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장서열이 서풍엽의 손을 잡았다. 그가 의아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손은 희고 깨끗했다. 햇빛을 보지 못해 창백하게 하얀 것이 아니라 정갈하고 투명했다. 긴 손가락과 뼈마디가 또렷한 손등은 재능과 학식이 풍부한 문인의 것 그대로였다. 그러나 반대로 그의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가득했다. 장시간 활을 쥐고 연습한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흔적이었다. 이는 아무리 약을 발라도 사라지지 않았다.
장서열은 오랫동안 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짠한 마음이 들었다. 서풍엽은 자신이 아는 남자들 중 가장 여자를 존중해 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냉정한 면모를 갖고 있어 호감이 없는 사람은 접근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마음 없는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는 건 서풍엽에게는 죽으라는 것과 다름없었다.
이렇듯 열심히 인생을 개척해 나가는 사람이 어째서 그 치열한 황위 다툼을 보고만 있었을까. 장서열은 안타까웠다.
“오라버니는 태자의 자리가 온전할 거라고 생각해요?”
갑작스런 질문에 서풍엽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뭐라고?”
“내 말 들었잖아요.”
물론 서풍엽은 제대로 알아들었기 때문에 놀란 것이었다. 그가 아는 장서열은 가슴에 원대한 포부를 품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조정 일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도, 황제에게 받는 총애를 빌미 삼아 마구잡이로 행동한 적도 없었다.
그녀의 진지한 얼굴에 서풍엽은 시종에게 밖을 지키고 있으라고 손짓한 뒤, 그녀의 손을 잡고 어르듯 물었다.
“무슨 이야기라도 들은 거야?”
“방금 구염락이 누군가 자신에게 문도무략(文韬武略)을 가르치고 있다고 했어요. 후에 왕이 될 뿐일 황자를, 그렇게 받들어 모실 이유가 뭐죠?”
서풍엽이 냉정을 잃고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열셋째가 그렇게 말했어?”
“네.”
잠시 생각하던 서풍엽이 다시 그녀를 이끌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모란원(牡丹园)으로 향했다.
“사실 얼마 전 구염락이 신형사에서 금수를 구했다고 할 때부터, 그에게 배후가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했었어.”
“금수가 아니라 금용이에요.”
“아무튼, 오늘 열셋째가 궁을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손 공공이라는 자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는 궁에서 어떠한 파벌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인데 놀랍게도 구염락과 가깝더군. 네 말을 들으니 누군가 구염락을 이용해 정권을 바꾸려는 것 같…….”
서둘러 입을 다문 서풍엽이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 있다가 이어서 말했다.
“다른 말은 없었고?”
장서열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배후의 가능성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더 무슨 말을 하겠어요. 솔직히 난 그가 내게 진실을 말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구염락은 그들이 접근한 게 보름 전부터였다고 했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는 이 년 전부터 활을 쏘기 시작했고 섭궁개는 그보다도 훨씬 전부터 접근했어요. 나를 속인 거예요.”
장서열은 볼멘소리를 하고 있지만 정작 화가 나 보이진 않았다. 서풍엽은 그런 장서열의 태도에 매료되었다
“화나지 않아?”
“안 나긴요. 아까 화내는 거 못 봤어요? 하지만 결국 구염락의 개인사예요. 그가 내게 말해 주면 듣는 거고, 말해 주지 않으면 난 아무 것도 모르는 거죠. 누가 그를 가르치든 그와 나 사이는 달라지지 않아요. 이렇게 생각하면 화를 낼 필요가 없어요.”
서풍엽이 잠시 주저하다가 손을 뻗어 그녀를 쓰다듬었다.
“그가 위험할까 걱정되지는 않고?”
“아니요. 그는 남에게 이용당할 바보가 아니에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서풍엽은 무척 흥미로웠다. 대체 누가 그런 큰일을 도모하고 있단 말인가. 심지어 성공을 장담한다는 걸까? 만에 하나 태자가 실각한다 해도,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게 구염락일 거란 보장은 없었다. 황제에게는 수많은 아들이 있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가장 총애 받지 못하는 열셋째 구염락에게 공을 들인단 말인가.
