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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71)화 (71/449)
  • 제71화

    구염락은 차분하게 다른 곳을 응시했다. 그는 장서열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에게 반기를 든 뒤였기 때문에 차마 그녀의 눈을 마주볼 수가 없었다. 그는 궁을 몰래 뛰쳐나온 탓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그래서 일분일초도 낭비하지 않고 오로지 장서열과 함께하고 싶었다. 다른 이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체면 같은 건 생각지 않은 채 구염락이 앞으로 다가갔다. 마음 속 두려움을 지운 그가 고집스럽게 장서열의 옆에 섰다. 마치 이렇게 해야만 눈앞의 그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듯.

    장서열은 그간 자신이 강경한 구염락의 모습에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 제멋대로인 그의 모습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구염락을 나무랄 자격이 없었다. 오늘날 그의 태도는 모두 그녀가 가르친 것이었다. 처음에는 자신감을 심어줄 요량이었지만 나중에는 너무 과한 감이 있었다. 당시 이를 저지하지 않고 용인했기에 그녀는 지금 그 대가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그녀는 조금 언짢았지만 그를 질책하지는 않았다.

    “다음에는 우선 내 어머니께 인사를 드려.”

    “네.”

    구염락이 간단히 답했다.

    “누님, 초혜전에 언제 돌아올 거예요?”

    농교와 완정이 아가씨의 뒤를 따르는 남자아이를 바라본 뒤 얼른 고개를 숙였다.

    “돌아가지 않아.”

    장서열의 대답에 구염락이 진지하게 물었다.

    “제가 누님이 돌아오기를 바란다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말도 아니었다. 그의 엄숙한 말은 그녀가 자신을 거절할 리 없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장서열은 그 자리에 선 채 며칠 사이 왠지 대하기가 어려워진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그의 청을 거절해본 적이 없는 그녀였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그녀는 그가 거절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나약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구염락, 거긴 그냥 학당일 뿐이야. 난 돌아가지 않아. 그만둘 시기를 조금 앞당겼을 뿐이야.”

    “왜 앞당긴 거예요?”

    구염락이 이해할 수 없는 마음에 되물었다.

    습관처럼 장서열의 손을 잡으려던 그는 그녀가 손을 피하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혼란에 빠졌다. 우연인지 아니면 자신을 거절하는 표현인지 알 수가 없었다. 구염락은 불안해하고 있었다.

    장서열은 강경한 구염락의 모습이 익숙했다. 물론 그러한 구염락을 대하는 요령은 영원히 터득하지 못할 것이다.

    “나를 질책하는 거니?”

    놀란 구염락이 쩔쩔매며 즉각 부인했다.

    “아니요.”

    깊게 숨을 들이마신 장서열이 초 마마에게 하인들을 데리고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초 마마는 기분이 언짢았지만 분부대로 하인들을 이끌고 저만치 물러났다.

    구염락을 이끌고 다리 옆 버드나무 아래로 향한 장서열이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열셋째, 넌 이제 다 컸어. 내가 지난번에 말했지. 넌 이제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고. 난 네가 그럴 만한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아.”

    장서열이 마지막 말에 힘을 주었다. 그녀는 소란의 이유를 알아내려는 사람처럼 구염락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님과 함께 돌아가고 싶어요.”

    구염락이 다시 그녀를 잡고자 조용히 손을 뻗었다.

    “난 누님과…….”

    몸을 피한 장서열이 다시 진지한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나를 화나게 할 셈이야?”

    그럴 리가. 구염락은 두려운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서러움, 의아함, 그리고 한 줄기 두려움이 그의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손에 아무 것도 잡히지 않는 느낌이었다. 서열 누님이 화를 내고 있었다.

    “누님…….”

    “부르지 마!”

    그녀는 눈앞의 사람이 정말 그 구염락이 맞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손을 뻗은 구염락이 장서열을 단단히 붙잡았다.

    “누님, 한 가지 해줄 말이 있어요.”

    그는 자신이 장서열에게 무엇인가 잘못을 저지른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얼른 잘못을 만회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화가 난 장서열은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구염락!”

    “한 번만! 딱 한 번만 내 말을 들어줘요.”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나면 그녀는 다시 자신을 좋아하고 걱정해 주는 누님으로 돌아올 것이다.

    장서열이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말해.”

    “저쪽으로 가요.”

    조심스레 주변을 살핀 구염락이 그녀를 초목이 우거진 곳으로 데리고 갔다. 주변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가 장서열의 귓가에 바싹 다가갔다.

    하지만 장서열은 황급히 그를 밀어냈다. 그리고 구염락을 데리고 관목이 우거진 긴 회랑을 지나 모란이 만개한 화원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마침내 그의 손을 놓았다.

    “이제 말해.”

    구염락이 붉게 물든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무릎까지 올라온 모란 묘목을 발로 툭 건드리던 그가 여전히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누님이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뭔가 이상해요. 그러니 누님도 조심하세요. 누님도 알겠지만 그동안 다른 사람과 달리 섭 장군은 제게 특별히 잘해줬어요. 그런데 보름 전부터 갑자기 어떤 태감이 찾아와 제게 이상한 것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어요.”

    구염락이 말을 이었다.

