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2화
“가자. 풍엽이 우리를 기다릴 거야.”
그녀가 먼저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구염락이 황급히 뒤를 쫓았다.
“천천히 가요, 누님.”
서풍엽은 정원에서 조옥언을 모시고 열렬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의 마음은 온통 반운루에 있었지만 장모님이 놓아주지 않았기에 계속 열의에 찬 담소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부인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서열이가 좋아하니 뜻대로 하게 해주세요. 희극이든 연주든 모두 사람을 즐겁게 하고자 생겨난 것들입니다. 서열이가 즐거울 수만 있다면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조옥언은 얼굴 가득 웃음을 지었지만 입으로는 그와 정반대로 질책을 쏟아냈다.
“자네와 충왕비가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니 그 애가 겁이 없어지질 않았는가. 앞으로 엄하게 대해 몹쓸 버릇을 고쳐주게. 처녀가 얌전히 화초에 물주는 법은 배우지 않고 희극이나 즐기다니, 소문이라도 나면 충왕부의 체면이 땅에 떨어지지 않겠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부인님. 서열이가 희극을 즐기는 건 연경 희극계와 사회의 큰 복입니다. 그녀 덕분에 후세에 길이 빛날 작품이 탄생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조옥언은 눈가에 잡히는 주름도 개의치 않고 활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무리 봐도 예비 사위는 언제나 그녀를 흐뭇하게 했다.
“또 딸아이 편만 드는군. 그래, 전원(前院)에는 들렀고?”
서풍엽이 즉시 답했다.
“예. 상야 대인(相爷大人, 장신성)께 인사를 드렸습니다.”
조옥언이 코웃음을 쳤다.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싹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초혜전의 일에 대해 물었을 테지?”
서풍엽은 감히 숨길 수 없었다.
“예.”
그는 난처했다. 나서지 않으면 미래의 장인어른께 미움을 받을 것이고, 나서면 장모님께 원망을 듣게 될 일이었다.
“무시하게. 서출을 초혜전으로 보내 봐야 반독이나 될 것이 뻔한데, 무슨 풍파를 일으키려고. 제 눈에나 보배 같은 딸인 게지.”
장신성은 장서영을 가르쳐 장원 급제라도 시킬 모양이었다.
서풍엽은 가까스로 웃어넘기며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전쟁통에서도 거뜬히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예비 처가댁에서는 한없이 무력했다.
한바탕 분풀이를 끝낸 조옥언이 말했다.
“서열이는? 어째서 아직도 오지 않는 게야. 홍촉, 네가 가 보거라.”
홍촉이 막 염자(帘子, 커튼)를 걷으려 할 때였다. 장서열이 낯선 남자아이를 데리고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재빨리 한쪽으로 비켜선 홍촉이 절을 올렸다.
“큰아가씨를 뵈옵니다.”
“어머니.”
장서열이 염자를 걷고 안으로 들어왔다.
“입구에 도착하니 어머니께서 저를 찾으시는 소리가 들렸어요. 풍엽 오라버니와 제 험담을 하신 건 아니지요?”
그녀가 어머니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동시에 구염락이 발걸음을 옮겨 그녀의 뒤를 따르려 했으나, 서풍엽이 헛기침을 하며 그를 자신의 뒤로 잡아끌었다.
“초혜전에서 서열이의 반독이었던 열셋째 전하입니다. 문무에 뛰어나 초혜전에서 명성이 자자한 친구인데, 그간 서열이의 반독을 맡느라 충분히 재능을 발휘하지 못했지요.”
조옥언의 안색이 단번에 변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서풍엽의 체면을 봐주지 않고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풍윤(丰润, 현 황제의 이름)의 아들이라고? 보나마나 빛 좋은 개살구겠지.’
장모님이 언짢은 기색을 보이자 서풍엽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몰라 황급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어머니를 위해 새 차를 따라주고 있었다.
“어머니, 오라버니는 제가 집에 있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일부러 열셋째를 만나게 해준 것입니다. 칭찬해 주셔요.”
