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화
그녀는 마치 옛날로 돌아간 듯 울고 싶어졌다. 그와 영원히 변치 말자던 맹세를 했었다. 아직 세상을 모르던 시절, 도도하기 짝이 없던 젊은 날들은 지난 스무 해 동안 그녀를 상부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할 정도로 지독한 저주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오늘, 그에게 알현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그녀는 자존심이 없는 사람처럼 화려하게 치장한 채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풍윤, 참으로 가증스럽구나. 죽어서도 만나지 않겠다는 나의 맹세가 그리도 힘겹더냐? 고작 이런 수법으로, 그것도 몇 번씩이나 딸을 볼모 삼아 나를 건드리다니!’
조옥언은 젖은 눈가에도 아랑곳없이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황제 앞에서 결코 고개 숙이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마차가 궁문 앞에서 멈추었다. 갑자기 그 옆으로 누군가가 말을 타고 스쳐지나 궁문 안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번개처럼 빠른 속도였고,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궁문을 지키던 시위는 사라지는 말의 꼬리를 바라보며 마부에게 영패(令牌)를 돌려주었다.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가 보군. 저렇게 급하다니!”
한편, 조석궁(朝夕宫) 서재에 있던 황제는 벌써 수차례 자리에서 일어나 곁에 있던 태감에게 자신이 늙지 않았느냐 물어 보았다. 진 공공은 귀찮은 기색도 없이 고개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폐하께서는 과거처럼 기운이 넘치고 준수하십니다.”
황제는 진 공공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다시 자리에 앉은 그는 거울을 보고픈 충동을 느꼈다. 어젯밤 검게 칠한 머리카락에 다시 흰머리가 돋지는 않았는지, 몸에 걸친 옷은 잘 어울리는지,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이었다.
“황제 폐하!”
누군가 알현을 청하기도 전에 갑자기 서재의 문이 벌컥 열렸다. 놀란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식을 전하러 온 소태감이 전전긍긍하며 뛰어 들어와 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폐하, 큰일 났습니다! 태자 전하께 변고가 생겼습니다!”
잠시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황제가 되물었다.
“변고라니? 무슨 일인지 당장 고하라!”
황제가 위엄 넘치는 얼굴로 걸어 나왔다. 일시에 몸에 흐르는 기운을 바꾼 그는 가히 일국의 제왕다웠다. 소태감이 급히 고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평소처럼 오전에 말을 타고 활을 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태자 전하를 모신 말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하여… 전하께서는 당시 말고삐를 잡지 않은 상태였고, 노비가 달려갔을 때 태자 전하께서는 이미 말에서 낙상하신 후였습니다. 급히 도착한 태의가…….”
“태의가 뭐라더냐!”
황제가 초조한 얼굴로 초혜전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소태감이 그의 뒤를 따르며 고했다.
“태의가 말하길, 태자 전하께서 허리를 크게 다치시어 앞으로… 앞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걷지 못할 것이라 하옵니다, 폐하!”
끝장이다. 모든 게 끝이었다. 태자의 태감으로 누렸던 영화는 이제 모두 과거의 일이었다. 그는 앞으로 어떠한 장래도 기대할 수 없었다. 오늘은 그가 조석궁에 발을 들이는 마지막 날이 될 것이다.
소태감의 말에 갑자기 걸음을 멈춘 황제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태자의 측근으로 결코 거짓을 고할 자가 아니었다. 황제는 초혜전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진 공공이 받은 충격 역시 적지 않았다. 태자 전하의 몸이 망가지다니! 이는 국가의 미래가 상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진 공공은 다급히 아랫사람을 불러 황궁으로 오고 있을 상야 부인에게 보냈다. 그녀에게는 일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진 공공의 말을 전해 들은 어린 태감이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입단속 철저히 하거라. 폐하께서 공표하시기 전까지 절대 이 사실이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서는 안 된다. 알겠느냐?”
“명심하겠습니다, 공공.”
