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3화
구염락이 해명하려 했다.
“서열 누님…….”
“내 이름 부르지 마!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지도 마!”
그가 입을 열려고 하자 장서열이 앞질러 말했다.
“나를 만나고 싶은 마음에 감정이 격해져서 그랬다곤 하지 마. 나를 만나자고 사람을 문 자는 이제껏 없었으니까! 핑계 대지 마, 구염락! 이제 가! 다시는 널 보고 싶지 않으니까!”
구염락의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다시는 나를 보고 싶지 않다니……. 이제야 누님을 찾아냈는데,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니……. 말 잘 들을게요. 착하게 행동할게요. 다시는 누구든 물지 않을 테니 제발 서열 누님, 나를 버리지 말아요. 나를 외면하지 마요…….’
뒤따라 달려 나온 서풍엽이 구염락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그만해! 별일 아니잖아. 난 하나도 아프지 않아. 왜 그리 나무라는 거야!”
서풍엽이 뒤를 돌아 구염락을 달랬다.
“열셋째, 흥분하지 마. 서열이는 순간 화가 나서 그런 거야. 그녀는 얼마 전에도 나를 들볶으며 네가 괜찮은지 물어봤고, 며칠 전 비가 내리는 날에도 내게 궁에 가서 네 안부를 물어보게 했어. 자기가 궁에 없는 동안 혹시라도 네가 나쁜 물이 들까봐 두려웠던 거야. 앞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말하면 서열이도 분명 용서해줄 거야.”
몸을 잔뜩 움츠린 구염락이 조심스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무서웠다.
그러나 장서열에게 구염락은 위안이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초혜전에서의 삼 년, 그리고 지난 보름간 이어진 황제 수업까지. 정말로 구염락이 아무 것도 모른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구염락은 분명 그자들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그저 가만히 어부지리로 황위를 얻을 생각인 게 틀림없었다.
모두가 그에게 속은 것이다.
장서열이 서풍엽을 잡아당겼다.
“비켜요! 말해 봐야 소용없어요. 어차피 고마운 줄도 모를 테니까!”
서풍엽은 정말로 구염락에게 잘해 주었다. 그런 서풍엽을 물다니. 장서열은 그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예 나까지 물어보지 그래? 어서 물어! 뭐하고 있어!”
서풍엽이 구염락의 몸을 누르는 장서열을 껴안아 떼어놓았다.
“네가 소리치니까 자꾸만 겁을 먹잖아!”
겁을 먹어? 장서열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호랑이를 풀어놔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울게 놔둬요. 그래, 실컷 울어! 울고 나면 정신이 들겠지. 네가 안 배운 게 어디 있어? 모르는 게 뭐야? 다 알면서, 실컷 배운 재주로 우리를 상대하고 있잖아! 안 그래?”
장서열은 그가 두렵지 않았다. 구염락은 반성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고 반드시 반성해야 했다.
서풍엽은 장서열의 폭언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향한 구염락이 몸을 웅크린 채 소리 없이 우는 모습을 보았다. 넋을 잃고 슬퍼하는 그에게 안타까움이 일었다.
“열셋째에게 욕하지 마. 난 이제 아프지 않아.”
예전에 서풍엽은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모질게 대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말로 구염락이 질책을 당하는 상황이 오자, 그는 차마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에게 얼마나 마음을 쓰는지 그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상황은 결국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물지 않을게요! 다시는 물지 않아요! 서열 누님, 화내지 마세요……. 누님, 제발…….”
구염락이 앞으로 다가오자 장서열이 그를 밀어내며 다시 소리쳤다.
“가!”
“다시는 그러지 않을게요! 누님, 제발 저를 버리지 마세요!”
장서열은 도무지 구염락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는 여덟 살 때부터 황위를 도모한 자였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꺼지라니까!”
“싫어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장서열을 바라보던 서풍엽이 구염락을 잡아당겼다.
“그만해!”
