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화
“봉명지명(凤鸣之命, 황후가 될 운명)이오?”
“반은 그렇습니다.”
그 반절의 확률이 아들의 모든 것을 빼앗아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조차 누군가 손을 댄 결과입니다. 현재는 운이 몹시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명반(命盘)이 거의 붕괴되기 직전입니다. 요절할 징조이지요. 하지만 또 생기를 띠기도 하니 이것은… 이것은 마치… 영원히 스스로 되살아나는…….”
노방장의 얼굴에 돌연 감동의 빛이 어렸다. 스스로를 멸하고 아홉 생의 부귀를 포기하면서까지 한 집안을 수호할 운명이었다. 충왕이 노방장을 바라보았다.
“사형.”
“아미타불, 그러나 하늘이 노하실 겁니다.”
충왕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늘을 거스르고 운명을 바꾸는 건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스스로 운명을 바꿔 달라고 청하는 이는 없었다. 자칫 잘못하면 커다란 재앙이 되어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도인 역시 감히 자신의 운명을 건드리려 하지 않았다. 누군가의 행복을 빼앗아 다른 이에게 몰아주는 것은 결국 가문을 멸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지 않은 이상 누구도 쉽게 행할 수 없는 일이었다.
충왕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 집안의 누군가가 배후에서…….”
하지만 그건 이치에 맞지 않았다. 어느 누가 가문에서 황후가 배출되는 걸 거부한단 말인가.
‘조옥언?’
그러나 충왕은 즉시 부정했다. 비록 조옥언이 거만하고 제멋대로인 성격이긴 했으나 천금 같은 딸의 운명을 건드릴 인물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란 말인가.
‘서열이의 사주를 알고, 이를 바꿀 수 있는 자.’
순간 충왕의 머리에 장신성이 떠올랐으나 그는 장서열을 황후로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작자였다.
충왕은 도무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귀한 운명이 뒤엉킨 것도 모자라 심지어 다시 살아나는 명이라니, 대체 얼마나 괴이한 생각을 해야 저지를 수 있는 짓이란 말인가.
황후가 될 운명을 빼앗기 위한 조치였다면 그저 그녀가 죽게 내버려두면 그만이었다. 노방장의 말처럼 그대로 요절할 운명을 주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녀의 운명을 건드린 사람은 그녀에게 생기를 북돋워 다시 되살아나는 운명을 만들어 주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벌인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충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지금 그녀가 봉명지명이 아니라는 거요?”
어쨌든 지금 충왕에게는 이 문제가 가장 중요했다. 놀라운 운명에 관한 깨달음은 노방장의 몫이었다.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 말에 화가 난 충왕이 살기를 드러냈다.
“반나절을 떠들더니 그게 무슨 소리요? 황후가 된다는 거요, 안 된다는 거요?”
“예전에는 봉명지명이었으나 이제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충왕이 한숨을 돌리기가 무섭게 다시 노방장이 덧붙였다.
“그러나, 분명 봉명지명이었습니다.”
노방장은 있었다는 것을 강조했다. 충왕이 다시 한번 고함을 질렀다.
“어찌 됐든 지금은 아니라는 거 아니오! 다 지난 일이 된 거잖소!”
사주단자를 낚아챈 충왕이 그대로 뒤돌아 나가다가 잠시 다시 되돌아왔다.
“황제 폐하께는 절대로 말하면 아니 되오.”
연경으로 돌아온 충왕은 즉시 소문을 퍼뜨렸다.
‘호국사 주지 스님의 말씀에 의하면 장 씨 가문에는 봉명지명을 타고난 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장녀가 아니다. 장녀의 사주에 깃든 봉황은 신령이 없어 왕비가 될 징조이나, 반대로 신령이 가득한 봉황을 타고난 이는 장 씨 가문의 다른 딸이다.’
소문은 순식간에 연경 전체에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을 함부로 떠벌리다니!
―적녀에게 봉명지명이 없으면 누구에게 있다는 걸까? 설마 서출에게 있다는 거야?
―서출이 황후가 된다고? 이런 헛소리가 어디 있어!
흠천감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이전에는 황제의 의중을 헤아려 되는 대로 지어낸 말이었다면 지금은 확실한 증거를 제시해 황제의 뜻에 힘을 실어줘야 했다. 장서열의 사주에서 조금이나마 봉명지명으로 보일 징후가 있다면, 이는 반드시 황후의 운명이 되어야 했다.
장신성은 갑작스레 소문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장 씨 가문의 딸들을 기피하기 시작했다.
성질 급한 장신성은 이를 꽉 깨물었다. 분통이 터졌다. 충왕이 호국사에 다녀온 후, 공들여 진행하던 장서영에 대한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대체 충왕 이 자는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게야!’
충왕 서율은 황제와 충돌하는 게 두렵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장신성은 그가 정말로 모든 국면을 뒤집을 정도로 대단한 힘을 지녔다 믿는지 궁금할 지경이었다.
* * *
용포를 걸친 황제가 위엄 넘치는 자세로 용상 위에 앉았다.
“정말 없느냐?”
황제의 물음에 흠천감 감정이 눈을 감고 답했다.
“없습니다.”
잠시 침묵을 유지하던 황제가 다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생길 것이다.”
위엄 넘치는 황제의 말에 그는 순간 장서열은 황후의 운명을 타고난 것이 분명하다고 확신을 갖고 외칠 뻔했다. 황제의 말 한마디는 호국사와 전력을 다해 싸울 원동력을 제공했다. 그리하여 황실과 충왕부, 두 세력 사이 팽팽한 알력 다툼이 이어졌다.