물론 궁인들 중 그 정도로 지각이 없는 자는 없었다. 다만 누구보다 존귀했던 태자가 이렇게 무너졌다는 사실을 믿기 어려울 뿐이었다. 어린 태감은 입을 꾹 다문 채 서둘러 상야 부인에게 향했다. 머지않아 황실에 피바람이 불어올 듯했다.
‘태자 전하께서는 왜 갑자기 그런 변고를 당하셨을까?’
그는 이번 사고가 정말로 우연인지, 아니면 누군가 황제의 발목을 잡기 위해 일부러 꾸민 일인지 궁금했다.
다시 상부로 돌아가는 조옥언도 정신이 멍했다. 심지어 궁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을 때 느꼈던 분노조차 까맣게 잊은 채였다. 이제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누가 태자의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조옥언은 소란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었고, 이는 그녀의 친정인 조국공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녀는 당장이라도 큰 오라버니께 이 소식을 알리고 서둘러 일을 도모하고픈 충동을 느꼈다.
물론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태자에게 변고가 생겼고 이 사실을 미리 알았다 한들, 어차피 바꿀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조옥언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서서히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문득 한 가지 생각이 그녀를 다시 심란케 했다.
‘혹시 충왕부가 이 일로 해를 입는 것은 아닌가?’
어쨌든 지금 돌고 있는 소문은 모두 장서열을 사이에 둔 세자와 태자의 다툼 때문이었다.
“여봐라! 당장 충왕부에 사람을 보내 세자를 모셔오너라!”
상부에 도착하자마자 소리친 조옥언이 멈칫했다.
‘아니지… 아니야…….’
조옥언은 서풍엽이 이런 일을 꾸밀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소문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다. 어쩌면 누군가는 장서열이 남편을 잡아먹을 팔자를 타고났다며 헛소문을 퍼뜨릴지 모를 일이었다.
조옥언은 자신의 엉뚱한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 남편을 잡아먹을 팔자라니! 설령 그게 사실이라 해도 태자는 자신이 벌인 악행에 대한 대가를 치른 것일 뿐, 결코 딸아이를 탓할 수는 없었다.
“홍촉, 가서 서열이를 데려와라.”
“예.”
장서열이 긴 연줄을 끌며 나타났다. 한가로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장래에 대한 걱정도, 마음속에 품은 큰 뜻도 없었다. 따라서 누군가와 다툼을 벌일 이유가 없었으며, 상부를 장악한 어머니 덕에 굳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아름다운 얼굴을 한껏 치켜든 그녀가 티 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머니, 찾으셨어요?”
장서열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 자신과 어머니 모두 평안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즉시 방문을 닫게 한 조옥언이 딸을 침대에 앉힌 뒤 휘장을 내리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태자에게 변고가 생겼다. 그는 제위에 오르지 못할 게야.”
“그래요? 어머니, 달리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전 다시 연을 날리러 가 보겠습니다. 방금까지 아주 높이 날았거든요.”
조옥언이 얼떨떨한 얼굴로 딸을 불러 세웠다.
“큰 변고가 생겼다질 않느냐! 아주 중요한 일이다. 어째서 그런 반응인 게야?”
손에 잡은 실을 고쳐 쥔 장서열이 순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머니, 전 태자의 불행을 안타까워 할 수도, 당장 궁으로 달려가 황제 폐하를 위로해 드릴 수도 없어요. 제가 어찌 하면 좋을지 알려 주세요.”
조옥언은 딸아이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딸은 이제 겨우 열 살이었다. 학업에는 흥미조차 없는 딸에게 대체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
“놀랍지도 않으냐?”
만약 다른 사람이 보았다면 딸아이가 저지른 일이라고 오해하기 십상이었다. 사람에게는 기본적으로 호기심이 있었다. 당장 그녀만 해도 대체 누가 꾸민 일일지를 생각하던 차였다.
