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8화
“둘째 오라버니, 올해도 국자감(国子监) 시험을 볼 거예요?”
장서목은 국자감이라는 말을 듣자 바로 머리가 아파오는 걸 느꼈다.
“글쎄, 형님처럼 오로지 서책에 빠져 있는 사람만 국자감의 엄격한 합격 기준에 도달할 수 있다고.”
장서영이 자랑스러운 듯 장서양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당연하죠. 큰 오라버니는 최고니까.”
사적인 자리에서 장서영은 그들을 상부의 법도대로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어렸을 때 장서전을 무척이나 따랐지만 그는 큰언니 장서열에게만 지극했다. 그녀에게 잘해 주는 건 오로지 친형제인 장서양, 장서목 두 명뿐이었다. 그녀는 어머니 기 씨의 말처럼 누가 진짜 자신과 가까운 사람인지를 구분해야 했다. 언제까지나 천진난만한 아이일 수는 없었다.
“말은 잘 하는구나.”
올해 열두 살이 된 장서양은 어느덧 풍채 좋은 소년이 되어 있었다. 그는 품행이 우아한 미남으로, 뚜렷한 미간의 윤곽은 젊었을 적 장신성과 꼭 닮은 모습이었다.
장서양은 작년에 국자감 동식(童试)을 통과했으며, 올해는 수재(秀才) 시험에 도전할 계획이었다. 그는 좌상부에서 가장 뛰어난 학업 성과를 보여주는 자녀들 중 하나였다. 하지만 그러한 영예도 서출 소생들 사이에서나 회자되었을 뿐, 사실 국자감에서의 성적은 그리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국자감은 유능한 인재를 배출하는 대주국 제일의 학부(学府)로 수많은 세도가의 자제들이 수학 중인 곳이었다. 천성적으로 우매하게 태어나지 않는 한 그들은 모두 유리한 환경에서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중용(中庸)》을 깨우친 주 대학사의 아들은 국자감 스승들의 자랑이었다.
신분이 낮은 아이들은 국자감에 머물기 위해 남들보다 백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했고, 설령 뛰어난 성적을 거둔다 하더라도 스승의 눈에 들기는 쉽지 않았다.
장서양은 속마음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누이동생이 기뻐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문득 지난밤 아버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다시 한번 누이동생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서영은 용모가 단정하고 총명했으며, 귀족 가문의 여식들이 지닌 나쁜 버릇도 없어서 하인들에게 온화하고 친절했다. 누이동생은 신분을 제외하면 장서열보다 못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 어찌 황후가 될 운명을 감당하지 못하겠는가.
“아버님께서 말씀하신 예의학(礼仪学)은 다 익혔고?”
장서양이 안쓰러운 손길로 장서영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만일 자신이 조금 더 잘났더라면, 혹은 서영이가 장서열과 같은 신분이었다면, 이렇게 힘들게 노력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서영이가 초혜전에 발을 들이는 것조차 그토록 공을 들여야 했다.
“다 배웠어요.”
“만약 일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다음 달부터 초혜전에 들어가 범 씨 가문 둘째 아가씨의 반독을 할 수 있을 거야. 가서는 경거망동하지 말고, 오로지 듣기만 할 뿐 말은 하지 말거라. 남에게 미움을 사지 않도록 주의하고. 알았지?”
장서영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아버지께 폐를 끼치지 않을 거예요.”
한편, 진주초(珍珠草)의 가지치기를 마친 조옥언이 장갑을 벗고 손수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서열이는?”
“수방(绣房)에서 자수를 놓고 계십니다. 봉 사부가 말하길, 아가씨께서 이해력이 뛰어나고 손재주가 좋다고 합니다.”
조옥언의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어렸다.
“서열이는 나와 달리 똑똑하고 무엇이든 빨리 배우지. 노야는 아직도 단념하지 않았더냐?”
조옥언에게서 손수건을 건네받은 홍촉이 호갑(护甲, 손가락에 끼우는 장신구)을 끼워 주며 한숨을 쉬었다.
