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7화
장서열은 일단 지켜본 뒤 상황이 달라지지 않으면 입궁하여 황제를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당신의 아들과 혼인할 생각이 없으니 이제 그만 멈춰 달라고, 내 어머니는 이미 다 잊었으니 과거에 매여 있지 않아도 된다고 설득할 작정이었다.
황제와 충왕의 힘겨루기에 연경에는 여러 차례 풍랑이 몰아쳤다. 그러나 놀랍게도 민심이 두 갈래로 나뉘어 싸우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은 그저 사적으로 수군댈 뿐이었고, 심지어 어떤 이는 자신의 여식이야말로 정숙하고 총명하니 봉명지명을 타고난 게 틀림없다고 떠들기도 했다. 범 씨 가문 역시 친히 발 벗고 나서 자신들의 여식 범억아야말로 어질고 현명하며 인품이 출중하다고 떠벌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연경의 관원들은 신분고하와 관계없이 틈만 나면 자신의 딸을 다른 집안의 딸과 비교하기 시작했다. 특히 혼기가 찬 여식을 둔 이들은 흠천감에 딸의 사주단자를 넣고 과연 딸이 귀한 운명을 타고났는지 풀어 달라고 청하기 바빴다.
젊고 성실한 관원들은 충왕을 탄핵하기 위해 무수한 상소문을 준비했지만 윗선에서 이를 가볍게 무시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젊은 관원들은 자신들이 별것도 아닌 일을 괜히 요란스레 떠든 것은 아닌지 주춤하는 기세였다.
조정 일에 잔뼈가 굵은 나이 지긋한 관원들은 그저 태연했다. 드러내 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 중 지난날 황제와 조옥언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황제는 조옥언에게 진 빚을 갚고자 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남편을 등용했으며, 최근 몇 년간 언제 어디서나 장 씨 가문의 적녀가 연경 최고의 규수라고 치켜세웠다. 비록 조옥언을 아내로 맞이하지는 못했지만 그녀의 딸을 자신의 아들과 혼인시키겠다는 뜻을 만천하에 공표한 셈이었다.
하지만 조옥언은 조금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정말 홧김에 충왕부와 정혼을 맺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황자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번 사건은 겉으로는 충왕부와 흠천감의 충돌로 보였지만 실은 황제와 조옥언의 감정싸움이었다.
따라서 정말로 충왕에 대한 탄핵 상소까지 올려야 할 일인지, 일이 그토록 심각한 상황인지는 향후 두 사람이 취할 태도를 봐야 했다. 만일 황제와 조옥언이 단순히 서로의 의중을 떠보는 중이라면 섣불리 탄핵을 주청하는 자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황제가 대체 언제까지 장서열을 태자비로 삼겠다고 고집을 부릴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조옥언이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다면 황제는 포기할 테고, 그렇게 되면 황실이 충왕부와 척을 질 일도 없었다.
그러나 만약 태자가 뜻을 굽히지 않고 조옥언 또한 마음을 돌린다면, 충왕부에서는 더는 소란을 피울 명분을 잃는 셈이었다. 그리고 이는 태자와 충왕부 모두에 좋은 일이기도 했다. 비록 충왕부의 체면에 살짝 금이 가기는 하겠으나 황제는 그들 가문에 무한한 은혜를 내리는 것으로 보상을 대신할 터였다.
그러니 겨우 이 정도 일에 탄핵을 주청 드리거나 앞장서 관여하는 자는 바보나 다름없었다.
소문에서 한 발짝 물러선 관원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이번 일을 더욱 우습게 보이도록 했다. 중립적인 견해를 지닌 일부 대신들은 황제의 유치한 행동에 몹시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 중심에 선 권 씨 가문은 오늘날 황후의 친정이자 태자의 외가였다. 황후의 오라비여서가 아니라, 군주를 대하는 신하의 입장에서 권 노야는 진중하지 못한 황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황제는 문무를 고루 갖춘 훌륭한 제왕임은 틀림없었으나, 제멋대로 구는 성격인 것도 사실이었다.
