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숨긴 것이다.

    ‘내가 어릿광대처럼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비웃으려 한 것이겠지!’

    그러나 예부상서 만 대인(万大人)은 장신성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그간 초혜전의 관리들과 가깝게 지내는 장신성을 보며 그저 초혜전의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장녀인 장서열이 막 초혜전을 떠났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만 대인은 딸 만정과 장서열의 친분을 생각해 그의 귓가에 넌지시 속삭였다.

    “류 공자가 낙마했을 때 이미 논의되었던 일입니다. 폐하께서도 고민하고 계셨으나 어찌된 일인지 어제 모든 수업을 폐하라 명하셨습니다. 아이들은 짐을 찾으러 온 것이고요.”

    장신성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일찍부터 그런 이야기가 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에게 귀띔을 해 주지 않았다.

    관원들 사이에 선 장신성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동안 그는 스스로 인맥을 잘 쌓아 왔으며, 탄탄한 학식으로 나라에 많은 공로를 세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토록 안간힘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조국공을 등에 업고 출세했다는 과거는 지워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치가 된 기분이었다. 이제껏 모든 이들에게 휘둘린 것이다. 서영이를 초혜전에 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을 때 사람들은 뒤에서 모두 자신을 비웃고 있었던 게 아닌가!

    ‘서출을 위해 노력한 것이 뭐가 문제란 말이냐! 내가 본처를 배신하고 첩을 총애한다고 그리도 비웃고 싶더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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