“대인의 성격을 아시잖습니까. 이번에야말로 여섯째 아가씨를 초혜전에 들이겠다고 아주 단단히 결심을 하신 듯합니다. 대체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어요.”
조옥언은 홍촉의 말을 신경 쓰지 않았다. 현재 그녀의 모든 관심은 온통 연경에 나도는 유언비어에 쏠려 있었다. 장서열은 입궁하여 황제를 만나고자 했다. 그러나 이런 일로 딸아이를 나서게 만들 조옥언이 아니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결국 조옥언은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다시는 황궁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딸의 안위가 걸린 지금, 맹세 같은 건 없었던 일인 양 그 역겨운 곳에 다시 발을 들이고자 했다.
“서신은 보냈느냐?”
홍촉은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부인이 얼마나 황궁을 싫어하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 마음이 아팠다. 부인은 오랜 세월 궁을 쳐다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으나 황제의 고집에 결국 원치 않는 입궁을 할 생각인 듯했다. 큰아가씨와 예비 사위의 미래를 위해서였다.
조옥언은 시선을 돌려 방금 가지치기를 마친 진주초를 바라보았다. 둥그렇게 도자기 그릇 안에 누운 진주초의 모습은 퍽 귀여웠다.
‘그때 내가 저 진주초처럼 모나지 않고 귀엽게 굴었더라면 그자들은 어찌하였을까. 흠천감에서 나를 일컬어 나라에 화를 불러올 요녀라 칭하는 일도, 태후의 미움을 사는 일도 없었을까.’
하지만 조옥언은 차갑게 냉소를 머금었다. 흠천감은 누군가 손에 쥔 하찮은 바둑돌일 뿐이었다. 그녀는 태후가 자신을 반대한 이유가 흠천감에서 내놓은 점괘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짐작컨대 태후가 자신을 마뜩찮아 했기에 윗전의 눈치를 본 흠천감에서 이에 장단을 맞춰 준 것뿐이었다.
그녀의 일생은 그렇게 뒤바뀌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딸만큼은 절대로 같은 전철을 밟도록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 누구도 감히 서열이를 해칠 수 없었다.
조옥언이 한이 서린 눈길로 탁자를 세게 내리쳤다. 놀란 홍촉이 황급히 조옥언의 손을 들어 올려 혹시나 다친 곳은 없는지 거듭 확인했다.
* * *
이른 아침, 양팔에 양동이를 든 구염락이 부지런히 궁의 뜰을 넘나들었다. 소리자는 구염락의 뒤를 따라 달리며 그에게 장서열을 둘러싼 소문에 대해 알려주었다.
이때쯤 소리자는 몇 차례의 충격적인 경험 끝에 절대로 주인의 심기를 거슬러선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태였다. 주인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그의 뜻을 거스르고,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주인을 나서게 한 건 노비가 아직 철이 들지 않은 까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은 여전히 그들에게 잘해 주었다. 감사한 일이었고 마땅히 주인의 행복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했다. 소리자의 이야기를 들은 구염락이 계속해 달리면서 물었다.
“서열 누님이 존귀한 운명을 타고 났다는 게 무슨 뜻이지?”
살그머니 주위를 둘러본 소리자가 작은 눈을 반짝이며 답했다.
“황후가 될 운명이라는 뜻입니다.”
‘황후?’
구염락은 살면서 단 한 번 목격했던 즉위 행렬을 떠올렸다. 요란한 징과 북소리, 그리고 수많은 궁녀를 거느린 행렬은 화려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의 서열 누님은 그러한 사치마저 부족할 만큼 귀한 사람이었다.
소리자가 혼잣말처럼 작게 말했다.
“이번에는 태자 전하께서 잘못하셨지요. 아무리 장 씨 아가씨를 태자비로 맞이하고 싶다 해도 그런 소문을 퍼뜨리다뇨. 세자와 아가씨가 이번 일로 크게 곤란했을 겁니다.”