“구염락이… 서북 변경 출신이지, 아마.”
장서열은 골똘히 생각에 빠져있는 서풍엽을 흘끗 바라보며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들이 어째서 구염락을 지지하기로 했는지가 궁금하군.”
서풍엽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내명부의 정세와 황제의 나이, 황자들의 서열, 그리고 궁의 비빈들까지 차례로 떠올린 그가 마지막으로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태자가 물러나면 황후에게는 그 뒤를 이을 황자가 없어.”
장서열이 짧게 탄식했다. 대체 얼마나 오래 전부터 계획된 일이란 말인가.
“황후와 가까운 비빈들의 황자는 나이가 많아봐야 이제 겨우 세 살이야. 권 씨 가문의 여식은 입궁 후 줄곧 회임하지 못했고… 그리고 태자는…….”
서풍엽의 안색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아직까지 아들이 없지.”
“하지만 범억아가 작년에…….”
“조심하지 않아 유산됐다고 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대담한 자들이었다. 사실 황후는 자신의 세력이 약했기에 더욱이 장서열을 태자비로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장서열이 아이를 낳기엔 아직 어리기 때문이었다.
현재 내명부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귀비의 존재였다. 이황자는 귀비 소생으로 부(府)를 하사 받아 이미 출궁하였으며 자손도 있었다. 최근 황후는 이황자에게 왕의 작위를 내려줄 것을 황제에게 주청 드린 상태였다. 무슨 뜻인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다른 황자들을 제외하고 굳이 구염락을 선택해 일을 모의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가장 통제하기 쉬운 인물이기 때문에?
어쩌다 그런 엉터리 같은 결론을 냈는지 알 수 없었다. 지난 몇 년간 구염락이 온화한 모습을 보여주고,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는 듯했기에 가장 안전한 후보라 여긴 것인가. 서풍엽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과연 와호장룡(卧虎藏龙, 재주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는 인재)이로군.”
“맞아요. 그러니 오라버니도 어떻게 하면 유리한 상황을 만들지 방법을 생각해 봐요.”
손에 든 겉옷을 위로 끌어당긴 그녀가 담백하게 말했다. 서풍엽이 재미있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놀랍지 않아? 아무래도 그가 걱정될 텐데.”
“걱정해서 뭐해요. 그를 돕는 자들이 있잖아요. 성공하지 못한다 해도 그게 그의 운명이라면 어쩔 수 없어요. 부귀영화를 얻으려면 위험은 감수해야 하니까. 그가 그 길을 가기로 결정했다면 실패에 대한 대가 또한 스스로 짊어질 줄 알아야 해요.”
전생에서 구염락은 황후의 눈에 들어 그녀의 사람이 되었고, 황후의 지지 끝에 결국 태자가 되었다. 그토록 능력이 뛰어난 이를 구태여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넌 어때. 구염락이 정말 황제가 된다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에요.”
서풍엽은 입을 다물었다. 그랬다. 그녀는 걱정할 게 없었다. 구염락은 그녀에게 각별했고, 그런 그가 황제가 된다면 그녀에게도 나쁠 것은 없었다. 그러나 어쩌면 황제 인생에 단 하나의 오점으로 남을 반독의 역할은…….
서풍엽은 문득 지금 걱정해야 할 문제가 구염락의 배후 같은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돌연 말했다.
“서열아, 우리 혼인하자.”
고개를 든 장서열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아직 열 살이에요.”
“열 살이면 어때. 난 기다릴 수 있어. 우선 혼례부터 올리고, 나중에 계례(筓禮, 15세가 된 여자가 올리던 성인식)를 치르면 그때… 어쨌든, 혼인 먼저 하자.”
서풍엽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장서열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가 마지못해 말을 꺼냈다.