장서열이 어머니에게 찻잔을 건넸다. 조옥언은 밑에 선 남자아이를 흘끗 쳐다본 후 그와 눈조차 마주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서둘러 서풍엽을 칭찬했다.
“풍엽은 언제나 세심하구나. 공무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서열이를 위해 마음을 써 주다니.”
그러나 조옥언은 곧 눈살을 찌푸렸다.
‘풍엽이 데려왔다면서, 어째서 서열이와 함께 온 게지?’
장모님의 생각을 눈치챈 서풍엽이 재빨리 말을 이었다.
“부인님, 열셋째 전하는 소심하여 낯선 사람을 두려워합니다. 조금 전에도 그는 행여 부인님의 심기를 어지럽힐까 두려워 줄곧 밖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서열이가 들어오다가 태양 아래 선 옛 반독을 불쌍히 여겨 함께 데리고 왔을 겁니다.”
장서열이 찻잔 사이로 서풍엽을 힐끗 바라보았다. 서풍엽은 그녀에게 아부하듯 웃어 보였다.
‘소심해? 고작 그런 아들을 낳아 내 딸의 반독을 시키다니, 녀석에겐 평생의 복이로구나.’
조옥언의 표정이 서서히 누그러졌다. 찻잔을 손에 든 그녀가 물 위에 뜬 찻잎을 후 불었다.
“서열이는 이미 황궁을 떠났으니 앞으로 궁의 사람과는 인연을 끊는 게 좋을 것이다.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니 얌전히 집에서 혼인할 준비를 해야지?”
장서열이 서풍엽을 향해 입술을 삐쭉이며 공손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예, 어머니.”
서풍엽이 쓸개 빠진 사람처럼 웃었다. 그녀의 부드러운 대답이 그를 더욱 기쁘게 했다.
구염락은 홀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장서열과 서풍엽은 마치 목구멍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러운 존재가 된 그를 가려 주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구염락은 자신을 감싸 주지 않는 장서열의 모습에 일순간 손발이 시릴 정도로 한기를 느꼈다. 사실 그도 알고 있었다. 서열 누님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진작에 이를 눈치챘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 애써 외면한 것뿐이었다.
구염락은 무얼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오늘 그녀를 찾아온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궁에서 빠져 나갈 길을 찾지 못해 맹목적으로 그녀를 기다리던 때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조옥언은 황제, 풍윤의 아들을 싫어하는 마음을 굳이 숨기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눈앞에 서 있는 게 태자였더라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풍윤의 아들과 맺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번 생에서 풍윤이 자신에게 진 빚을 청산하게 할 수는 없었다.
‘고작 그런 방법으로 빚을 갚고 후련하게 만들어 줄 성싶으냐?’
장서열은 어머니를 탓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황제와 동년배였고 따라서 그의 자식들에게도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었다. 장서열은 서풍엽을 향해 얼른 구염락을 데리고 나가라고 눈짓했다. 어머니가 더욱 심한 말을 뱉을까 두려웠다.
그녀가 곧 웃는 얼굴로 어머니에게 다가가 귀염성 있게 말했다.
“어머니, 오늘은 풍엽이 어머니께 또 얼마나 좋은 선물을 보냈는지 보여주시겠어요? 제게 준 것보다 좋으면 그를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조옥언이 다시 기쁜 듯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내게 뭐 그리 좋은 걸 줬겠니? 네게 준 것이 진짜 보물이지. 내게 준 것들은 네 걸 사는 김에 생각이 나서 함께 산 것일 게다.”
장서열의 의도를 눈치챈 서풍엽은 조용히 구염락을 데리고 자리를 떠나려 했다. 하지만 구염락이 몸부림쳤다. 그는 아직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상태였다. 서풍엽이 다시 그를 잡아당기자 그가 별안간 아까 물었던 서풍엽의 상처를 꾹 눌렀다.
서풍엽은 아파 죽을 지경이었다. 녀석에게 물린 상처는 이제 겨우 지혈되려던 참이었다. 또 다시 피가 흐르는 걸 느끼며 서풍엽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작작 좀 해.”
구염락은 듣지 않았다.
“못 가요.”