구염락이 그제야 자신이 엉뚱한 상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서열 누님이 황후 자리와 얼마나 어울리는지를 따질 때가 아니었다. 이미 세자와 정혼한 서열 누님이 어찌 다시 태자의 짝이 된단 말인가!
“태자 전하는 아가씨가 세자와 혼인하지 못하도록 분명 고의로 소문을 퍼뜨린 것입니다. 태자께서는 황제 폐하 다음으로 존귀한 분이니까요.”
“…….”
“만약 장 씨 아가씨가 황후의 운명을 타고 났다는 소문을 모두가 알게 되면 어쩔 수 없이 태자와 혼인하게 되겠지요. 태자 전하는 참 음흉한 사람입니다.”
구염락이 돌연 양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떨어뜨렸다. 그를 바짝 뒤따르던 소리자는 하마터면 물통에 코를 박을 뻔했다.
“전하…….”
구염락의 눈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태자가 나의 서열 누님을 겨냥했다. 누님이 세자에게 그렇게 마음을 쓰는데…….’
구염락이 지그시 이를 깨물었다. 서열 누님을 생각하자 마음이 아팠다. 태자가 세자를 궁지에 몰아넣었다면 서열 누님 역시 태연할 리 없었다. 그러나 서열 누님은 일개 신하의 딸이었고 태자는 대주국의 이인자였다. 그녀는 자신에게 화를 냈던 것처럼 태자에겐 그러지 못할 것이다.
‘서열 누님이 억울한 일을 당하고 있다.’
구염락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태자는 ‘존귀한 운명을 타고났다’는 한마디로 장서열과 서풍엽을 고개 숙이게 하고, 그녀로 하여금 분을 삭이게 만들었다.
구염락은 다시 물통을 들고 성큼성큼 샛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아무 것도 못 들은 사람인 듯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놀란 소리자가 황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소리자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눈치챘다. 다만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모를 뿐이었다.
여름날의 저녁은 떠들썩했다. 매미들은 대나무 장대가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목이 터져라 울었고 밝게 떠오른 달은 마치 태양처럼 남소원을 비췄다.
구염락은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고깃덩어리 세 개를 손에 든 그가 구석을 향해 무엇인가 소곤거렸다. 잠시 뒤, 고개를 기울인 채 누군가에게 귀를 기울이던 그가 곧 바보 같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손에 든 고깃덩어리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는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소매 속에서 하얀 봉투를 꺼낸 구염락이 내용물을 바닥에 뿌리자 온몸이 새까만 작은 생쥐 세 마리가 찍찍대며 구석에서 기어나왔다. 바닥에 뿌려진 약을 전부 먹어 치운 쥐들이 취한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떴다.
구염락이 귀엽다는 듯 생쥐들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조심해라.”
후궁이나 황자의 처소와는 달리 남소원 같은 외진 곳에서 생쥐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과거 구염락은 먹을 것을 찾기 위해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그때는 고양이를 만나든 구염락을 만나든, 생쥐에게는 같은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지만 몇 년 전부터 모든 것이 달라졌다.
밤이 깊어 갔다. 달빛조차 비치지 않는 조용한 구석, 생쥐 한 마리가 냄새를 따라 마구간에 기어들었다. 잠시 멈칫한 생쥐가 다시 냄새를 맡으며 마구간에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내달렸다. 이윽고 원하던 음식을 찾아낸 생쥐는 홀린 듯 발톱을 세운 채 음식을 먹어치운 뒤, 실컷 배를 채우고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도망쳐 버렸다.
* * *
다음날 정오, 상부의 대문이 열리고 조옥언의 마차가 나왔다. 황궁으로 향하는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풍윤(丰润, 황제)의 허락을 얻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군.’
조옥언은 그대로 마차에서 뛰어내려 다시 상부로 돌아가고픈 심정이었다. 차라리 영원히 나오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