“나라에 열 살 이전에 혼례를 올린 선례가 없다고 알고 있어요. 적어도 열두 살은 되어야 해요.”
서풍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내가 아버지께 혼례를 앞당겨도 된다는 성지(圣旨, 황제의 명)를 받아달라고 할게. 그러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 마.”
“왜 혼인을 앞당기고 싶은 건데요?”
“모르겠어.”
그의 감이 일찍 혼례를 올리는 게 맞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구염락이 한 말은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 상야 부인께도 안 돼.”
그가 다시 덧붙여 말했다.
“물론 상야 대인께도.”
* * *
장신성은 최근 여러 사람들을 만나느라 매우 바빴다. 그는 장서영의 입궁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일일이 자리를 마련했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그 역시 허송세월을 보낸 게 아니었기에, 일을 도모함에 있어 굳이 조국공부의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오늘 저녁 그가 방문한 곳은 황실의 외척인 권 씨 가문이었다. 이들 가문에서 고개를 끄덕여 주기만 한다면 장서영의 일은 이미 성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신성은 흐뭇한 얼굴로 권부(权府, 권 씨 집안의 저택)를 나왔다. 조금 전 권 노야는 충왕 서율의 소식을 기다리겠다는 말로 부탁에 대한 답을 대신했다. 이제 다 된 밥이었다. 서풍엽에게는 이미 언질을 해 두었으므로 무사히 자신의 딸을 데려가고 싶다면 시킨 대로 하는 수밖에 없을 터였다.
장신성이 돌아간 후 권서함이 서재로 들어왔다.
“좌상께서는 아직도 그 일로 정신이 없으신가 봅니다.”
“내버려두거라. 계속 소란을 일으킨다고 뭐가 달라지겠느냐. 그래 봐야 반독이겠지. 허나 반독이라도 되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더냐.”
권서함은 아버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비천한 출신의 장신성이 조국공부의 금지옥엽인 조옥언을 아내로 맞이한 사연은 알고 있었다. 허나 장신성 본인은 정작 자신의 혼인을 썩 달가워하지 않는 듯했다.
“무슨 일이냐?”
“《예기(礼记)》에서 한 대목이 이해가 가지 않아 아버지의 가르침을 얻고자 왔습니다.”
* * *
저녁 무렵, 먹구름이 낀 충왕부에는 서늘한 바람과 함께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서재에 든 서풍엽은 존경하는 아버지께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전달했다. 충왕 서율은 잠시 놀란 기색이었으나 곧 알았다고 대답한 뒤, 화제를 돌려 서북 장군을 책망하기 시작했다.
“아주 한가한가 보군. 국사(国寺, 나라에서 관리하는 사찰)로 보내진 여인은 어떻게 된 게지? 보아하니 아주 잘 지내고 있는 게 분명하구나. 그는 예전부터 그랬다. 승복할 수 없다면 꼭 복수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지.”
“아버지, 그 말씀은…….”
서풍엽이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그 말씀은 서북 장군이…….”
“마음대로 하라지. 좀체 소란을 멈출 줄 모르는 자다. 설령 그의 계획이 성공한다 해도 그건 위에서 묵인한 덕분이다. 그의 움직임을 정말로 폐하께서 모르실 것 같으냐? 폐하는 그저 귀찮아서 움직이지 않는 것뿐이다.”
과거 풍윤(丰润)이 모두를 제치고 조옥언의 호감을 얻었던 건 그가 최고의 지위를 갖고 있었을 뿐 아니라 학식과 재주까지 뛰어난 덕분이었다. 그런 그가 바보일 리 만무했다.
그는 나라와 백성을 안정시키고 근면성실하게 국정을 꾸려 나가 만백성의 칭송을 받는 제왕이었다. 다만 젊은 시절 자신의 명성을 과도하게 중시한 것이 흠이었다. 시간이 흘러 지난날에 대한 후회가 남았으나 이미 청춘은 지나간 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