서재에 앉은 권 노야가 조카가 보낸 태감을 언짢게 바라보았다.
‘이미 범 씨 가문의 딸을 양제로 맞이했는데도 매일 다른 계집만 생각하다니, 어찌 체통이 서겠는가!’
그는 누이동생이 태자의 응석을 모두 받아주며 키운 탓에 태자 역시 그의 부친처럼 제멋대로인 것이라 여겼다. 총명하나 진중함이 모자라 성군이 되기 어려운 재목이었다.
“돌아가서 태자께 이번 일은 안 된다고 고하시게.”
권 노야는 어떠한 여지도 남겨두지 않고 태자의 부탁을 거절했다. 태감은 입장이 몹시 난처했다. 권 노야는 태자의 외삼촌이었지만 자신의 주인은 태자였다. 그는 태자 전하의 유일한 소원을 딱 잘라 거절하는 권 노야가 야속했다.
“권 노야, 다시 한번 생각해 주시지요. 태자 전하께서는 이번 일이 성사되면 반드시 후한 사례를 하겠다고 약조하셨습니다.”
권 노야는 진심으로 손에 쥔 붓을 내던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궁에서 나온 이에게 차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말로 쏟아낸다고 해도 화가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늙은이는 식견과 학식이 모자라 중책을 맡을 수 없으니, 태자 전하의 상도 받을 수 없다네.”
“권 노야.”
“손님을 배웅해 드려라.”
여자 문제로 충왕부와 잡음을 일으키다니. 망신이 따로 없었다. 태감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는 권 노야의 모습에 울상을 지으며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
권서함은 줄곧 서재 한편에 앉아 있었다. 그는 사촌 형님이 벌인 일에 대해 이제껏 어떠한 견해도 드러낸 적이 없었다. 태감이 떠난 후, 비로소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아버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권 노야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계집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냐. 체통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권서함은 최대한 사촌 형님의 입장을 대변해 말했다.
“태자께서도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소자가 듣기로 충왕부에서 이미 장 씨 가문에 납폐(納幣, 정혼이 이루어진 증거로 신랑 측이 신부 측에 보내는 예물)를 보내려고 한답니다. 태자께서는 조급한 마음에 신중함을 잃은 것이고, 폐하께서는 그 마음에 부채질을 하시니 일이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
“만약 아버님께서 태자 전하의 뜻을 이뤄 주신다면 더는 귀찮은 일이 없을 테니 나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소자는 충왕께서 그토록 고집을 부리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어찌하여 포기하지 않으려 하는지요.”
권서함은 충왕의 태도가 신하된 도리에 어긋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권 노야가 아들의 말에 더욱 화를 냈다.
“포기하지 않는 건 두말할 것도 없고, 제 아들을 위해 어떻게든 이기려 들 것이다. 나이 어린 태자가 겁도 없이 충왕부에 맞서는 건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이야! 너도 행여 앞으로 이런 지저분한 일을 벌일 생각일랑 말거라!”
권서함이 즉시 대답했다.
“예, 아버지.”
괜히 불똥이 튄 격이었다. 권서함은 문득 활을 당기던 장서열의 모습이 떠올라 자기도 모르게 슬며시 미소 지었다. 그는 장서열이 황후가 될 그릇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차갑고 굽힐 줄 모르는 성격이었다. 자애로운 만백성의 어머니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권 노야는 평소와 다름없는 권서함의 모습에 마음을 놓았다. 그는 아들이 장서열과 왕래가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가 본 장 씨 가문의 여식은 가까이하면 반드시 구설에 오르는 화근이었다. 더 가까워지기 전에 아들에게 미리 일깨워 줄 필요가 있었다.
“그들 일에는 관여하지 말거라.”
“예.”
