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화
서풍엽은 아버지가 자신에게 무엇인가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의 말을 듣고도 이토록 놀라지 않을 리 없었다.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후에도 마치 하찮은 일이라는 듯한 아버지의 태도는 어딘가 석연치 않았다.
“가서 쉬거라. 너와 서열이의 혼사는 내일 조회 때 내 친히 폐하께 주청 드려 보마.”
물론 황제는 충왕의 요청을 듣지 못한 척 한 귀로 흘려버릴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지난 몇 년 동안 줄곧 장서열을 며느리로 맞고자 했다. 태자가 실패한 이후 그나마 구염락에게 기대를 걸어봄직 했으나, 이제 구염락 역시 실패가 코앞에 놓인 상황이므로 그로서는 피라도 토하고픈 심정일 터였다. 이러한 마당에 가서 장서열과 자신의 아들의 혼인을 윤허해 달라고 주청하는 건 곧 그를 분노케 하고자 작정한 것에 불과했다.
“내 일단 상황을 지켜볼 테니 넌 기다리고 있거라. 무작정 폐하를 찾아가서는 아니 된다.”
“예, 아버지.”
“이만 가 보거라.”
서재를 나온 서풍엽은 즉시 부하에게 서북 장군에 대하여 알아오라고 지시했다. 분명 아버지가 숨기는 것이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구염락을 둘러싼 움직임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는 즉, 정말로 구염락이 황제가 될 수도 있다는 걸 의미했다.
이른 아침, 조용히 가랑비가 내렸다. 시원한 공기는 열흘간 폭염을 견뎌낸 사람들의 숨통을 모처럼만에 트이게 했다.
그러나 충왕 서율의 기분은 그리 시원하지 않았다. 조회를 마친 후 그는 흠천감(钦天监, 천문, 역술, 점사를 맡아보던 기관)에 찾아가 두 아이의 사주단자를 넣을 예정이었다. 그리고 황제에게 찾아가 궁합을 올리고 아들의 혼사를 못 박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아침부터 조정의 분위기는 심상치가 않았다.
“왕야.”
배를 불룩 내민 충왕이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의 얼굴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에게 인사를 건넨 이들이 알 수 없는 눈초리를 보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같은 표정의 얼굴을 열 번째로 마주했을 때, 그는 돌연 험담에 정통한 예부시랑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무슨 일인지 말하라!”
예부시랑은 몹시 억울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흠천감에서 오늘 뜻밖의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좌상부의 여식이 황후가 될 운명인 봉명지명(凤鸣之命)을 타고 났다고 합니다.”
충왕의 손 아래 놓인 탁자가 큰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봉명지명이라니! 그 무슨 해괴한 소리인가!”
놀란 예부시랑이 머리를 움츠린 채 재빨리 그와 멀찍이 거리를 두었다.
“왕야, 고정하십시오. 이건 좋은 일입니다. 자제분은 훌륭한 인물이니 분명 다른 좋은 혼처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왜 하필…….”
‘황제 폐하께서 점찍어 둔 며느리를 고집하는 겁니까.’
물론 예부시랑은 그 다음에 이어질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장 씨 가문의 딸이 어떤 성품을 지녔는지는 하늘이 알고 땅이 알았다. 그녀는 충왕부에서나 서둘러 맞이하고 싶어할 뿐 사실상 어떠한 가문에서도 원치 않는 며느릿감이었다.
화가 난 충왕이 살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행동만큼은 민첩했다.
“흠천감 감정(监正, 흠천감을 관장하는 관리)은 당장 나오거라!”
이미 문 밖을 빠져나가고 있던 흠천감 감정이 외쳤다.
“저는 몸이 좋지 않아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쏜살같이 도망쳤다. 황제가 어째서 그토록 장서열에게 마음을 쓰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긴 세월이 흐르는 동안 황제의 마음은 줄곧 변하지 않았다. 흠천감은 그저 윗전에서 시키는 대로 따랐을 뿐이었다.