줄곧 곁눈질로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장서열이 결국 미간을 찌푸렸다. 팔뚝을 움켜쥔 서풍엽의 모습에 그녀는 여전히 흥이 올라 말을 잇고 있는 어머니도 잊은 채 물었다.
“풍엽, 왜 그래요?”
조옥언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서풍엽이 아무 일도 아니라고 답하려던 순간, 시종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답했다.
“오시는 길에 세자께서 열셋째 전하에게 팔을 물렸습니다. 그런데 방금 전 또 다시 상처 부위를 건드리신 듯합니다.”
서풍엽이 시종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시종은 몸을 움츠리고 고개를 숙였지만 자신의 발언을 후회하지는 않았다.
‘구염락 따위가 대체 뭐라고!’
세자는 줄곧 구염락을 참아주었다. 예비 세자비 역시 계속 구염락을 봐주고 있었다. 허나 세자의 마음이 불쾌하지 않을 리 없었다.
조옥언이 근심 섞인 얼굴로 바라보았다.
“상처가 심한가? 사람의 입 안에 병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네. 잘못 물리면 치명적이라고 하더군.”
서풍엽이 급히 설명했다.
“아닙니다. 이미 잘 처리했습니다.”
다가온 장서열은 어떠한 여지도 주지 않고 서풍엽의 팔을 끌어당겼다. 그는 작은 상처에 꿈쩍할 사람이 아니었다. 정말로 별일이 아니었다면 얼굴을 찡그렸을 리 없었다. 서풍엽의 소매를 걷어 올린 장서열이 놀라서 헉 소리를 냈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 흰색 고약이 채워져 있었다. 움푹 꺼진 모양을 통해 이미 다친 부위의 피부 조직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혈이 되었던 상처는 조금 전 다시 터져 환부 바깥으로 피가 스며 나왔다. 한 가지 다행이었던 것은 그나마 그가 지혈고(止血膏, 지혈 작용을 하는 연고)로 상처 부위를 메워 놓았기 때문에 보기에 썩 흉측하지는 않았다는 점이었다.
얼마나 심각한 상처인지 알 수 있었다. 설령 개에게 물렸더라도 이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장서열이 이성을 잃고 소리쳤다.
“구염락, 당장 밖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황급히 소매를 내린 서풍엽이 그녀를 말렸다.
“괜찮아. 큰일도 아닌데 화내지 마. 치료하면 금방 좋아질 거야.”
장서열이 말리는 서풍엽을 뿌리쳤다.
“당장 나오래도!”
뭇 사람들의 손을 뿌리친 장서열이 먼저 밖으로 나가 버렸다.
조옥언과 홍촉은 서풍엽의 상처를 보지 못했지만 장서열이 화를 내는 정도로 보아 상처가 가볍지 않음을 눈치챘다. 두 사람은 구염락을 더욱 볼썽사납게 바라보았다.
구염락은 지체 없이 장서열을 따라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조옥언이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저렇게 돼먹지 못한 것이 잘도 황자라 칭하고 다니는군.’
사실 황자가 궁 밖의 사람에게 작별 인사를 고하지 않는 것이 법도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조옥언은 다른 사람이 예를 갖추는 것에 익숙해져 있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풍윤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그의 모든 것을 더욱 거슬리게 했다.
“부인님,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어서 가게. 혹여나 그 아이가 서열이를 다치지 못하게 하고! 정말 사람을 걱정시키는 아이로구나.”
뜰에 도착한 장서열이 돌연 우뚝 멈춰 섰다. 그 뒤를 바짝 뒤따르던 구염락은 하마터면 그녀와 부딪칠 뻔했다.
“서열 누…….”
“대체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야! 구염락, 난 네게 악감정 없어. 그런데 넌 대체 뭐야? 왜 풍엽을 문 거지? 이렇게 소란을 피우는 게 즐거워?”
화가 나 이성을 잃은 장서열이 계속해 그를 몰아붙였다.
“풍엽이 대체 네게 뭘 잘못했는데! 왜 그를 그런 식으로 대해? 그가 네게 얼마나 잘해 줬는지 몰라? 잘해 주니까 우습게 보였니? 난 네가 이렇게 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인 줄 몰랐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