“나를 안심시키는 건 너밖에 없구나.”
권서함은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가 왜 갑자기 상념에 빠져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 * *
현 씨 가문의 계단에 두툼한 흙이 쌓였다. 처마 밑으로 그간 여러 차례 드나들던 제비가 둥지를 틀었다.
회색 장삼을 걸친 현천기가 마차에서 내려 진흙이 뒤섞인 계단을 밟고 올라갔다. 그러나 계단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지 않았다.
오늘 그가 접한 소식은 놀라운 것이었다. 최근 장신성은 모든 딸의 사주를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정말로 그중 황후가 될 운명을 타고난 아이를 발견했다. 여섯째 딸인 장서영이었다.
현천기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것이 정말 사대부가 취할 행동이란 말인가. 하지만 장신성은 그리 행동했고, 충왕부와 흠천감 사이의 소문이 무성한 틈을 타 딸 장서영의 이름을 세간에 알렸다. 과연 이상한 자였다.
현천기는 처음에 장신성이 진심으로 장서열을 아낀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어째서 이런 순간에 장서열에 집중된 이목을 장서영에게 나눠 주려 하겠는가. 그는 장신성에게 분명 다른 속내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속셈이겠지.’
초혜전으로 들여보낸 장서영이 모두의 관심을 받게 하려면, 그녀가 봉명지명을 타고 났다는 걸 태자 또한 믿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야 계획한 바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흠천감으로선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이러다간 나라에 봉명지명을 타고나지 않은 처자가 없을 지경이었다. 장서열의 사주까지 가짜가 될 판이었고, 흠천감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되었다. 한숨을 돌릴 수 있게 된 건 오직 충왕부뿐이었다.
현천기의 입가에 옅은 웃음이 떠올랐다. 봉명지명을 타고난 이가 장 씨 가문의 장녀가 아니라는 소문은 장신성의 본심을 꿰뚫었고, 실제로 그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다. 그는 서풍엽이 이번 일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가 궁금했다.
좌상부는 전과 다름없이 조용했다. 조옥언은 비록 좋은 부인은 아니었지만 집안의 주인으로는 손색이 없었다. 연경의 모두가 장서열의 일로 떠들썩했지만 상부에서는 말을 더욱 삼가는 것 외에 아무런 동요가 없었다. 시녀들은 가끔 주인의 앞에서 ‘황후가 될 귀한 사주’라는 말을 농으로 삼으며 한껏 조롱하고 비웃었다. 누구도 그 말에 벌벌 떨지 않았다.
외부에서 금을 배우고 돌아오던 장서영은 남색으로 물든 연잎 모양 치마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을 향해 엷게 눈살을 찌푸리는 모습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푸념하듯 말했다.
“날이 정말 덥구나.”
계집종이 마차에서 내리려는 장서영에게 양산을 펴서 받쳐주었다.
“삼복(三伏, 초복에서 말복까지 열흘의 기간)이라 그렇습니다. 조금 지나면 서늘해질 거예요.”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린 장서영이 기쁘게 소리쳤다.
“오라버니!”
장서양과 장서목이 환한 웃음을 내비치며 앞으로 나섰다. 여동생이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한낮에 다녀오느라 힘들었지.”
장서영이 얼굴에 예쁜 미소를 떠올리며 신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안 힘들어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저의 금(琴) 사부님은 제자를 두지 않으신대요. 그러니까 저는 더 노력할 거예요. 그러면 저를 제자로 거둬 주실지도 몰라요. 오늘은 사부님께서 차를 마시고 가라고 하셨는데 찻잔이 초록빛이라 정말 예뻤어요.”
기뻐하는 동생의 모습에 장서양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퍼졌다. 그는 평소에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다.
“열심히 해. 우리 서영이가 최고야.”
“정말요?”
장서영이 신난 얼굴로 그의 팔을 끌어당기며 둘째 오라버니인 장서목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