하지만 하지만 장서열은 궁금해 봐야 답이 나올 일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전생에서 흐지부지 끝났던 일이 이번 생이라고 결론이 날 리 없었다. 몇 가지 가능성만 짐작할 뿐이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들이 일찍 손을 쓴 듯했다. 그녀의 기억으로는 한 달쯤 뒤에 일어났어야 할 일이었다.
“궁금하긴 하네요. 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머니?”
말은 그랬으나 장서열의 말투에서는 궁금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조옥언을 끌어안고 애교를 부렸다.
“이거 놓거라. 아직까지도 어미한테 달라붙어 어리광이라니.”
조옥언은 바깥일에 관심이 없고 큰 포부조차 없는 딸의 모습을 보자 왠지 머리가 아파 왔다. 이때 문 밖에서 홍촉의 목소리가 울렸다.
“부인, 세자께서 당도하셨습니다.”
‘이렇게 빨리?’
조옥언은 놀랐다. 서풍엽이 온통 빨개진 얼굴로 방에 들어섰다. 그에게 방문을 열어 준 홍촉의 얼굴에는 의미심장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시종이 말하길, 세자를 모시러 문 밖을 나서자마자 세자와 마주쳤다고 하더군요. 세자께서는 저희와 정말 마음이 잘 통하시는 것 같아요. 부인과 아가씨께서 찾으시는 걸 어떻게 아셨어요?”
홍촉의 놀림에 서풍엽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는 방금 전 상부 대문 앞을 어슬렁대며 어떤 구실로 장서열을 만날 수 있을지 고심하던 참이었다. 장서열이 그에게 장난스러운 눈짓을 보내자 그가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두 손을 펴보였다.
조옥언은 두 아이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딸아이가 옳았다. 태자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로 중요한 건 내 아이들의 행복이었다.
“부인님, 무슨 일로 저를 찾으셨습니까?”
조옥언은 홍촉에게 문을 지키도록 지시한 뒤 궁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서풍엽의 얼굴이 점점 굳어졌다. 태자의 변고는 국가의 근간을 뒤흔들 만한 중대사였다. 그는 구염락의 뒤에 놓인 숨은 세력을 떠올렸다.
‘바로 급소를 찌르다니, 그들은 대체 어느 정도로 깊이 침투해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구염락을 옹립하는 것일 터였다.
구염락을 떠올리자 서풍엽은 아무래도 현실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과 장서열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조그만 녀석이 정말로 누군가의 지지를 얻어 전면에 나선다고?
서풍엽은 문득 자신이 구염락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걸 깨달았다. 최근 장서열이 구염락을 그토록 경계했던 것은 그녀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눈치챘다는 걸 뜻했다.
서풍엽이 무의식적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고개를 젓는 것으로 그를 안심시켰다. 조옥언은 미래의 사위가 자신의 딸만큼 무지하지 않다는 걸 확인한 후 마침내 평정을 되찾았다.
“나는 누군가 세간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 딸아이를 모함할까 두렵다네. 어쨌든 지금까지 멀쩡했던 태자가 서열이와의 일이 풍문으로 번지자마자 이리 되었으니 말이야. 자네 생각은 어떤가. 누군가 서열이를 물고 늘어질 것 같지는 않은가?”
순간 서풍엽의 눈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안심하십시오. 그리 되면 황제 폐하께서도 책임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더군다나 흠천감에서는 서열이가 봉명지명을 타고났다고 했을 뿐, 반드시 태자비로 맞이해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설령 말도 안 되는 죄명을 붙인다 해도, 억지라는 논란은 피하기 힘들 겁니다.”
조옥언이 한숨을 내쉬었다.
“서열이만 무사하다면 그걸로 됐네.”
장서열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머니, 안심하세요. 이번 일은 저희와 관련이 없어요. 오늘은 풍엽이 모처럼 쉬는 날인데, 저희 때문에 집에서까지 조정 일로 근심하게 만들면 안 되지 않겠어요?”
장서열의 말에 조옥언이 서풍엽을 향해 웃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