이번 일로 장 씨 가문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충왕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충왕부에서 반격하지 않았다면 장서열은 꼼짝없이 미래의 황후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서풍엽과 그녀의 혼인은 반역이나 다름없었다. 충왕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흠천감의 뒤에는 황제가 있었다. 이들은 충왕이 후에 보복하리라는 것을 알았지만 끝까지 의견을 굽힐 수가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황제에게 먼저 목이 달아날 터였다. 이로써 충왕부와 흠천감, 구염단신과 서풍엽은 연경 최고의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서풍엽 또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불의의 소문은 충왕부에도 어느 정도 위력을 행사했다. 서풍엽은 장서열과 함께 하기 위해 특별히 휴가를 냈다. 괜한 소문으로 의기소침하지 않게 해 주기 위해서였다..
때마침 장서열은 반운루에서 제기차기를 하고 있었다. 이미 오십 번을 넘게 찬 그녀는 서풍엽이 온 것을 보고 의기양양한 얼굴로 백 번까지 차겠다며 놀이를 계속했다.
서풍엽은 그녀의 모습에 지난 며칠 동안의 근심이 깨끗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농교가 가져 온 의자에 앉은 그가 즐거워하는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채색된 제기의 깃털이 춤을 추듯 공중에 흩날렸다. 제기를 차는 그녀는 생기가 넘쳤고 나비가 날개를 팔랑이듯 민첩했다. 뜨거운 햇살도 그녀의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완정과 농교, 그리고 초 마마가 아가씨를 응원하며 이따금씩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연경에 퍼진 소문은 이미 상부에도 전해진 상태였다. 그녀들은 예비 사위 서풍엽이 혹시나 흠천감에 패배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서풍엽의 모습에 그녀들은 안도했다. 이대로 세자와 아가씨가 잘 버텨 준다면 황제께서도 태자와의 혼인을 강제하지 못할 것이다.
“구십팔, 구십구, 백! 대단해요, 아가씨!”
“아가씨, 고생하셨어요!”
“아가씨, 차 드세요.”
제기를 물린 장서열이 미지근한 수건으로 손을 닦은 뒤, 나무 아래 앉아 있는 서풍엽을 향해 달려갔다.
“어때요? 나 대단하죠?”
서풍엽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놀이에선 너를 능가할 사람이 없지.”
그가 직접 차를 따라 그녀에게 건넸다.
“차 좀 마셔. 날이 덥다.”
자리에 앉은 장서열이 차를 크게 한 모금 마신 후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정말 덥네요. 이 지겨운 여름이 언제 끝나려나.”
“덥다는 사람이 태양 아래서 제기차기를 해?”
장서열이 이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재미있으니까요. 우리 시합 할래요? 누가 더 많이 차는지?”
서풍엽이 애원하듯 말했다.
“좀 봐줘.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지 모를까 두렵거든.”
찻잔을 내려놓은 장서열이 포도 한 알을 입에 넣었다.
“오늘은 안 바빠요? 구염락이 귀찮게 하지는 않고요?”
서풍엽이 우물에 넣어두어 얼음처럼 차가워진 수박을 잘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열셋째도 내가 바쁘다는 걸 알고 귀찮게 하지 않아. 오히려 네가 겁먹었을지 모르니 널 위로해 달라고 했어.”
장서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연경을 떠들썩하게 만든 소문을 떠올린 그녀가 서풍엽을 향해 환히 웃어 보였다.
“황제께서 괜한 억지를 부리고 계신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죠. 우리 어머니는 벌써 혼수를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황제께서 계속 소란을 피우면 어머니는 당장 오늘밤에라도 몰래 나를 시집보낼지 몰라요.”
서풍엽도 웃었다. 며칠 동안 그를 억누르고 있던 답답함이 눈 깜짝할 새 사라진 기분이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그는 매번 무거운 짐을 벗은 사람처럼 홀가분하고 편안해졌다.
“장모님의 깊은 사랑에 먼저 감사를 드려야겠군.”
“천만에요. 가족끼리 무슨.”
그녀가 손에 든 포도를 서풍엽의 입에 넣어 주었다.
“달죠? 궁에서 보낸 거예요. 안 먹으면 손해예요.”
소문에 전혀 개의치 않는 그녀의 모습에 서풍엽 역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어차피 서열이의 마음이 자신을 향해 있다면 폐하께서도 어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일이 이렇게까지 커진 것은 결국 충왕부의 불찰이었다.
수박을 집어든 장서열이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본 듯 말했다.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요. 이번 일이 아니었대도 결국 다른 일이 터졌을 거예요. 황제 폐하는 가끔 고집을 부리시지만 무시하면 그만이라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어요.”
서풍엽은 며칠 전 부하에게 보고 받은 내용을 떠올렸다. 장모님은 과거 뭇 남자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그분의 미소를 한 번 보기 위해 모든 남자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 싸움에 끼어들 자격조차 얻지 못했다.
‘어쩐지 아버지께서 그 이야기를 꺼리시더라니.’
서풍엽은 뚱뚱한 아버지를 떠올리며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과거에도 아버지는 외모 때문에 장모님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왜 웃어요?”
장서열이 수박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입 안으로 달콤한 과즙이 흘러 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시원했다.
“우리 아버지 때문에 웃었어.”
서풍엽이 수박 한 조각을 가져 왔다.
“너도 이번 일은 너무 마음에 담아두지 마. 언짢은 일이 생기면 내게 말해. 이번 일이 네 평판에 좋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하니까. 폐하께서 계속 집요하게 나오신다면 나 역시…….”
서풍엽은 약간 쑥스러운 듯했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중간에서 혹시라도 기분 상하는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말해 줘.”
“오라버니가 매일 놀아준다면 기분 상할 일은 없을 거예요.”
초 마마가 미소를 머금고 아가씨에게 눈을 흘겼다.
“부끄러운 줄 모르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