    “나라를 통치하는 법, 군자가 하지 않는 일, 국가 간의 전쟁 등 초혜전에서 가르치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제게 알려주려 해요. 게다가 그는 제가 무슨 질문을 하든 모두 받아줘요. 아무리 많이 질문해도 짜증 한 번 내지 않고요. 누님이 생각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티 없이 맑은 눈으로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녀의 마음 속 의구심이 점점 걷히기 시작했다. 어째서 구염락이 자신을 떠보고 있다는 오해를 한 걸까. 그는 이제 겨우 여덟 살이었다.

    장서열은 그들이 이렇게 일찍부터 행동을 개시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이렇게 되면 구염락을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실을 또 누가 알고 있지?”

    한풀 꺾인 장서열을 본 구염락은 속으로 기뻐했다. 역시 서열 누님이라면 자신을 염려해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위험이 닥칠지도 모른다고 판단하면, 어쩌면 그녀는 다시 초혜전으로 돌아올지 모를 일이었다.

    “금용과 소리자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장서열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예상했던 대로 금용과 소리자는 그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섭 장군도 네게 잘해 준다고 했지?”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년 전부터 제게 매일 활을 백 번씩 쏘게 하고, 바위를 들게 했어요.”

    장서열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코앞에서 벌어지는 움직임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구염락이 그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이라 생각했다. 백발백중이었던 그의 화살과 소처럼 센 힘은 모두 무수한 노력 끝에 탄생한 것이었다. 순진한 건 그녀였다.

    ‘섭궁개도 그들 중 한 명인 걸까? 벌써 이 년 전부터 시작된 모의라고?’

    그녀의 머리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음모였다. 또 한 번의 생을 살고 있었지만 그녀의 머리는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장서열이 뚫어져라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하마터면 그에게 기대어 일생의 평안을 바랄 뻔했다.

    서둘러 못난 생각을 지운 그녀가 현실로 돌아왔다. 구염락이 황위에 오르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그의 일생을 조종해 부귀영화를 꾀하는 이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훗날 구염락이 그들의 통제를 벗어난다 해도, 어쨌든 그들은 황제를 옹립한 공을 인정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꾀하고 있는 건 분명한 역모였다.

    하지만 누군가 구염락에게 다리를 놓아준다면 그로서는 걷어 찰 이유가 없으므로 최대한 이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현재 스스로의 궤적을 만들어 가는 중이었고, 미래는 어차피 그녀가 끼어든다 해도 바꿀 수 없었다.

    “넌 괜찮니? 그런 것들을 배우는 게?”

    구염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장서열이 채 물어보기도 전에 자신이 추측한 바를 술술 털어놓았다.

    “누님, 제 생각에 그들은 다른 속셈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 누님, 어서 돌아오세요. 누님도 제가 많이 걱정되잖아요.’

    이어 그가 태감들의 수상한 행동을 낱낱이 고하기 시작했다.

    “대체 그들이 제게 기대하는 게 뭘까요? 만일 제가 불쌍해서 그러는 거라면 먹을 것을 더 주면 되지 뭐 하러 제게 문도무략(文韬武略, 군대를 부리는 책략)을 가르치겠어요. 게다가 그들은 태감치고 아는 것이 너무 많아요.”

    “…….”

    “몰래 그들의 뒤를 밟은 적이 있는데, 그들이 향한 곳은 완세국(浣洗局, 궁인들의 빨래를 도맡는 관청)이었어요. 거긴 더럽고 힘든 일을 하는 곳이잖아요. 나라를 평안케 하는 법을 가르칠 정도로 유능한 태감이 어째서 그런 막일을 하는 거죠? 말이 되지 않아요. 분명 이상해요. 하지만 도통 답을 모르겠어요.”

    “…….”

    “누님, 누님께서는 현명하니 분명 답을 아실 거예요.”

    그러나 장서열은 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문제야? 그들의 저의가 어떻든 넌 이미 보름이나 가르침을 받았잖아.”

    “그건…….”

    그가 원한 반응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그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들이 무슨 의도를 갖고 있든 신경 쓰지 마. 넌 그 가르침이 필요하니?”

    “필요…해요! 하지만…….”

    구염락은 그들에 대한 의심이 극에 달했을 때, 분명 다른 꿍꿍이가 있을 거라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을 처치하려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 역시 장서열처럼 일단 필요한 걸 취하는 쪽으로 생각이 기울었다. 그들이 자신에게 잘해주는 것엔 분명히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후 그들이 원하는 걸 들어줄지는 전적으로 그가 결정할 문제였다.

    구염락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논리정연한 사람이었다.

    “누님, 초혜전으로 돌아와요.”

    순간 장서열은 머리를 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들은 이미 보름 전부터 구염락을 가르쳤다고 했다. 그런데 구염락이 아무 것도 몰랐다?

    그는 총명한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 있을까? 혼자의 몸으로 긴 시간을 악착 같이 살아온 그에게 정말 자신의 도움이 필요한 걸까?

    장서열은 돌연 등줄기가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고 알지 못할 것은 없었다. 보름 전이라면 그녀가 아직 초혜전을 떠나기 전이었다.

    ‘어째서 그때는 말하지 않은 거지?’

    그녀는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다. 그는 구염락이었다. 영원히, 누구의 동정도 필요치 않은 미래의 제왕. 그런 그를 걱정해 무엇 하겠는가. 세상에 그가 넘지 못할 산은 없었다. 단지 그녀가 이제껏 스스로의 역할을 너무 중요하게 여겼을 뿐이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 장서열이 다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 이상 소심하고 천진난만하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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