이미 십 년 전부터 윗전의 ‘보살핌’을 받아온 흠천감 감정은 누군가 좌상부의 여식인 장서열과의 궁합을 물어 보면 무조건 좋지 않다고 답했다. 설상가상 태자는 홀로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 흠천감에 미리 덧붙일 말을 일러둔 상태였다. 이 모든 게 황제의 뜻을 헤아린 결과였다. 그러나 이것이 충왕의 노여움을 살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발치에 있던 의자까지 부순 충왕이 몸을 돌려 흠천감 감정의 뒤를 쫓았다. 목을 빼고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러 신하들은 결국 충왕이 그를 잡지도, 흠씬 두들겨 패지도 못하자 곧 구경하던 시선을 거뒀다.
“저럴 필요까지 있나? 장 씨 가문 여식이 대체 뭐가 그리 좋다는 게야. 과거 그렇게나 쟁탈전을 벌인 것도 모자라 이젠 아이들까지 그리 만들다니.”
“아직 미련이 남아있는 게지.”
“그러게나 말일세.”
노쇠한 신하들은 이번 혼사 문제에 내포된 힘겨루기의 실상을 파악하고 고개를 저었다.
충왕은 결단코 이 분노를 그냥 삼킬 수 없었다. 젊었을 때의 일을 제외하고라도 자신의 아들과 장서열은 죽마고우일 뿐만 아니라 이미 어렸을 때부터 정혼한 사이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근거로 아들의 혼인을 가로막는단 말인가! 그는 황실의 교묘한 ‘봉명지명’ 따위에 가만히 당하고만 있을 사람은 아니었다.
궁을 나온 충왕은 곧바로 말을 달려 호국사(护国寺)로 향했다. 흠천감의 결과를 뒤집을 수 있는 건 오직 호국사뿐이었다. 이곳이라면 흠천감의 헛소리를 묻어버릴 수 있었다.
호국사의 노방장(老方丈)은 올해 아흔여덟의 나이로 대주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고승이었다. 황제는 최근 몇 년간 노방장과 함께 도를 논하며 그의 심오한 도법을 크게 치하한 바 있었다. 이미 득도에 이른 그의 도법은 자연스럽고 설득력이 있어 하늘의 덕을 두텁게 받은 법가의 진언으로 인정받았다. 노방장은 세간의 칭송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충왕은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황제의 치졸한 수법에 대항하기 위해 염치 불구하고 노방장에 도움을 청했다.
“대사(大师, 승려에 대한 존칭), 나는 대사를 괴롭히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들을 위해 한 번만 점사를 부탁드리오. 그저 나오는 그대로 일러만 주시오.”
그는 장서열에게 봉황의 기운이 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녀가 황후가 될 운명만큼은 아닐 거라 믿었다.
“내 아들이 이런 일로 고통 받게 할 수는 없소. 정 내키지 않는다면 할 수 없으나, 대사가 출가하기 전 어느 여인과 인연을 맺었는지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좋을 게요.”
“소승은 불문에 귀의한 지 오래입니다. 속세의 일은 소승과 무관합니다.”
“그렇지요, ‘비록 내 직접 백인을 죽이지는 않았으나 본디 백인은 나로 인해 죽은 것(我不杀伯仁,伯仁却因我而死,)’이 아니오?”
“아미타불……. 왕야,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십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로다…….”
“쓸모없는 땡중 같으니라고! 딱 한 번만 내 아들을 위해 마음을 좀 써 주시오! 거짓말을 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니잖소. 점사 한 번이면 되오. 만약 끝까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는 만천하에 당신이 음탕한 승려라고 외칠 것이오! 그럼 호국사 주지의 체면이 어찌 되겠소?”
노방장이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든 염주를 굴렸다.
“왕야, 어찌 이러십니까. 호국사는 과거 왕야께서 수행하시던 곳입니다. 그리 모함을 하시다니요.”