무어라 대꾸를 하려던 구염락은 화를 삭이지 못하는 장서열의 모습에 억지로 말을 삼켰다. 서풍엽이 한숨을 내쉬며 그를 잡아끌었다.
“일단 화부터 가라앉히고 있어. 난 열셋째를 궁에 돌려보내고 올게. 좀 진정이 되면 그때 내가 다시 데리고 나오는 것으로 하자.”
말을 마친 서풍엽이 구염락을 데리고 가려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결국 서풍엽도 화를 냈다.
“이제 그만해! 서열이 화난 게 안 보여? 좀 가라앉으면 그때 내가 다시 데리고 나와 주겠다잖아! 네 서열 누님을 화나서 죽게 만들 셈이야? 얼른 따라와!”
구염락은 더는 반항하지 못하고 서풍엽을 따라갔다. 그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좌상부의 대문을 나온 구염락은 돌연 가지 않겠다며 상부의 기둥을 끌어안은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서풍엽의 만류에도 소용이 없었다. 구염락에게 방금 전의 기세는 온데간데없었다. 마치 버려진 아이처럼 몹시도 겁에 질린 모습이었다.
서풍엽은 강경한 태도를 취해 봐야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주변 시종들을 물린 후 대문 앞 계단에 걸터앉았다.
“무서웠구나?”
서풍엽의 말에도 구염락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섭다고 이렇게 제멋대로 굴기냐.”
서풍엽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와 함께 있는 시간은 매우 즐거웠고 그러다 보면 자연히 헤어지기가 싫었다. 구염락이 장서열과 함께 지내 온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갑자기 그녀가 사라진 생활에 적응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넌 예전의 네 모습을 잊은 것 같아.”
서풍엽은 그의 대답을 기대하지 않고 이어 말했다.
“넌 매우 총명했어. 남의 미움을 살 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았고, 말타기 놀이를 할 때는 항상 맨 밑에 깔리는 걸 마다하지 않았지. 그러다 내기에서 지면 넌 스스로 진흙 위를 구르며 아이들을 웃게 만들었어. 다음에도 너와 함께 놀아주기를 바라면서 말이야.”
구염락 역시 그때를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넌 다른 사람에게는 똑같지만 유일하게 서열이에게만 태도가 달라졌어. 그래, 넌 그녀의 시중을 열심히 들었지. 하지만 넌 어느새 그녀에게 싫은 것은 싫다고 말할 수 있게 됐고, 그럴 때면 서열이도 네게 딱히 강요하지 않았어.”
“…….”
“서열이가 누구보다도 너를 아낀다는 사실은 네가 가장 잘 알 거야. 그렇기 때문에 네가 선을 넘자 이번만큼은 널 너그럽게 감싸주지 않은 거고. 넌 기분이 언짢았겠지.”
“언짢은 게 아니라… 무서웠어요.”
“그래?”
서풍엽이 텅 빈 거리를 바라보았다.
“사실 넌 예전부터 서열이를 무서워하지 않았어.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감정도 점점 숨기지 않았지.”
서풍엽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켰음에도 불구하고 구염락은 조금도 껄끄러워하지 않았다. 서풍엽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아쉽겠지만 내가 너보다 먼저 자리를 차지했고, 난 네 매형이야.”
“…….”
“그간 서열이가 네게 양보하면 나도 함께 양보해 왔어. 그리고 난 서열이가 네게 모질게 구는 게 싫어.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열이를 위해서 말이야. 네가 크고 나면 언젠가 서열이와 만날 수 없는 날이 오게 될 거야.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가는 그렇게 돼. 난 그때도 네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구염락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받아들일 수 없어요.”
역시 포기란 걸 모르는 녀석이었다. 서풍엽은 욕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이렇게 찾아와서 소란을 피워?”
구염락은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서풍엽을 끌어안고 한바탕 울음을 쏟아 낸 구염락이 설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서열 누님이 저를 위로해 줄 거라 생각했어요. 보고 싶었다면서 제 머리를 어루만져줄 줄 알았다고요. 그래서 머리도 감고 왔는데…….”