“작작 좀 하시오!”
노방장이 다시 탄식을 내뱉었다. 어린 시절 지혜와 총기로 법문을 깨우쳤던 충왕은 오늘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알겠습니다, 왕야. 소승은 과거 스승님께 언젠가 한 번은 왕야를 꼭 도와주겠다고 약조를 하였지요. 부디 왕야께서 하루 빨리 깨달으시어 다시 불가에 귀의하시기만 바랄 뿐입니다.”
“알았으니 얼른 서둘러 주시오!”
‘내가 다시 늙은 땡중에게 속을 성싶으냐!’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충왕은 돌아가신 스님에게 속아 불가에 귀의하려 한 적이 있었다. 스님에게 ‘속았던’ 그는 부처님의 뜻을 헤아리기라도 하면 잘생긴 외모를 가질 수 있는 줄 알았다. 출가한 사람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 분이었다. 충왕은 오래 전 열반에 든 스승님을 떠올리며 속으로 탄식했다.
감상에 젖은 마음을 추스른 충왕이 재빨리 정신을 차렸다. 그가 호국사에 방문한 이유는 흠천감이 내놓은 결과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비록 과거의 그는 ‘조옥언 쟁탈전’에 끼어들 수조차 없는 처지였지만, 아들만큼은 자신과 같은 길을 걷게 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들은 일찌감치 장서열과 정혼한 사이였으니 이미 기선을 제압한 상태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모르는 척하며 장서열을 포기하지 않았다. 부당했다. 황제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충왕 역시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작정이었다.
노방장이 두 아이의 사주단자를 받았다. 귀명(贵命)을 타고나는 건 하늘에서 정하는 것이라 읽기 어려웠지만 괘를 통해 어느 정도 그 내용을 엿볼 수는 있었다. 평범한 운명이 존귀한 운명으로 바뀌기 어렵듯, 존귀한 운명이 천한 운명으로 바뀌는 것 역시 어려운 일이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노방장의 시선이 장서열의 사주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어느 순간 그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충왕은 노방장이 저잣거리의 선무당과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자 화가 치밀어 크게 고함을 질렀다.
“제대로 보고 있는 것 맞소? 괜히 은자를 더 뜯어낼 생각이라면 꿈 깨시오!”
노방장이 한숨을 내쉬었다.
“사제(师弟, 동문수학했던 남자 후배를 이르는 말), 오해 마십시오. 보여 주신 아드님의 사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습니다. 다만…….”
충왕이 즉시 긴장했다.
“다만 뭐요? 내 아들의 사주가 어떠하오?”
노방장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염주를 굴리며 느릿느릿 말했다.
“아드님이 문제가 아니라 같이 주신 아가씨의 사주가… 매우 기이합니다. 변화가 너무 많아요. 이건… 이건 분명히 누군가 그녀의 운명에 손을 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도대체 어떤 이가 타고난 운명을 건드렸단 말인가…….”
충왕이 굳은 표정으로 노방장을 바라보았다. 엄숙한 얼굴을 한 노방장은 허황된 말로 사기를 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충왕은 비록 사형(师兄, 동문수학했던 남자 선배를 이르는 말)에게 불경스럽게 굴기는 했지만 그의 능력만큼은 의심하지 않았다.
“무슨 뜻이오? 사람의 운명에 어떻게 손을 댄다는 말입니까?”
노방장이 빠르게 염주알을 굴리며 상념에 잠겼다. 보통 사람의 운명은 그 움직임이 정해져 있으나 그녀의 운명은 그 곱절을 움직이는 격이었다. 선천적으로 변동이 큰 운이었으나 정세를 바꿀 수 있을 만큼 존귀한 운명을 타고난 것임에는 틀림없었다.
염주를 멈춘 노방장이 점점 더 몸집이 비대해져 가는 자신의 사제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확실히 귀한 운명을 타고 났습니다.”
서율의 표정이 돌연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