마치 냄새라도 맡아 보라는 듯 그가 머리를 들이밀자 서풍엽이 질겁을 했다.
“저도 왜 서열 누님이 갑자기 화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형님, 이제 누님은 저를 좋아하지 않나요? 더 이상 제게 관심이 없는 거예요? 제가 철이 없고 상야 부인을 존중하지 않아서……. 하지만 누님은 이제껏 제게 화를 낸 적이 없었어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우선 서열이에게 진정할 시간을 줘. 그녀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잊었구나?”
“그렇죠?”
물론 거짓말이었다. 구염락의 눈에 희망이 솟아오르자 서풍엽은 그를 당장이라도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서풍엽은 그가 장서열에게서 멀리 떨어져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서풍엽은 바보가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 자신의 입지를 튼튼하게 다지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남아 있었다.
“정말이야. 그러니까 안심해. 내가 있잖아.”
“난 세자 형님을 믿어요!”
구염락이 서풍엽의 장담에 비로소 마음을 놓으며 진심으로 말했다.
“형님은 제게 정말 잘해 줘요.”
몇 년 후, 구염락이 서풍엽에게 끈질기게 혼인을 종용했을 때 서풍엽의 대답 역시 이와 같았다. 다만 서로의 입장이 바뀌었으며, 그 속에 담긴 우정이 사라졌을 뿐이었다.
“기둥은 그만 껴안아.”
서풍엽이 못 말리겠다는 듯 구염락의 손을 기둥에서 억지로 떼어냈다.
“우선 궁으로 돌아가. 내가 나중에 데리고 나올게.”
“서열 누님이 보고 싶어요.”
구염락이 다시 고집을 피우기 시작했다.
“또 시작이구나! 그만해, 또 혼나고 싶어서 그래? 더 난리가 나기 전에 얼른 가.”
서풍엽이 구염락을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마차의 휘장을 걷은 구염락은 마지막으로 부탁하는 걸 잊지 않았다.
“서열 누님께 잘 얘기해 주세요.”
“알았어, 알았다고.”
구염락이 다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내일 또 나올 거예요!”
“알았다니까! 어서 가. 궁문이 닫히면 돌아가고 싶어도 못 돌아가.”
떠나는 구염락을 바라보던 서풍엽은 문득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오늘 두 번이나 구염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구염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구염락이 장성하여 전장에 나가고, 왕이 되어 작위를 갖게 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아내를 서열 누님이라 부르며 뛰어온다면?
서풍엽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지나친 상상이라 치부하며 스스로를 비웃었다.
“구염락이 그럴 리 없지.”
그때, 외출 후 돌아온 장서영의 마차가 길모퉁이에 나타났다. 생각을 멈춘 서풍엽은 다시 몸을 돌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장서영이 마차에서 내렸다. 옅은 청색으로 된 겉옷이 작고 여린 몸을 감싸고 있었다.
“방금 세자 오라버니를 본 것 같은데?”
장서영의 말에 마중 나온 하인이 답했다.
“세자께서 큰아가씨를 뵈러 오셨습니다.”
“그래.”
시선을 내린 장서영이 눈 속에 드러난 감정을 숨겼다.
한편, 장서열은 서풍엽을 기다리고 있었다.
“갔어요?”
쓴웃음을 지어 보인 서풍엽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늘진 곳으로 향했다.
“후회 돼?”
“아니요. 그러게 물면 피했어야죠. 왜 피할 줄도 몰라요?”
“피할 수 있으면 피했지. 이제 말해 봐, 아까 왜 그렇게 화를 냈는지. 아무리 잘못했다 해도 아직 어린 아이야. 왜 아이와 겨루려고 해?”
서풍엽의 팔을 본 장서열은 마음이 아팠다. 내키는 대로 서풍엽을 공격하는 습관을 고쳐놓지 않으면 구염락의 태도는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